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68)화 (69/124)

<68화>

가까스로 기운을 차렸던 것도 잠시, 예서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방이 컴컴한데도 불을 켤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몇 시간 전 선배와 나눈 대화가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머릿속에 웅덩이처럼 고여서 그대로 굳어 버린 것 같았다.

그때 현관의 초인종이 울렸다.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 나가보니 외할머니 윤미실이 문 앞에 서 있었다. 한 손에는 보자기가 들려 있었다. 예서는 서둘러 불을 켜고 문을 열었다.

“할머니, 여기까지 어떻게…. 힘들게 이건 왜 들고 오셨어요.”

“택시 타서 힘든 거 하나 없었다. 내려가기 전에 니 함 보고 반찬도 줄라꼬. 그때 급한 일이 있어서 그냥 갔지 싶드마. 아이고, 뭐 내오지 마라. 버스 시간이 있어가 30분만 앉았다 갈끼다.”

“터미널까진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날도 쌀쌀해졌는데 대추차 한 잔이라도 드시고 가세요.”

“됐다 마. 택시나 불러주든가. 느그 엄마가 나이 들면 병원비가 더 나온다꼬 택시 타고 편히 가라고 여비 잘 챙겨주드라. 근데 니 얼굴이 와 그라노? 피죽 하나 못 먹은 얼굴 아이가.”

“괜찮아요. 조금 몸살 기가 있었는데 많이 나아졌어요.”

“하이고, 마. 혼자 있을수록 건강 더 챙기야 된다. 마침 반찬 가져오길 잘했고마.”

두 사람은 식탁에 나란히 앉았다. 주방 겸 거실은 작긴 해도, 채린과 새은이 레트로 카페처럼 꾸며줘서 아기자기하니 예뻤다. 할머니는 자리에 앉아 차를 홀짝이다 불쑥 운을 뗐다.

“예서 니 느그 엄마한테 많이 서운하재.”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며칠 전 할머니와 모친의 대화를 들은 기억이 너무도 생생했다. 차마 그 얘기를 꺼낼 수가 없어서 입술만 달싹이는 사이, 외조모가 찻잔을 내려놓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겠노.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는 법이다만, 안 깨물어도 늘 아픈 손가락도 있는 법인기라. 정우가 느그 엄마한텐 그런 존재다.”

“…….”

“그니까 예서 니가 느그 엄마 좀 이해해 주면 좋겠다카이. 덜 챙긴다꼬 덜 사랑하고 그런 기가 아이거든, 하모.”

그게 다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외조모의 말을 곧이듣고 어쩔 수 없다고, 그 말대로 그녀가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다시 또 체념하고 마음을 다잡고, 그 과정을 되풀이했겠지.

당장이라도 털어놓고 싶었다. 그때 제조실 밖에서 다 들었다고, 엄마가 무속인의 말대로 정우마저 잘못될까 싶어서, 정우에게 가야 할 운과 기를 야금야금 빼먹는 딸이 원망스럽고 그래서 한 번도 진심으로 잘 되기를 바란 적이 없었던 사실을 이제는 다 알아버렸다고, 그렇게 다 토해내고 싶어 입술이 희미하게 떨렸다.

“네, 할머니.”

하지만 꾹 참고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할머니를 붙잡고 하소연을 해봐야 달라지는 게 뭐가 있을까.

“니도 난주 시집가서 애들 낳으면 느그 엄마 조금은 이해가 될끼다. 말 나왔으니 말이니 그런 대단한 집에서는 애를 몬해도 둘 셋은 낳아야 될 낀데.”

“…….”

“니들이 벌써 몇 살이고. 벌써 스물다섯이네. 하이고, 니는 그래도 대한민국서 제일 좋다는 대학이라도 졸업했재, 우리 정우는 언제 학교 마치고 사람 구실 할 꺼고. 들어오면 군대도 가야 하고….”

외조모는 결국 정우 걱정을 한참 늘어놓은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가 정우보단 훨씬 나으니 이해하란 말을 재차 반복하곤 호출된 택시에 올라탔다.

예서는 택시가 완전히 골목 어귀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다리에 힘이 없어 그대로 땅으로 꺼져버릴 것만 같았다.

할머니 말씀이 맞았다. 모친이 어렵게 미국으로 유학까지 보냈지만, 정우보다는 그녀가 더 나을지도 몰랐다. 비록 공모전 준비로 백수 신세나 다름없어서 그녀도 딱히 좋은 상황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만약 작가가 되려는 꿈을 접고 어디 대기업에라도 취직하고자 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한주혁은 취직에 반대할 것이다. 결혼해서 마음 편히, 집에서 가볍게 취미로 쓰기를 원하지 않을까. 그게 늘 그가 바랐던 거니까. 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 그 말씀이 맞아요. 제가 정우보다는 한결 나은 상황일 수는 있어요. 어릴 때부터 늘 그러긴 했죠. 학업성적, 어른들의 칭찬, 그리고 대학 입학까지.

예서는 천천히 돌아서서 집으로 들어섰다. 눈물이 시야를 뿌옇게 흐려서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런데요, 할머니. 그중에 제가 거저로 얻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엄마가 정우는 따로 독서실을 끊어주고 비싼 과외며 소수정예 학원에 보내주신 동안, 저는 쭉 혼자 공부했어요.

제가 홀로 분투하며 힘들어했을 때, 정우는 그 절반만큼도 노력하지 않았어요. 안타깝지만 지금도 그래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늘 정우보다는 낫다고… 훨씬 나으니까 지금보다 더 잘되면 안 된다는 게 과연 정당한 일일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엄마로부터 그런 취급을 받는 게 정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그 마음을 끝까지 이해하고, 선배와의 결혼도 포기함으로써 엄마를 안심시켜 드리는 게… 그게 정말 최선일까요?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 비록 선배가 그녀의 재능을 낮게 보고, 평생의 꿈을 조금 경시한다 느끼긴 했지만 그를 포기할 순 없었다. 그러기엔 그를 너무 사랑했다. 이제 한주혁은 제 삶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괜찮아. 공모전에서 특선이라도 하면… 간신히 입상이라도 하면 선배도 나를 달리 볼 거야. 선배가 엄마처럼 내가 잘 안되기를 바라고 나쁜 말을 한 건 아니니까.

냉정하더라도 현실적인 조언을 해 주려는 의도를 잘 알았다. 서운하고 아픈 것은 별개로, 그런 마음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다.

***

결국 모친에게 말하지 못한 예서는 이틀 뒤 사촌 동생 경현과 창원의 요양원에 내려갔지만  조모와 인사를 나누지는 못했다. 17년 만에 마주한 할머니는 몰라보게 노쇠해 있었다.

하루 종일 병상에 누워만 있다가 가끔 의식이 돌아올 때도 두 손주를 알아보지 못했다. 뇌출혈과 혈관성 치매가 결국 심장질환으로 발전해, 발작이 며칠 간격으로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꼬박 한나절을 요양원 안에 있다가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내내 둘은 말이 없었다. 단지 환자를 지켜보는 게 다였는데도 진이 다 빠져 지쳐버린 까닭이었다. 결국 경현이 편의점에서 캔 커피를 사 와서 하나 내밀며 운을 뗐다.

“누나. 괜찮아?”

“응… 너는? 너야말로 괜찮아?”

예서는 사촌 동생의 안색을 살폈다. 할머니랑 쭉 연락하고 1, 2년에 한 번은 뵈었던 그였다. 그를 손주 중 가장 예뻐했기에 그녀보다 훨씬 더 착잡할 것 같았다.

“마음이 이상해. 슬프고…. 하지만 어쩌겠어.”

그는 눈시울을 붉게 물들였지만 울지는 않았다. 며칠 후 고모 부부가 도착해서 다시 요양원에 오면, 그때는 왠지 펑펑 울 것 같았다. 경현은 어릴 때부터 정이 많은 아이였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 터미널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그녀의 자취방에서 얘기를 좀 더 나누다 자정쯤에 제 삼촌 집으로 돌아갔다.

***

공모전 당선작 심사 결과가 나온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그리고 홈페이지에 게시된 당선작 명단을 확인하기 직전, 한주혁으로부터 문자가 날아왔다.

[아직 싱가포르에 있는데 공모전 결과 막 확인했어.]

예서는 시선을 들어 노트북 화면을 황망히 훑었다. 대상부터 최우수상, 우수상, 그 아래의 인기상과 특별상까지 샅샅이 살피는 두 눈이 흔들렸다.

‘델타(Delta)’라는 성별 미상의 필명, 그리고 <신성불가침 영역(Shrine)>이란 제목은 없었다. 그녀가 만들어낸 세상을 지칭하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었다.

***

민예서는 다음날에야 전화를 받았다. 전날에 문자로 답을 주긴 했지만, 활자로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단문이었다.

[선배.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 미안해요.]

괜찮냐고 묻는 말에도 정해진 답문을 보내왔다.

[네. 괜찮아요.]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된 덕에 내일 귀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차 안에서 홀로 이동하다 시차를 확인한 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민예서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선배. 아직 싱가포르예요?

생각보다 훨씬 담담한 목소리였다. 일부러 쥐어짜는 건지,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건지 가늠이 잘 되지 않았다.

“이틀 뒤 갈 것 같아.”

그는 아주 잠깐 틈을 두었다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공모전 결과가 그렇게 된 이상, 일분일초라도 빨리 현실을 인정하고 궤도를 바로 잡는 게 옳았다.

“이제 슬슬 정리할 거지? 그 집은 만기가 언제…. 아니, 그대로 비워둬도 상관은 없겠지. 사람 시켜서 짐 정리 지시해둘 테니까 김 비서에게 연락해서 날짜 맞춰 봐. 전에 명함 준 거 가지고 있지?”

-네? 집은 내년 2월이 만기인데…. 일단 추석 후에 어르신들 상견례하고 날짜 정하기로 했으니까 그 이후에 천천히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요.

“그냥 한남동 빌라로 들어와. 어차피 신혼집으로 다 꾸며진 집인데. 이제 결혼하고 뭘 할 건지 진로도 생각해봐야지.”

한국에 들어가 제대로 얘기할 생각이었지만 충동적으로 계속 말이 나왔다.

“공부를 더 해도 되고, 일하고 싶으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그것도 괜찮겠지. 그룹 내에서 어떤 일을 할 건지 귀국하면 차근차근 의논해 보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휴대폰 너머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로서는 신경이 끊어질 듯 팽팽한 긴장감이었다. 주혁은 그런 내색 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예서야. 듣고 있어?”

-선배. 저는… 한 번 더 도전해 볼 생각이에요. 내년 초 다른 공모전에 다시….

“이제 그만 해. 예서야.”

다시 도전하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불쑥 말해버렸다.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입 밖으로 튀어나온 뒤였다.

“안되는 건 빨리 포기하고 네가 잘하는 일을 하는 게 맞아.”

다시 정적이 흘렀다. 그때 차창 너머로 거대한 병원 부지가 보였다. SG 의료재단에서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은 파크웨이 메디컬 그룹의 래플즈 병원이었다.

“지금 현장에 도착해서 더 통화는 어렵겠어.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차 문을 손수 열어주는 바람에,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통화를 종료했다. 다른 일정을 마치고 몇 분 뒤 도착한 백부, 그를 둘러싼 임직원 무리 때문에 더는 예서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차피 한국에 돌아가서 마주 보고 얘기하면 다 해결될 거라 믿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