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예서야.”
“이거 놔주세요, 선배.”
“지금 혼자 있고 싶다면 그건 좋아. 기사 부를 테니까 차 타고 집에 가서, 마음 추스르며 원할 때까지 시간을 가져.”
그가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빼내려고 하면 할수록 악력은 더 강해져만 갔다.
“하지만 상견례는 안 돼. 예정대로 할 거야. 결혼 날짜도 최대한 빨리 잡을 거고.”
“선배.”
예서가 그에게 붙잡힌 제 손목에 시선을 떨궜다.
“이 손 놓아주세요. 저… 가고 싶어요.”
차오르는 눈물을 참느라 눈가에 열기가 강하게 밀려왔다.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늘 사랑했고 언제나 그리웠던 그만의 체취와 온기, 목소리와 존재로부터 어떻게든 달아나야 한다고 머리에서 경종이 울려대고 있었다.
“대답하기 전엔 안 돼.”
턱이 잡히며 고개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억센 손이 강제로 시선을 맞춰왔다.
그의 손길이 이렇게 난폭한 건 처음이었다. 침대 위에서는 때로 이성을 잃고 격렬할 때가 많았지만, 이렇게 대화 중에 거칠게 만진 적은 없었다.
“선배.”
턱을 잡느라 악력이 살짝 느슨해진 틈을 타 예서가 손목을 빼냈다. 그리고 가방을 집어 들고 그에게서 몇 발짝 물러섰다.
“나중에 마음이 결정되면… 그때 연락할게요. 상견례는 미뤄주세요.”
더는 지체하지 않고 돌아섰다.
“민예서.”
몇 발짝 걸었을 때 냉랭한 음성이 뒤통수에 와 꽂혔다.
“이대로 가면 정말 끝이야. 그래도 좋아?”
“…….”
“네가 이대로 가버리면- 네 마음이 결정되기 전에 내가 먼저 끝내겠다는 소리야.”
지극히 차분한 동시에 얼음처럼 냉혹한 목소리였다. 예서가 그 자리에 서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없어.”
“선배.”
예서가 천천히 돌아섰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이었다. 결연한 의지 또한 서려 있었다. 그 단호함을 느꼈는지 한주혁의 눈매가 더 서늘해져 있었다.
“그렇게 해요, 그럼.”
한주혁의 동공이 일순 흔들렸다. 섬뜩할 정도로 냉랭해 마주 보기 무서울 정도였다. 하지만 예서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선배가 원하는 대로 하세요.”
“…….”
“저는 상관없으니까….”
다시 돌아서려 할 때였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팔꿈치를 잡고 당기자마자 몸이 반 바퀴 돌았다. 한주혁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모골이 송연할 만큼 무서운 낯빛에 예서가 숨을 멈췄다.
“끝내도 좋다고?”
누구 맘대로. 그가 이 악문 채 실소했다. 예서가 미간을 찡그렸다. 잡힌 팔이 부러질 듯 아팠다.
“선배, 이 손….”
“그 오랜 세월, 실컷 날 휘둘러놓고 이제 와서 상관없다고?”
예서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가 다른 쪽 어깨도 움켜쥐고 힘을 주는 바람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슬픔과 절망보다 두려움이 더 크게 엄습해오고 있었다.
“선배, 이러지 말고 좀 진정을….”
그를 뿌리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턱이 다시 부서질 듯 잡히며 차디찬 손가락이 목덜미를 단단하게 눌러왔다. 손가락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머리칼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뿌리까지 뽑힐 듯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선….”
“그때는 너, 이렇지 않았잖아.”
악문 잇새로 짐승 같은 숨결이 새어 나왔다. 감정이 고조되면 고조될수록 점점 더 바닥으로 가라앉는 저음이 섬찟하게 귀를 울렸다.
“내가 미국에 간다고 갑자기 말했을 때. 그때 넌 결국 되돌아섰어. 나랑 끝내기 싫다고. 헤어질 수 없다고…. 생각 안 나?”
-나 너 다시는 안 봐. 그래도 좋아? 좋다면 가.
-싫어. 싫다고….
눈물이 다시 뚝, 떨어졌다. 그날의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선배랑 끝내기 싫어요. 하지만…, 이대로 계속하고 싶지도 않아요. 왜, 왜 매번 나에게 이러는지 모르겠어….
“지금은 감정이 변한 건가? 그래?”
이젠 끝내도 상관없다니.
끊어질 듯하면서도 또렷하게 이어지는 음색엔 분노 외 또 다른 것이 있었다. 정작 눈물을 흘리는 건 자신이건만, 한주혁의 눈가는 금방이라도 오열을 터뜨릴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를 통째로 해체하고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은 눈이었다.
예서는 입술을 달싹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이 메어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렇게 피하고자 했던 결말이, 끝이 다가왔음을 본능적으로 예감하는 비탄에 그저 눈물만이 흘렀다.
“변한 게 아니에요. 변한 게 아니라… 이제야 깨달았을 뿐이에요.”
“…….”
“선배와 나는 안 된다는 걸.”
정적이 영원처럼 흘렀다. 그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머리채를 쥐었던 손은 어느새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다.
“헛소리.”
“아…!”
어깨가 빠개질 듯 아팠다. 한주혁은 그녀가 몸부림치지 못하게 다른 쪽 팔을 제압하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네가 이제 와서 이러면 안 되지.”
그가 짓씹고 음미하듯,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차분한 어조와는 달리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았다. 험악한 눈빛에 예서가 몸을 떨었다.
“그럼 그때 날 들쑤시지 말았어야지.”
“선….”
“좋아한다고, 사귀어달라고 매달리고 흔들지를 말았어야 돼.”
“…….”
“그런 주제에, 지금 와서 상관없다고…?”
네가 감히, 내게서 등을 돌리고 날 떠나겠다고?
“웃기지 마.”
차디찬 실소에 이어, 억센 손이 그녀의 등을 두르며 제 쪽으로 훅 끌어당겼다. 예서가 짧은 비명을 흘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넌 어디도 못 가.”
싫다고 항변할 틈도 없었다. 한주혁의 체취가 입 안 가득 밀려오며 익숙한 감각이 척수까지 관통해 왔다.
하지만 그 익숙한 쾌감은 잠시, 점막을 헤집듯 난폭하게 치대오는 혀에 입 안이 찢어질 것 같았다. 아무리 밀어내려 해도 소용없었다. 잔뜩 꺾인 목을 가눌 수 없어 눈물이 뺨을 타고 턱까지 흐르고 있었다.
잔인한 키스에 예서가 더 힘껏 몸부림쳤지만, 그럴수록 키스는 더 사납게 변해 갔다. 한주혁은 그녀의 저항을 가볍게 누르고 아예 소파 위에 주저앉혔다. 깃털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제압이라 할 것도 없었다.
혓바닥이 얼얼해지다 못해 마비된 것처럼 감각이 없어질 무렵, 예서는 중력이 사라진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어느 순간 푹신한 카펫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혀와 입술이 완전히 떨어지며 단단한 거구에 가려져 완전히 막혔던 시야가 눈이 부셨다. 제 몸에 올라탄 한주혁의 어깨 너머, 찬란한 샹들리에가 비쳐 보였다. 예서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부질없는 몸짓이었다.
“선배, 이러지 말….”
앞섶이 사납게 뜯기는 소리에 예서가 숨을 들이켰다. 단추가 떨어져 바닥 어딘가를 구르는 소리에 심장이 쿵, 떨어지며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다음 순간, 그의 입술이 드러난 쇄골과 젖가슴을 정신없이 핥고 빨기 시작했다.
“아! 선, 선배! 그만…!”
발버둥 치면 칠수록, 두 손목을 한꺼번에 그러쥔 악력은 더 강해지고 고문 같은 애무는 더 잔혹해져만 갔다. 팔목을 잡은 스커트를 강제로 올리고 속옷을 찢어발기는 손길이 괴물 같았다. 예서는 더 저항도 못 한 채 울음을 터뜨렸다.
가슴 속 무겁고 뜨거운 것이 북받치며 비명과 신음 사이를 오갔다. 예서는 더 버티지 못하고 힘을 놓아버렸다. 더 힘을 주고 아무리 악을 써도 어차피 그의 엄청난 힘을 이길 도리는 없었다.
골반이 들리며, 그의 것이 다리 사이를 쑤시듯 사납게 꿰뚫었다. 속살을 짓이기고 끝까지 파고드는 짧은 찰나, 우람한 팔뚝을 움켜쥔 손톱에 힘을 주고 두 다리를 버둥거렸지만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예서는 반항을 멈추고 순순히 다리를 벌렸다.
그래, 이걸 마지막으로 끝내는 거야. 차라리 이런 식으로라도….
흐느낌 속에서도 두 팔을 들어 한주혁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 몸짓을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한껏 굳어 있던 그의 목덜미가 이완되고 있었다. 하지만 막다른 곳까지 거칠게 짓치고 박아대는 힘은 그대로였다.
예서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내내 울었다. 첫사랑, 유일했던 단 한 사람과의 마지막 시간이 될 순간이 너무도 힘이 들었다.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괴롭고 고통스러워, 차라리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기억이 통째로 날아가길 바랐다.
선배에 대한 것만 오롯이 도려내고 새롭게 시작할 수만 있다면. 그럼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