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69)화 (70/124)

<69화>

위로의 문자가 하나씩 날아들었다. 그녀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봐주었던 B 출판사의 김 팀장은 장문의 격려 메일을 보내왔다. 여기서 포기하지 말고, 내년 초 다른 공모전에도 다시 도전해 보자는 내용이었다.

[너 요즘 뭐 하느라 통 연락이 없어? 전화해도 안 받고. 아직도 그 소설인지 뭔지 쓴다고 정신이 없니?]

모친 이경은의 문자도 있었다.

[다음 주 추석이라 할머니 올라오시니까 그땐 집에 와서 음식 하는 거 좀 돕고 해. 알았지?]

예서는 휴대폰을 방바닥에 내려놓고 벽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방구석에 한참을 앉아 있다, 제일 많은 부재중 통화와 문자를 남긴 채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올해 지방 근무를 시작한 이후로는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여전히 가장 친한 친구였고, 선배와의 약혼이나 그녀의 남자친구 등 서로의 근황도 자주 나누고 있었다.

-어, 예서야.

채린은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잠시 틈을 두었다. 괜찮아?- 차마 묻지 못하는 물음이 환청처럼 귀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예서는 먼저 나서서 친구의 짐을 덜어주었다.

“채린아. 나, 괜찮아. 낙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내년 1월, 다른 공모전에 다시 도전해 보기로 했어.”

-그래, 잘 생각했어. 달랑 두세 번에 붙을 리가 있니? 아, 내 말은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그만큼 매년 참가작도 몇 배로 몰리고 경쟁도 치열해지니깐. 될 때까지 해 봐야지!

“내년 딱 한 번만 해 보고…. 그때도 안되면… 다시 생각해봐야겠지.”

-야, 미리부터 그런 생각하지 마. 내년엔 꼭 될 거야. 초반이긴 했지만 내가 읽어봐도 진짜 재밌었다구. 그 공모전 심사위원이란 사람들, 진짜 보는 눈도 오지게 없다.

“심사위원들이 그럴 리가 없잖아. 하하… 내 글이 그만큼 모자랐던 거지.”

말을 하는데 목이 메었다. 채린은 잠시 말문이 막혔는지 틈을 두었다가 한주혁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주혁 선배는…? 선배 오늘 귀국한다고 그랬지? 그럼 곧 어르신들 상견례도 하고 결혼 날짜도 잡히겠다. 일단 마음 추스르고 올해는 결혼 준비하는 데만 신경 쓰자. 응?

“채린아….”

예서는 입술을 달싹이다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울음을 꾹 눌렀다.

“나, 약혼 다시 생각하고 있어.”

뭐어? 대번에 비명 같은 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아니 왜? 싸웠어?

“그건 아닌데… 상견례나 결혼은 아직 확신이 들지 않아서…. 조금만 미룰까 싶어.”

-너 미쳤어? 복을 발로 차도 정도가 있지! 아니, 너뿐 아니라 선배 입장에서도 그렇지만!

채린의 언성이 어느새 높아져 있었다.

-도대체 왜? 나 같으면 오늘, 아니, 바로 몇 시간 전 만난 정략결혼이라도 당장에 할 텐데 넌 그것도 아니잖아. 무려 4년을 사귄 CC에다 약혼까지 했는데 갑자기?

아무리 친해도, 둘 사이의 깊은 사연을 속속들이 다 알지는 않았다. 하지만 군 입대와 미국 유학을 며칠 전에 통보한 것이나, 겉으로 보기에는 늘 예서 쪽에서 더 전전긍긍하고 안절부절못했던 것 때문에 외부에서 보는 시각은 좀 다르긴 할 터였다.

-야, 그래. 선배가 좀 차갑고 무심하긴 하지. 아무리 그래도 여자 문제나 주사, 마약, 도박 같은 이슈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제 와서 약혼을 엎겠다는 거야. 너무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고 대화를 좀 해 봐.

“…….”

-선배가 겉으로 티를 안 내서 그렇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잔정 없는 거야 성격인 거고, 그나마 너한테는 속 다 보여주고 너 얼마나 아끼는지 다 보이는데 왜 그래.

기다리던 남자친구가 도착했는지 바로 옆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예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며 눈치 빠르게 통화를 종료했다.

그날 밤,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위경련과 오한이 반복되었다. 먹은 것도 없는데도 자꾸 위가 역류하는 느낌에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속이 간신히 가라앉은 뒤로도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지속되어 잠을 잘 수 없긴 매한가지였다.

두통약을 먹고 서러움과 자괴감에 울다가 잠들었다가, 다시 깨길 반복한 밤이었다. 날이 밝자마자 휴대폰에서 벨이 울렸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 데다 누구와도 통화할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휴대폰이 끈질기게 울어대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하도 울어서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고 화면을 확인했다. 집주인이었다. 예서는 목을 열심히 가다듬곤 통화에 응했다.

“여보세요.”

-으응, 아가씨! 나 세진이, 세경이 할머니예요. 잠깐 통화되우?

“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3층에 거주 중인 건물 주인은 한주혁이 소개해 준 과외 학생 자매의 외할머니였다. 어쩌다 보니 자매의 어머니는 과외 당시 그녀가 자취방을 찾는다는 말에 친정 모친 소유의 다세대 빌라를 소개해 주었다. 그 덕에 졸업 후 이 집에서 2년째 살고 있었다.

-직접 보고 말해야 하는데 미안하게 됐수다. 다른 게 아니라 전에 말했던 우리 아들 부부 있잖아요. 기억나죠? 내년 봄에 미국서 들어올 거 같다 했던. 아무래도 이 집을 전체적으로 손보고 수리해서 아들네랑 합가하지 싶어요.

“아아… 네.”

집을 비워달란 말씀이구나.

-그래서 지금 사는 임차인들이 각자 만기 되는 대로 이사를 다 가줘야 할 것 같은데…. 아가씨는 2월 만기지만 미리미리 이사 갈 집, 알아보는 게 좋지 않겠나 해서. 한창 추울 때 이사 가면 고생이잖우.

“네, 아무래도 그래야겠네요. 지금부터 한번 알아볼게요.”

한주혁이 그의 집으로 들어오라 했던 말이 떠올랐지만 머리에서 애써 떨쳐냈다. 그에게 너무 서운하고 화가 나, 지금으로선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보증금은 언제든 빼줄 수 있으니까 더 일찍 구해지면 언제든 연락해요. 아유, 우리 손주들 과외도 잘 봐주고 애들 엄마가 하도 추천해서 나도 이왕이면 아가씨가 더 오래 살아줬으면 했는데 아쉬워서 어째. 10년 넘게 아가씨처럼 얌전하니 조용하게 살았던 사람도 없었는데.

“아, 아니에요. 저야말로 그동안 감사히 잘 살았어요. 시세보다 훨씬 저렴하게 세 받으셔서….”

-아이구, 이제야 말이지만 그거 세진이 엄마가 그렇게 받으라고 특별히 부탁해서 그런 거구만. 세진이 아빠가 잘 아는 집안사람이 아가씨랑 친했다면서요. 아! 아이고, 지금 미용실에 있는데 통화 그만하고 빨리 머리 감으러 오라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요란한 소음과 함께 통화가 끊겼다. 세진이 어머니가 특별히 부탁했다고? 그저 방이 하나 남아서 소개한 줄로만 알았는데. 그럼 혹시 과외비도….

돌아보면 과외비는 시세의 두 배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과외 기간 동안 명절이나 쉬는 날, 인센티브도 과하게 챙겨줘서 몸 둘 바를 모르기도 했었다.

선배가 뒤에서 챙겨준 거였구나.

불현듯 깨달음이 밀려오며 기분이 이상해졌다. 평소 같았다면 민망하면서도 기뻤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제 통화한 기억 때문에, 순수하게 감동할 수만은 없었다.

-이제 그만해, 예서야.

부드러우면서도 차디찬 어조였다. 다른 의견은 일절 허용하지 않겠다는 무의식적인 압박감이 절로 느껴졌었다.

-안되는 건 빨리 포기하고 네가 잘하는 일을 하는 게 맞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서운함과 분노는 사그라들고 다른 감정이 가슴을 채워왔다. 선배 말이 틀리진 않았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한다면, 안일한 격려나 칭찬보다는 다소 상처가 될지라도 현실적인 조언이 더 약이 되리라.

선배는 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해 준 거야. 그러니까…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자.

그는 진심으로 그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이었다. 딸이 아들의 앞길을 막을까 봐 주저앉길 바라는 엄마와는 달리. 어쩌면 이 세상에서 그녀를 진심으로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아니, 실제로도 그랬다.

예서는 간신히 몸을 씻고 방을 정돈한 뒤 책상에 앉았다. 낙선에의 상심, 모친에 대한 원망과 슬픔, 그리고 전날 한주혁과의 통화가 하나씩 스쳐 가며 조금씩 머리가 차가워질 때였다.

역시 선배 말이 맞는 걸까?

단지 좋아한다는 것만으로, 제 길이 아닌 일에 어리석게 매달려 있는 건 아닐까.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의 말대로, 이쯤에서 접고 그만두는 게 옳은 선택일지도 몰랐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중고등 시절을 거쳐 각종 글짓기와 창작 대회에서 큰 상을 타왔던 건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어쩌면 난 재능이 없는지도 몰라. 비록 김 팀장님은 내 글에서 잠재력을 봤다고 하셨고, 독자 투표 랭킹도 후반부에 치고 올라가 상위권에 들긴 했지만….

결국, 제일 정확한 안목을 지녔을 각 업계의 심사위원 눈에는 들지 못했다. 상업적인 기대치를 충족시킬 만한 작품이 아니었다는 의미는 결국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아주 어릴 적부터의 꿈이었고 오랫동안 준비해 온 목표인데 이렇게 놓아야 한다니. 도저히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때 문자 알림음이 다시 울렸다. 동시에 전화도 걸려 왔다. 예서는 지역번호로 시작되는 전화를 잠깐 젖혀두고 문자부터 확인했다. B 출판사의 김 팀장이었다.

[작가님! 공모전 결과가 다시 수정되어 올라왔는데 확인하셨나요?]

예서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공모전 결과가 수정됐다고? 예서는 서둘러 PC로 시선을 돌려 공모전 홈페이지에 접속해 보았다. 그 와중에도 전화벨은 한 번 끊겼다가 집요하게 다시 울리고 있었다.

게시판을 담은 시야가 크게 깜빡였다.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화면 맨 위에는 심사 과정 중 참가번호 데이터상 오류 및 수상자의 부정행위로 인한 당선 취소로, 수상 내역에 변화가 있다는 공지 사항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게시판에는 이전엔 없던 그녀의 필명과 작품명이 올라가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문자 알림음에 황급히 휴대폰을 살폈다. 처음 보는 휴대폰 번호로 장문의 문자가 와 있었다.

[델타 작가님, 안녕하세요? C 웹소설 공모전 김지민 PD입니다. 지금 통화가 어려우신 것 같아 문자로 먼저 말씀드리니 확인하시는 대로 연락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제 이번 22회 C 웹소설 공모전 우수상 다섯 작품 중 하나로 선정된 작가님의 <신성불가침 영역(Shrine)> 대신, 수상이 취소된 타 참가자의 작품이 올라가는 오류가 있었습니다. 내부 데이터 오류로 인한 저희 쪽 실수였으며 금일 다시 정정되어 게시판에 공지가 되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며…]

휴대폰을 든 예서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우수상이라니. 대상 한 작품, 최우수상 세 작품, 우수상 총 다섯 작품, 직계약 데뷔와 2차 창작물 제작이 보장된 총 아홉 작품 중 하나라니.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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