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민예서는 결국 그를 이길 수 없다. 이번에도 그를 저버리지 못하고 결국은 따라올 것이다.
주혁은 침대 위에 널브러진 예서를 홀로 두고, 해도 뜨기 전에 다시 회사로 향했다. 출장에서 돌아온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산적한 일들이 많았다. 우선은 경쟁사 J그룹이 자회사 인베스트먼트보다 한발 앞서 베트남 최대 상장제약회사의 지분을 매입한 보고서부터 확인해야 했다.
[너무 일찍 가지 말고 8시쯤 건너가서 케어 부탁해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보고하시고.]
그는 차에 오르자마자 가사를 총괄하는 유 대리에게 문자를 남겼다. 계기판의 숫자가 5를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 5시가 아니라 3시라도 즉각 전화를 받을 터였지만, 지금은 말을 아끼고 싶었다. 가뜩이나 무리한 출장 일정에다 밤새도록 민예서를 들들 볶고 괴롭힌 통에 목 안이 꽉 잠겨 있었다.
밤새 시달리다 새벽 4시쯤에나 제대로 잠이 들었으니 정오까지도 곯아떨어질 터였다. 노트북으로 전송된 보고서를 훑는 동안, 시트를 둘둘 말고 축 늘어져 있던 몸이 떠올랐다. 결국 저항을 멈추곤 제 몸 아래 깔려 정신없이 흔들리던 모습 역시.
문을 닫기 직전의 방 안은 흐트러지다 못해 엉망이었다. 태풍이라도 몰아친 것처럼 광란의 현장, 그 자체였었다.
우는 얼굴이 어찌나 예쁘던지 목이 쉬도록 울기를 바랐다. 그래서 더 미친놈처럼 굴었다. 민예서가 제 목을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끼던 순간에는 더욱.
그때부터 안도감에 숨통이 트이고 피가 거꾸로 솟던 분노가 누그러졌지만, 제멋대로 날뛰는 몸까지 억누르진 않았다. 괘씸함에 제대로 벌을 주고 싶어, 일부러 더 거칠게 몰아치고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평소엔 아무리 이성을 잃어도 그 정도까지 몰아붙인 적은 없었는데.
-변한 게 아니에요. 변한 게 아니라….
눈물을 뚝뚝 흘리던 창백한 낯이 다시 화면 위로 떠 올랐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했다. 유리알처럼 공허한 눈은 그가 알던 민예서의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어떤 경우에나 그를 향한 절대적인 흠모와 애정만이 가득 차 있어야 하는데 어제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제야 깨달았을 뿐이에요. 선배와 나는 안 된다는 걸.
다시 곱씹어도 기가 막혔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5년 가까이 제 일상을 실컷 휘두르고 이렇게 그의 삶을 지배해놓고는 이제 와서 그따위 헛소리라니.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다. 민예서와 그는 이제 떨어질 수 없었다. 한 몸이나 다름없이 서로에게 지독하게 종속된 운명이었다.
유 대리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정확히 8시 5분 전, 텔아비브의 지사에서 급박한 보고를 받았을 때였다. 주혁은 서둘러 브리핑을 하려는 김 비서를 잠시 저지하고 유 대리의 전화부터 받았다.
-본부장님. 지금 출근길인데 방금 사모님이 중간층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시는 걸 봤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보기에도 안색이 창백하고 몸 상태도 좋지 않으신 것 같은데 그냥 가시게 해도 괜찮을까요?
“내가 연락해보죠. 집으로 돌아오면 의료진도 부르고 최대한 푹 쉬게 신경 써 줘요.”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그는 곧바로 민예서의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신호만 갈 뿐 받지를 않았다.
[어딨어? 전화는 왜 계속 안 받아.]
문자를 연거푸 보냈지만 답장은 없었다. 주혁은 혀를 차며 이번에는 빌라 부지의 메인 시큐리티에 전화를 걸었다. 집에 도둑이 들었다 해도 이렇게 손수 연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댁으로 모신 뒤 다시 확인 전화 드리겠습니다.
보안 팀장과 통화를 마치기 무섭게 김 비서가 또 다른 보고서를 그 앞에 내려놓았다. 꽤 심각한 사안이었다. 안일하게 손 놓고 있다가는 이스라엘 굴지의 오펜시브 시큐리티 사이버 보안기업, SDK와의 계약이 불발될 수도 있었다.
“방금 회장님께서도 호출하셨습니다만, 아무래도 본부장님께서 직접 텔아비브로 가보시길 기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자칫하면 경쟁사가 선수를 치게 생겼으니. 10분 뒤 회장실로 건너가겠다고 해요.”
주혁이 보고서 마지막 장을 훑을 때였다. 5분 전 통화했던 보안팀장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본부장님, 방금 사모님이 부지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혼자 댁으로 가시겠다고 해서 먼저 본부장님과 통화를 해주십사 요청을 드렸습니다만….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두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가뜩이나 복잡한 일들에, 다시 먼 길을 떠나야 할 판에 민예서까지 엇나가니 골치가 아팠다.
아직도 화가 난 건가? 어제는 포기하고 순응할 듯 보였는데.
회장실로 향하며 민예서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다. 역시나 응답은 없었다. 주혁은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화를 가라앉히려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민예서. 계속 전화 피할 거야? 내가 기어이 집까지 가야겠어?]
결국 문자로 협박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예상대로 답문이 바로 날아왔다.
[선배. 며칠간 혼자 있고 싶어요. 조용히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으니까 시간을 좀 주세요.]
울컥, 다시 화가 치밀어올랐다. 어젯밤에 얘기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또 무슨 빌어먹을 시간. 다시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 회장실 앞에 다다랐다. 그는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고 답문을 빠르게 보냈다.
[그렇게 해. 다시 며칠 출장 가게 됐으니까 다녀와서 연락할게.]
회장실에 들어서서 백부 맞은편에 앉았을 때 답장이 도착했다.
[네. 잘 다녀오시길 바라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역시 민예서는 그를 놓지 못한다는 안도감, 승리감이 물밀듯 밀려오며 공항으로 향하는 기분도 가벼웠다. 다시 시작될 강행군도 버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이사는 미리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주혁은 유 대리에게 지시를 내리려 하다가 결국 마음을 바꿨다. 민예서가 요청한 대로,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조용히 내버려 두는 게 낫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래, 잠시 머리를 비우려면 그 정도 시간은 필요할 수 있겠지. 공모전에서 또다시 탈락한 상심을 추스르기 위해서라도.
그 후에는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올 거라 믿었다. 하루빨리 그녀가 새로운 SG그룹 일원으로서, 그룹 이미지에 보다 걸맞은 일을 시작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게 뭐가 됐든, 진지하게 전념하길 원하지는 않았다.
큰어머니를 도와 갤러리 부관장 타이틀을 달거나, 디지털콘텐츠팀 총괄팀장 직책 정도를 맡는 게 좋지 않을까. 어차피 일은 실무진이 도맡아 할 테니까.
무엇보다, 이제부터는 오롯이 그에게만 집중하길 원했다. 더불어 돈으로 가능한 건 뭐든 다 주고, 누리게 해주고 싶었다. 그동안 그런 집에서 형편없는 취급을 받고 자란 만큼, 앞으로는 조금도 힘든 일이 없기를 바랐다.
민예서는 이제 오직 그에게만 속한 사람이니까.
***
30분 가까이 걸려 마무리된 편지는 단 몇 줄밖에 되지 않았다. 예서는 그와 첫 인연이 되었던 만년필로 편지를 쓰고 가지런히 접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가사 직원들이 먼저 열어보는 일은 절대 없을 터였다.
후문 게이트에서 보안 요원들이 가로막았지만 결국 부지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차 소리, 삶들의 말소리, 여러 소음이 적막하던 귓가에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시끄럽고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철옹성처럼 높이 둘러싼 담벼락을 넘어서자 비로소 사람 사는 세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후문에서는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역 모두 멀리 떨어져 있었다. 예서는 시선을 내내 떨군 채 산책로처럼 난 거리를 정처 없이 걸었다. 가슴이 무너질 것 같았다.
드디어 원했던 목표를 이루었다. 바라던 꿈은 이제 손 닿을 듯 가까이에 있었다. 국내 최대 규모의 공모전이었고 역대 수상 데뷔 작가들은 모두 하나같이 자리를 잡고 안정적인 커리어를 걷고 있었다. 이제 막 시작일 뿐이었지만, 지금까지처럼 이대로도 성실히 정진한다는 가정하에 그녀에게도 기약된 미래나 다름없다.
날아갈 듯 기쁘고 감사했다. 동시에 가슴이 무너질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아, 독서당로 한가운데 서서 주위를 둘러볼 때였다.
“예서야!”
등 뒤의 갤러리 건물에서 나오던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낯익은 얼굴이 정장 차림으로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인하 오빠…?
이게 몇 년 만이지? 아주 오랜만에 마주한 최인하였다. 반가움에 그에게로 다가가려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아찔한 현기증이 밀려오며 몸이 옆으로 크게 기울었다. 넘어지기 직전, 시야가 완전히 깜깜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최인하가 달려와 그녀를 부축하고 등에 업고 있었다. 예서는 너른 등에 기대어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조금 전에 한주혁의 집을 나온 이후로 지금까지, 모든 순간이 현실 같지가 않았다.
***
몇 시간 뒤 인근 병원에서 깨어났을 땐 여전히 최인하가 옆에 있었다.
“예서야, 괜찮아?”
“어… 응. 오빠가 어떻게 여기까지….”
“갑자기 픽 쓰러지는 바람에 깜짝 놀랐어. 다행히 어디 크게 안 좋은 건 아니고 빈혈성이래. 영양실조 기운까지 있다던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잘 지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최인하가 그녀에게 물을 건네주며 염려스러운 눈빛을 했다. 오랜만에 보는 그는 여전히 다정하고 온화했다. 말쑥한 정장 차림, 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가 학교 때보다 더 깔끔해 보이긴 했지만 거리감은 별반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