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공모전 담당자와 통화를 하고 정식으로 미팅 약속을 잡았다. 막 집을 나왔을 때 그로부터 문자가 날아왔다.
[지금 공항이야. 저녁 7시쯤 도착하니까 집에 올래? 기사 보낼게.]
[괜찮아요, 선배. 지금 밖에 있으니까 제가 알아서 갈게요. 그럼 7시에 봐요.]
얼떨떨한 상태에서 답문을 보내고 길을 나섰다. 당장이라도 공모전의 진짜 결과에 대해 말하고 싶었지만 직접 얼굴을 보고 얘기하고 싶었다.
결과를 들려주면 선배도 달리 생각할 것이다. 그녀가 재능이 없는 일에 매달린다 믿고 있으니까.
선배도 분명히 기뻐해 줄 거야.
이번에야말로 그녀를 응원해 주리라 믿었다. 수상했다는 환희에 가슴이 벅찬 나머지, 아까까지 상처 입고 좌절해 있던 기억은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예서는 은행 업무, 내일 귀국할 고모 부부와 다 같이 요양원에 재방문할 일정, 그 외 여러 급한 일을 마무리하고 바삐 한남동으로 향했다. 시간이 지체되어 어느덧 8시가 가까워 있었다.
한 시간쯤 늦을 것 같으니 먼저 저녁을 먹으라고 문자를 보내놓긴 했었다. 답장은 늘 그렇듯 다정하고 온화했다.
[별로 배 안 고파. 괜찮으니까 천천히 조심해서 와.]
버스에서 내려 빌라 부지로 들어서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야 한주혁에게 제대로 당당하게 제 꿈을 응원해달라, 말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뛰었다. 비단 선배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다 그럴 수 있었다.
아직 가족에겐 알릴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그녀가 그 치열한 공모전에서 우수상에 당선되고 상금 2천만 원에 정식으로 작가 데뷔까지 하게 되었다고 전하면. 그럼 모친은 과연 어떤 얼굴을 할까. 그 모습이 눈에 선했다.
상상만으로도 무거운 추를 매단 듯 가슴이 뻐근했다. 만약 정우였다면 얼마나 기뻐하고 흐뭇해했을지, 그 반대의 모습도 선명히 그려져서 더 아팠다. 온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기분이 들어 눈물이 났다. 예서는 자꾸만 뜨거워지는 눈두덩에 힘을 주었다.
힘내자. 그래도 선배가 있잖아. 세상이 다 내게 등을 돌려도 선배가 있으니까.
그 하나만은 절대적인 그녀의 편이 되어 줄 터였다. 그것만이 기쁨 뒤의 슬픔을 버티게 해 주는 유일한 힘이었다.
예서는 보안 게이트를 통과해 리조트 타운 같은 부지를 한참 걸었다. 동 간 엘리베이터를 두 번 갈아타고 맨 안쪽의 독채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기 짝이 없었다.
낮처럼 환한 관상수 조명 아래 가을을 한껏 머금은 소나무와 단풍이 한 폭의 밤 풍경화처럼 건물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집보다는 갤러리에 가까운 외관, 대한민국 누구나 살고 싶어 할 만큼 근사한 저택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관심은 오직 이 화려한 저택 너머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한 사람에게만 있었다. 만약 이 으리으리한 집 안에 한주혁 대신 다른 사람이 있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가 없으면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
예서는 벨을 누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래층의 가사 직원들에게 먼저 인사한 뒤, 2층 계단으로 올라 로비를 한참 걸어서야 거실이 나왔다.
한주혁은 소파 한가운데 앉아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드레스 셔츠에 타이까지 그대로 맨 걸 보면 공항에서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선배, 좀 늦었죠! 미안해요.”
그가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꽤 길었던 출장에다 장시간 비행 직후라 살짝 피곤해 보였지만 평소의 선배 그대로였다. 그린 듯 우아한 눈썹, 흠잡을 데 없이 단정한 이목구비 아래 꼭 다문 입술이 차갑고 단단한 조각품 같았다.
“출장 일은 다 잘됐어요?”
“응.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더 순조롭게 끝났어. 저녁은 아직이지? 아래층에 직원이 준비 중일 텐데….”
“네, 그 전에 잠깐만요. 먼저 할 말이 있어요.”
예서가 들뜬 마음에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선배도 들으면 분명 놀라겠지. 처음 당선작 발표일 이후로는 다시 홈페이지를 확인하지 않았을 테니까.
“선배, 공모전 일 말인데요, 사실은….”
“그래. 그렇지 않아도 그 얘기, 전화로 하다가 말았었지.”
그가 피로한 듯 눈두덩을 비비며 노트북을 덮었다.
“돌려 말하지 않을게.”
한주혁이 성마른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방금 전까지의 온화하던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혼자 있을 때처럼 냉랭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제 그만 도전해, 예서야. 전화로도 얘기했지만, 포기할 건 빨리 포기하고 올바른 네 길로 가는 게 최선이야.”
“…….”
“다음 공모전 준비도 접고. 일단 우리 결혼 날짜부터 잡자.”
“선배, 저는….”
“서운하게 들릴 거 알아. 하지만 누군가는 듣기 싫어도 옳은 얘길 해 줘야 되니까.”
“알아요, 선배. 알지만…. 공모전에 떨어져서 그런 말 하는 거죠? 만약 대상이나 최우수상, 최소 우수상에라도 당선되었다면 선배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테니까요.”
가슴을 콕콕 찌르는 아픔을 억누르고 말을 이으려 할 때였다.
“선배, 실은 그 공모전 결과가….”
“아니.”
그가 예서의 말을 성급하게 비집고 들어왔다.
“솔직히 수상이 되었다고 해도 진심으로 응원하진 않았을 거야. 어차피 낙선했으니까 솔직히 말하는 거지만.”
“네…?”
“편견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난 소설이나 창작처럼 뜬구름 잡는 일에는 회의적이야. 그 직업군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너에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연달아 낙선하는 결과를 보면 더더욱.”
“…….”
“네 재능과 능력이 아까워. 이제 허무맹랑한 얘기를 꾸며내고 짓는 일엔 시간 낭비 그만하고… 앞으로의 진로를 제대로 생각해 보자.”
예서는 맞잡은 두 손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제 안의 뭔가가 툭 끊어진 것 같았다. 따뜻한 털 슬리퍼 속 열 발가락이 얼음에 담근 양 덜덜 떨렸다.
불길한 각성이 전신에 엄습하며 오한이 일었다. 심장이 꽉 조여드는 압박감, 발아래가 무너질 것 같은 아찔함에 땀이 났다. 푹신푹신한 소파에 앉아 두 발을 카펫에 딛고 있는데도 바닥으로 추락할 것 같았다.
“선배. 다시 한번… 한 번만 물어볼게요.”
두 손을 꼭 말아쥐고 입을 열었다. 혀가 마비된 것처럼 잘 움직이지 않아 어눌한 발음이 새어 나왔다.
“그 말… 진심이에요?”
아닐 거야. 그럴 리가. 내가 수상한 걸 알면 제 일처럼 기뻐하고 응원해줄 거야. 선배잖아. 내가 누구보다 사랑하고 의지하는 주혁 선배.
“내가 설사 대상을 받았다고 해도… 응원하지 않았을 거란 말.”
선배도 나를 사랑해. 그래서 먼저 약혼하자고 했고… 비록 여러 번 상처를 주긴 했어도, 내가 정말 힘들 때는 만사 제치고 달려와 준 사람이야. 그러니까 내가 잘못 들은 게 맞을 거야.
“그런 일… 소설 쓰는 것 자체를 회의적으로 생각한다는 말….”
엄마도, 외할머니도, 쌍둥이 오빠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 모두 그녀의 꿈에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잘못되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은 다르다고 믿었다. 그랬는데….
“예서야.”
한주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안색이 적잖이 창백했는지, 냉혹하게까지 들리던 음색이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너 상처 주려는 게 아니야. 알잖아.”
“…….”
“예서야.”
한주혁이 맞은편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예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는 지금도 이 약혼을 반대하세요. 추석 뒤 상견례 전에, 어떻게든 저랑 선배가 헤어지길 바라고 있으시죠. 그 진짜 이유가….”
그가 다시 자리를 지키고 예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두 눈에 어두운 날이 서 있었다. 그 눈빛은 예서가 모친의 맹신에 대해 전하는 내내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예서는 외조모 윤미실이 한 말로 담담하게 마무리했다.
“외할머니가 그러시더군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지만, 안 깨물어도 늘 아픈 손가락도 있는 법이라고… 그러니까 제가 엄마를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격앙된 감정 없는 목소리였다. 제 귀에도 너무 차분해 기이할 정도였다.
“하지만 저는… 이제 그만 하려고요.”
손등 위로 뭔가가 뚝 떨어져 내렸다. 그제야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느껴졌다.
“이제 그만 놓고 벗어나려고요.”
엄마로부터.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아무리 사랑받는 착한 딸이 되려고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지금, 더는 그에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선배도 그런 것 같아요. 선배만 오롯이 바라보고, 전적으로 매달렸던 것도 이제는 그만해야 할 것 같아요.
“잠깐 시간을 갖고 싶어요.”
시간을 가져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대한 현실의 벽을 마주한 절망에 그저 바보처럼 눈물만 흘렀다.
“어른들께는 죄송하지만 잠시 상견례… 만남을 다 보류하고….”
그런데도 끝을 명확히 말할 수 없었다. 그동안 둘 사이에 쌓여온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인지, 여전히 무의식 속 그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 혹은 둘 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좀 시간을 가지….”
“무슨 소리야.”
한주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은 모습이 어느 때보다 위압적으로 보였다.
다음 순간 그는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위협적인 기운에 예서가 한순간 숨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