<74화>
“고마워, 오빠. 내가 요즘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어쩌다 보니….”
“이쪽으로 이사 온 거야? 아니면 직장이 이 근처?”
“아니, 볼 일이 있어서 왔다가….”
예서가 말끝을 흐리자 최인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침 그 앞에서 딱 마주쳐서 얼마나 다행이야. 갤러리에서 고객 그림 받을 게 있어서 갔다가…. 나 결국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게 됐거든. 아버지가 해외 거래처 대표에게 신세 진 게 있어서 꼭두새벽부터 심부름을 보내시지 뭐냐. 그림 갖다 놓고 다시 온 거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
그가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굳이 꼬치꼬치 캐물어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티가 역력했다. 아닌 척하면서 속 깊은, 예전의 최인하 그대로였다.
“오빠한테 정말 큰 신세를 졌어. 하마터면 길에서 쓰러질 뻔했는데….”
“어디 잘못된 건 아니라서 다행이지 뭐. 아무래도 오늘은 하루 입원하는 게 어때? 얼굴이 너무 안 좋아 보이는데. 아, 집에도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때 협탁 위 가방 속에서 문자음이 울렸다. 미국의 고모와 고모부가 공항에 도착했다는 경현의 문자가 와 있었다. 동시에 창원의 요양원에서도 연락이 왔다.
발신자를 확인한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서늘한 예감이 엄습했다. 예상했던 비보였다. 고모에게도 전화가 간 모양인지 요양원 측과 통화를 끊자마자 경현에게서도 재차 전화가 걸려 왔다. 휴대폰 너머로 고모의 오열이 흘러들고 있었다.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요양원에서 만날 약속을 잡은 뒤였다.
“오빠, 나 빨리 시외버스 터미널에 가 봐야 할 것 같아. 이렇게 신세를 졌는데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미안해서 어쩌지? 나중에 내가 다시 연락해서, 오늘 도와준 답례 꼭 할게.”
“잠깐만. 예서야, 좀 진정해. 무슨 일이야? 집에 무슨 일 생겼어?”
“할머니가… 방금 돌아가셨대.”
말을 하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예정됐던 일이었다. 심지어 오랜 기간 교류도 끊어진 데다 어릴 적부터 특별히 정도 없던 할머니였다. 그런데도 기분이 무척 이상하고 묘했다. 응당 슬퍼야 마땅한 일인데 다른 시련이 너무 큰 탓인지, 슬픔이란 감정이 마비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지금 창원에 내려가야….”
“차 있으니까 터미널까지 데려다줄게. 퇴원 수속 밟고 주차장에 가자.”
“아… 응. 고마워.”
예서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신세를 지게 되었지만, 거절할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
“아주 편안하게 떠나셨어요. 평소처럼 낮잠을 주무시다 조용히 가셨죠. 오늘따라 기분도 무척 좋으셔서 잘 드시고 많이 웃으셨답니다.”
마지막까지 할머니 옆에 있었던 요양보호사는 그렇게 말했다. 편안한 마지막이었다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향년 칠순인 고인의 장례식은 고적하고 쓸쓸했다. 첫날엔 조문객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둘째 날부터는 생업에 바빠 서둘러 오지 못했던 오랜 이웃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상주인 고모와 고모부도 오랜만에 조우한 동네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근황을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중에는 모친 이경은의 동창인 김 약사 부부도 있었다.
“예서야. 너무 오랜만에 본다. 아유… 왜 이렇게 말랐니? 응?”
“네, 아줌마. 안녕하셨어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김 약사의 친정도 이 지역이라 비보를 들은 것 같았다. 어쩌면 아들 최인하에게 들었을지도. 그때 저만치 선 최인하가 보였다. 굳이 부모님의 지인 경조사에까지 따라올 이유는 없을 텐데 의외였다.
“오빠. 이렇게 멀리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고생은 무슨. 내가 운전기사 해드릴 겸 모시고 왔어. 괜찮아?”
예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모부와 고모가 다 알아서 하시는 통에 딱히 고생이랄 것도 없었다. 다만, 고인의 맏며느리였던 엄마는 끝까지 오지 않았다. 게다가 예서에게 뭐 하러 거기 가 있냐고 전화로 호통을 치기도 했다.
최인하와 김 약사 부부에게 육개장을 차려주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최인하가 아까부터 계속 진동하고 있었다며 식탁 위 휴대폰을 가져와 건넸다.
“밥은 우리가 알아서 먹을게, 전화 받아 봐. 아줌마신 것 같더라.”
“아… 고마워.”
예서는 잠잠해진 휴대폰을 들고 한갓진 복도로 향했다. 모친의 번호로 부재중 통화가 두 번 와 있었다. 그녀는 단말기를 귀에 붙이며 벽에 걸린 거울을 바라보았다. 움푹 들어간 두 눈,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 유령처럼 창백해 보였다.
-너 어디니? 아직도 거기 있어?
그래도 장례식장이란 걸 염두에 둬서인지, 이경은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하던 어제보다 누그러져 있었다.
“네.”
-삼일장 다 채우고 올 거니? 누가 보면 아주 대단한 효손인 줄 알겠다. 어릴 적에 별로 이쁨받지도 않았는데 무슨 의리랍시고…. 혹시 몰라 말해두는데 그런다고 너나 우리한테 떨어질 유산 같은 건 한 푼도 없을 거야. 요양원 들어가기 전에 사시던 집도 너네 고모 거고, 탈탈 털어봐야 나올 거 하나 없다구.
이경은은 혀를 차며 짜증스럽게 말을 이었다.
-징글징글한 민 씨네랑은 대체 또 언제부터 작당을 해서. 아무튼 내일은 꼭 올라와. 글피부터 추석 연휴인데 외할머니랑 전도 부치고 음식 좀 해야지.
“저는 못 갈 것 같아요.”
제 귀에도 낯설 만큼 건조한 목소리였다. 거울 속 제 얼굴도 못잖게 딱딱해 보였다.
“죄송해요. 저는 며칠 더 여기 있을 예정이에요. 할머니 유품이랑 집 정리하는 것도 도와드리고, 생각할 것도 좀 있어서요.”
-뭐? 정우 보낼 반찬도 할 거라 가뜩이나 손도 부족한데 안 오면 어떡해!
“…….”
-너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어째 차갑고 불퉁하니, 갑자기 싸가지가 없어졌네.
일부러 그러자고 마음먹은 게 아니었다. 저절로 말이 그렇게 나왔다. 예서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이경은은 다시 말을 꺼냈다. 이번에는 한층 나긋해진 어조였다.
-혹시 주혁이랑 싸운 거야?
“…….”
-그럼 추석 끝나고 상견례 안 할 수도 있어? 응?
은근히 환해지는 목소리에 예서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차오르는 눈물을 억누르느라 눈두덩이 뜨거웠다.
“네, 엄마.”
예서는 다시 눈을 뜨고 거울 너머 싸늘한 제 낯을 보았다.
“상견례는 없을 거예요. 그러니 더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휴대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주혁 선배와 파혼하기로 했어요.”
엄마가 그토록 원했던 대로, 선배와 헤어지기로 했어요. 그러니 이제 더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정우의 앞길을 가로막을 일은 없을 테니까요.
-뭐? 그 집에서 그러자고 해? 무슨 일이 있었는데?
안도감과 걱정이 반반씩 섞인 목소리였다.
-한주혁이 뭐 잘못했니? 응? 아니, 서로 그렇게 죽고 못 살더니 갑자기 왜 파혼이냐고!
그래도 자식이라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걱정이 되긴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잘 됐다고 안도할 터였다. 그게 모친이 궁극적으로 바라던 것이었으니까.
“서로 안 맞는 것 같아서요.”
예서는 눈물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공모전 얘기를 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럼 파혼으로 한시름 놓았던 모친의 양가적인 감정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터였다.
그중 어떤 것이 훨씬 크고 압도적인 마음일지는 불 보듯 뻔했다. 딸이 공모전에 합격해 작가로 데뷔하게 된 기쁨, 그리고 그로 인해 정우가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아들에게 갔어야 할 좋은 운이 이번에도 그녀에게 가 버렸다는 분노와 아쉬움 때문에 모친의 내면은 다시 들끓게 될 것이다.
“당분간 바쁠 것 같으니까 연락이 없어도 이해해 주세요.”
-너 목소리가 정말 왜 그래? 정말 괜찮은 거야?
“여기 장례식장이에요. 이만 끊어야 할 것 같아요.”
-아니, 잠깐만! 그래, 너 파혼하기로 해서 마음도 안 좋겠지. 그래도 갑자기 엄마한테 그렇게 쌀쌀맞게 말하고, 좀 당황스럽네. 정우 겨울옷 좀 같이 보자고 부탁할 것도 있었는데….
“끊을게요.”
예서는 더 지체 않고 통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느릿느릿 그 자리에 주저앉아 차디찬 벽에 등을 기댔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시선이 느껴져 무심코 옆을 돌아봤을 때였다. 복도 끝에 최인하가 서 있었다. 한 손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종이컵을 든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예서야.”
“…….”
눈을 깜빡이자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제야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깨달았다. 언제부터 울고 있었던 걸까.
최인하가 종이컵을 감싸고 있던 냅킨을 반대쪽으로 접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입을 꾹 다문 입술이, 더 캐묻지는 않을 듯했다. 예서도 묵묵히 냅킨을 받아 들곤 눈가며 뺨을 닦았다.
“마셔. 유자차야.”
“…고마워, 오빠.”
“잠깐만 같이 있어도 돼?”
예서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혼자 버려두고 가지 못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꼴이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괜찮아. 괜찮은데… 하하….”
쭈그리고 앉은 다리를 바로 펴고 일어나려 옴짝거리는데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다리가 저려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어린 시절의 단상이 뇌리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