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지금 우리 관계를 보류하겠단 거야? 대체 왜?”
“선배, 나는….”
바로 잡힌 공모전 결과를 알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가 이미 제 입으로 똑똑히 말하지 않았던가. 설령 대상을 수상했다고 해도 응원할 마음이 없다고.
그와의 앞날을 볼 수가 없었다. 보이지가 않았다. 제 꿈이 허무맹랑하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일이며, 그 자체가 무의미한 시간과 에너지 낭비라고 믿는 사람과 어떻게 미래를 함께 할 수 있을까.
“엄마에게… 그리고 선배에게 더는 휘둘리고 싶지 않아요.”
“휘둘린다고?”
그가 목을 죄고 있던 타이를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겼다.
“오히려 휘둘리는 건 내 쪽이야. 늘 그랬어.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서늘한 두 눈이 그녀를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기라곤 전혀 없었다.
“너야말로 항상 날 휘두르고, 정해진 궤도에서 벗어나게 했어. 넌 모르겠지만.”
언성 한 번 높이지 않는데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예서는 경련하듯 달싹거리는 입술을 다시 열었다.
“선배.”
여전히 한 가닥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정정된 공모전 결과에 대해 말한다면, 그럼 그의 생각도 달라지지 않을까. 지금은 쓸모없는 일이라고 단언하고 있지만 만약 그녀가 수상한 걸 알게 된다면.
“선배. 저는….”
“아까 그랬지. 네 어머니에겐 쌍둥이 오빠가 아픈 손가락이나 같다고. 깨물지 않아도 아프고 안타까운 손가락이라고.”
하지만 그가 좀 더 빨랐다.
“내겐 민예서, 네가 그래.”
신경질적으로 당겨낸 타이가 예서의 발치로 툭, 떨어졌다. 그가 소파 등받이를 한 손으로 짚고 상체를 바짝 기울여왔다. 아직 손끝 하나 닿지 않았는데도 다분히 위협적인 몸짓이었다. 실제로 위협할 의도가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민예서는 내 병든 손가락이야.”
예서가 눈을 크게 떴다. 가슴 깊은 곳 어디선가 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게 있어 민예서의 존재는 그래. 잘라낼 수도 없고, 품고 가기엔 너무….”
그때 현관 쪽에서 사이렌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아래층에서 헐레벌떡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호되게 질책하고 연신 사죄하는 두 여자의 음성도 나란히 섞여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유 대리님!”
“또 김 주임이야? 이를 어째! 퇴근하기 전에는 보안 락을 걸어두지 말라고 했잖아. 번번이 깜빡 잊고 그 상태에서 창을 여니까 이 사달이 나는 거 아니야. 빨리 경비실에 연락해서 아무 일 없다고 해.”
“…해서… 피곤해.”
한주혁의 말이 한순간 그 소음에 묻혀서 들리지 않았다. 사이렌 소리가 멈췄을 때 그는 이미 말을 마친 뒤였다.
피곤해.
마지막 갈무리된 단어에 예서의 심장 박동이 다시 빨라졌다. 피곤하다고? 내가 그에게 피곤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었던 건가.
“본부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새로 온 직원이 또 실수로 보안을 잘못 건드렸어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가사 직원이 거실 입구에 서서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유 대리였다. 시끄럽고 번잡스러운 건 질색인 상사의 성향을 잘 아는지라 극도로 긴장한 모습이었다.
“예비 사모님께도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죠.”
“괜찮으니까 다들 퇴근해요. 지금 바로.”
“그럼 저만 남아 있겠습니다. 식사가 막 준비….”
“아니. 유 대리도 가세요. 우리가 알아서 먹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차분하지만 날 선 어조, 거실을 떠도는 이상한 기류에 유 대리도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녀는 멍하니 선 예서에게도 고개를 숙여 보이곤 계단으로 향했다. 예서가 마주 인사하러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한주혁은 창가로 다가서서 담배를 꺼내 물고 있었다. 불을 붙여 한 모금 깊숙이 빨아들이는 차디찬 낯 가득, 격앙된 감정을 억누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가끔 흡연하는 건 알았지만 눈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예서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돌처럼 앉아 있었다. 방금 내가 뭘 들었지?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전에 그가 뭐라고 했더라…?
맞아. 아픈, 아니, 병든 손가락이라고 했어. 그리고… 잘라낼 수 없고 품고 가기엔 너무….
피곤해.
악문 잇새로 씹어뱉듯 차갑게 일갈하던 음색이 뇌리에서 재생되었다. 그리고 과거 어느 날의 제 목소리와 그의 선언까지.
-그러니까 선배 말은… 내가 갖기는 싫지만 다른 사람 주기도 싫다- 이런 마음인 건가요?
-내가 원하는 건 하나야. 간단해. 피곤한 감정 소모, 간섭, 네 뜻대로 날 바꾸려 들거나 맞춰주길 원하는 거- 이것만 삼가고 선을 넘지 않으면 너랑 계속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그 이상은 나도 장담할 수 없어.
이건 아냐. 뭔가… 잘못됐어.
뭔가가 단단히 잘못돼 있었다. 어쩌면 그 뒤틀림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계속됐던 것일지도 몰랐다. 예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기척을 느꼈는지 한주혁이 담배를 찻잔에 아무렇게나 던져넣고 창가에서 물러났다.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예서에게 다가오는 몸짓은 여전히 오만했다.
“아무튼 이제 쓸데없는 생각은 더 하지 말고, 가족과는 연 끊어.”
“…….”
“그렇게 상처만 주는 가족 따위… 더는 미련 갖지 말고 네 쪽에서도 놓아버리라고. 물질적인 것이든 뭐든, 앞으로는 내가 네 몫까지 충분히 도리를 다할 테니까. 네 오빠 학비나 취직도 내가 알아서 해 주고, 약국도 훨씬 좋은 곳으로 옮겨드릴 수도 있어. 아예 건물을 새로 지어 드려도 되고.”
“…….”
“결혼도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냥 가만히 있어.”
네가 힘든 거 싫으니까.
그는 성마르게 덧붙이고 한쪽 소매를 걷어 올렸다.
“일단 내려가. 저녁 먹고 다시 얘기하자.”
“선배는….”
예서는 똑바로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발바닥 아래 까슬까슬한 카펫이 느껴졌다. 무의식적으로 슬리퍼를 벗었던 것 같았다. 여기서 나가기 위해. 한시바삐 벗어나기 위해서.
“선배는 결국 그걸 바랐던 거네요. 선배 뜻대로 하는 인형.”
내내 공허하던 두 눈에 조금씩 초점이 돌아오고 있었다.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피곤해서… 차라리 내가 먼저 놓기를 바라기도 했고요.”
-헤어지고 싶어? 만약 끝내고 싶다면, 네 의향에 따를게.
갑작스러운 입영과 미국행 통보. 군 복무 중 어렵게 주말에 볼 때마다, 오직 바라는 건 몸밖에 없는 것처럼 대화 없이 섹스에만 몰두하던 그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늘 끝내고 싶은지 물었지. 어쩌면 내 쪽에서 먼저 그만하자 말하길 바랐던 건 아니었을까? 무의식 속 깊은 곳에서는, 결국 그녀가 먼저 트리거를 당겨 모든 게 끝나기를 염원했던 건 아닌지.
잘라낼 수도 없고, 품기에는 피곤한 그 ‘병든 손가락’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처음은 아프고 슬플지라도 결국은 홀가분해질 수 있으니까.
-민예서, 너. 지금 나가면 끝이야. 나, 너 다시는 안 봐.
갑작스러운 미국행 통보에 너무 실망한 나머지 그 자리를 떠나려 했을 때. 그때도 내심 같은 마음이었을지도.
-물론 네 쪽에서 먼저 그만두자면 더더욱 할 말 없고. 그래도 좋아? 좋다면 가.
만약 그때,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면 어땠을까. 문고리를 당겨서 문을 열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면.
그럼 이 관계는 진작에 끝났을 것 같았다. 한주혁은 누군가를 붙잡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게 연인일지라도.
아니, 어쩌면 그녀라서 그 모순적인 바람이 더 컸을 것이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결별을 바라는 그 이율배반적인 마음은, 민예서가 남 주기는 아깝고 그대로 품기엔 피곤한 존재였기에 내내 들었던 감정일 테니.
“선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별로 관심이 없는 줄만 알았지, 내가 목표로 삼은 일을… 내 꿈을 선배가 정반대로 여기고 있었을 줄은…. 그렇게 가치 없는 것으로….”
“어차피 네 길도 아니었잖아. 이번 공모전 결과가 그 증거나 다름없고.”
그가 한숨을 삼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뭐가 됐든, 네가 원하는 일이라면 나도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야. 하지만 너에겐 훨씬 더 가치 있고 생산적인 일이 어울려. 시간을 두고 잘 생각해 보면 너도 깨닫게 될 거야.”
“…….”
“설사 네가 공모전에 수상했다고 해도 이번 한 번으로 끝내고, 차라리 회사 내 디지털 콘텐츠 총괄직을 제안할 생각이었어. 일단 목표는 달성해봤으니까 을의 위치는 한 번으로 족하잖아. 그보다는 수백 명의 창작자를 거느리고 콘텐츠 사업을 직접 주관해 보는 게 훨씬 낫지 않겠어? 네겐 그럴 능력도 충분히 있고.”
“선배.”
더는 얘기가 통하지 않았다. 말을 하면 할수록 가슴에 들어찬 납덩이가 점점 더 부피를 늘려가는 듯했다. 이대로는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이만 가볼게요. 지금은… 아니, 당분간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
“어른들께 정말 죄송하지만, 다음 주 추석 이후 예정되어 있던 상견례는 취소를….”
“왜 이래? 대체.”
그가 예서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았다. 예서가 흠칫 놀라 손목을 뿌리치고 돌아서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가 거실 입구를 가로막고 서자, 거대한 바위에 순식간에 퇴로가 막혀버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