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그녀가 칭찬받을 기대 속에 1등짜리 성적표와 상장을 가져올 때마다 모친은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을 했었다. 예상만큼 기뻐 보이지도 않았다. 그럴 때마다 어린 그녀는 모친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해서라 생각하며 더 열심히 노력하고 애썼다.
정우가 형편없는 성적을 받아오거나 학교에서 말썽을 일으켜 연락을 받았던 날에는 둘 다 나란히 혼이 났다. 정우가 감기라도 걸려 앓아눕거나 아플 때, 까닭 없이 야단맞고 매까지 맞았던 기억도 났다.
-오빠가 저렇게 아픈데 뭐가 좋다고 웃고 까부니? 응? 너만 멀쩡하면 다야? 몹쓸 계집애! 이기적인 년 같으니!
초등학교 6학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모친과 친한 아주머니가 집에 놀러 와 꿈이 뭐냐고 물었던 날은 지금도 잊히지가 않았다.
-아유, 우리 예서 이번에 전교 회장 됐다며? 얼굴도 예쁘고,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고. 어쩜 이렇게 부족한 게 하나도 없니? 예서는 나중에 크면 뭐가 되고 싶어? 의사? 변호사? 대학 교수?
-음… 저는 작가나 출판사 사장이 되고 싶어요.
-작가? 하긴 요즘은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공하면 웬만한 전문직 못잖게 돈도 많이 버니까. 우리 예서, 책을 워낙 좋아해서 독후감이나 글짓기상이란 상은 다 휩쓸더니 꿈도 이렇게 야무지구나? 정우는 늘 만화책만 보는 것 같던데 쌍둥이가 어쩜 이렇게 다르니, 호호.
아주머니가 가고 난 뒤 예서는 모친에게 뺨을 맞았다. 당신 친구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놨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저 저만 칭찬 들으면 좋아라 백치처럼 웃는 꼴 좀 봐. 지 오빠 흉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지?
그날 예서는 저녁때까지 왼쪽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모친이 양 뺨을 번갈아 후려칠 때 눈을 잘못 맞아 왼쪽 눈시울이 보랏빛으로 물들고 퉁퉁 부은 까닭이었다.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그녀가 더 공부를 잘할까 봐, 선생님들에게 더 칭찬받고 더 눈에 띌까 봐, 좋은 대학에 갈까 봐, 졸업하고 어디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국비 유학이라도 가게 될까 봐 엄마가 늘 어딘가 전전긍긍, 불안해하던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납득이 됐다 해서 수긍이 가는 건 아니었다.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속인의 말 때문이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쌍둥이의 사주가 서로 척을 져서, 너무 잘 난 어느 한쪽이 다른 하나를 짓누르고 망친다니.
그래서 엄마는 그 한쪽을 철저히 보호하고 감싸기로 결심한 걸까. 그런 말을 듣기 전부터도 마음이 더 가고 아픈 손가락이었던 정우를 지키는 쪽으로.
예서는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믿게끔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빠는 쌍둥이에게는 물론 아내에게도 무척 좋은 남편이었다. 정우를 향한 모친의 편애 문제를 제외하면, 부모님은 사이가 꽤 좋은 편이었다.
그래서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친할머니의 강요에, 빗길에 무리해서 모친을 뵈러 가던 길의 차 사고였다. 모친이 장례식장에서 당신의 시모를 향해 악다구니를 썼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남편에게 절명수가 보인다던 무속인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신의 인생에서 이제 하나 남은 남자, 정우마저 잘못될까 두렵고 무서웠을 것이다. 남의 일이었다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심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남의 일이 아니라 제 가족, 그녀를 배 아파 낳은 친어머니와 그녀의 일이었다. 그래서 도저히 이해도, 납득도 되지 않았다.
-내가 언제 예서 잘못되길 바란 것도 아니고. 딸도 내 자식인데 내가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을 리가 있겠냐구요.
그 말대로였다. 모친은 딸도 사랑했다. 아들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애정이 있었다. 하지만 아들의 장래나 안위가 위협받는 걸 용납하진 못했다.
모친에게 민정우는 아픈 손가락이었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기 때문이었다.
***
며칠을 꼬박 앓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공모전 심사 기간이라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결과를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조여들었지만, 지금은 며칠 전 모친과 외조모의 대화를 들은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무속인의 말 때문에 그토록 약혼을 반대하고 못마땅하게 여겼던 거라니. 결국 그녀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정우 때문이었다는 게 너무나 경악스러웠다. 그녀가 잘되면 잘될수록 정우는 그 반대일 거란 맹신으로 인해서.
꼬박 나흘을 몸져누워 있는 동안 부재중 통화와 메시지가 꽤 많이 쌓여 있었다. 예서는 정신을 차리고 B 출판사 김 팀장의 공모전 응원 문자, 채린과 새은의 안부 톡, 그리고 내일 한국에 도착할 거라는 사촌 동생 경현의 메시지, 그리고 한주혁의 문자까지 하나씩 확인했다.
[통 연락이 없네. 많이 바빠? 출장이 예상보다 길어져서 귀국이 며칠 더 미뤄질 것 같아. 싱가포르에도 들를 예정이고. 혹시 뭐 갖고 싶은 거 있으면 사 갈 테니까 문자로 보내.]
모친에게선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만약 정우가 밥도 안 먹고, 반찬도 냉장고에 두고 갔다면. 다음 날에라도 직접 가지고 오거나 택배 서비스를 시켜서라도 어떻게든 전해 주려 애썼을 것이다. 아니, 정우였다면 애당초 독립을 시키지도 않았겠지.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왈칵 터졌다. 이제 다시는 모친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무도 큰 상처였다. 앞으로가 막막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진동으로 돌려놨던 휴대폰이 지잉 울었다. 한주혁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즉시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예서는 목을 빠르게 가다듬고 통화에 응했다.
“선배.”
-울었어? 목소리가 왜 그래.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목이 꽉 잠겨서 숨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친 얘기는 하지 않았다. 출장 중인 사람에게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니다.
“아… 아니에요. 며칠 좀 아팠어요.”
-아팠다고? 어디가.
“그냥 몸살요. 뒷부분 수정하느라 며칠 조금 무리했더니 조금….”
침묵이 흘렀다. 단 몇 초밖에 되지 않는데도 긴장에 심장이 서늘해졌다. 이윽고 무거운 한숨이 휴대폰 너머로 흘러들었다.
-왜 몸살이 날 정도로 무리를 해. 어차피….
그가 말을 끊었다. 어차피? 그다음은 뭐지? 왠지 모를 싸늘한 예감에 예서가 저도 모르게 재촉하고 나섰다.
“어차피… 뭐요?”
-아냐. 아무것도.
“선배, 괜찮아요. 그냥 말해도 되니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다시 갈라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예서는 목을 가다듬고 재차 물었다.
“그냥 말해줘요.”
***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혁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지그시 누르며 화를 억눌렀다. 공모전 작업 때문에 아팠다는 말을 듣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깟 소설이 뭐길래. 그런 허무맹랑한 얘기를 지어내는 것에 왜 그렇게 몸을 해쳐가면서까지 몰두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민예서는 그에게만 집중하면 되는데. 오롯이 그 한 사람에게만.
-선배. 그냥 말해줘요. 내 기분 생각해서 선배가 하고 싶은 말 못 하는 거 싫어요.
컨디션이 정말 좋지 않은 듯했다. 착 가라앉아 힘도 없는 주제에 그의 속내를 반드시 들어야겠다는 의지가 선연했다. 그 결연함에 더 화가 났다.
“어차피 우수상 이상 당선은 어렵잖아. 최근 추이를 확인해봤어.”
민예서의 작품 랭킹과 독자 투표 결과는 현재로선 월등히 높지는 않았다. 운이 좋으면 특별상 20작 안에는 들어갈지 모르나, 결국 대상이 아니면 의미도 없다. 늘 1등의 결과, 최고의 성과에만 가치를 두는 그의 기준에서는 그랬다.
휴대폰 너머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주혁은 소리 없이 한숨을 삼켰다. 당연히 제 말에 상처받고 낙담했을 것이다. 하지만 희망도 없는 일에 응원과 칭찬은 오히려 독이다. 무조건 격려만 하고 부추기는 건 오히려 상대를 망치는 거나 다름없었다.
“예서야.”
여전히 침묵만이 흘렀다.
“너 상처 주려고 한 말 아냐. 내 말은….”
-네, 알아요. 선배.
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선배 말이 맞아요. 우수상 이상은 희망이 없고 그 이하, 인기상이나 특별상도 어려울지 모르겠어요.
너무 담담하고 차분해서 오히려 석연치 않았다. 주혁은 그를 향해 다가오는 큰아버지와 그 뒤를 줄줄이 따르는 비서진을 흘깃 보곤 라운지에서 일어났다. 창 너머로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가 거대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가지란 얘기야, 내 말은. 이만 가봐야겠어. 도착하면 연락할게.”
-네, 선배.
“주혁아! 오래 기다렸냐? 가자. 지금 바로 병원 시찰을 진행할 모양이야.”
백부가 곧바로 다가오는 바람에 민예서의 인사를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통화가 종료되었다. 현지에서 가장 쟁쟁한 S 제약기업과의 1차 협의 단계가 순조롭게 진행됐는지, 한이석의 표정은 꽤 밝았다.
말레이시아 제약 산업은 샛별처럼 한창 부상 중인 시장이었다. 얼마 전 복지부가 공공의료 발전에 우선적으로 집중하겠다고 발표하고 이례적인 예산을 할당받은 이후로, 주변국과의 의약품 수출입 및 제휴 투자 역시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타진되고 있었다.
“최종단계까지 협의가 잘 마무리되면 우리가 독점계약을 체결할 수도 있겠어. AKFTA 협정 검토도 잘 끝냈고. 경쟁이 만만치 않았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이룬 두 가지 성과가 유리하게 작용한 것 같다.”
한 회장은 대기 중인 세단으로 향하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외부에선 과묵한 편인 그가 이렇게 들떠 있다는 건 확실히 좋은 징조였다. 주혁이 백부의 말을 받으며 그의 옆자리에 올랐다.
“스위스의 바이오 레메디움 인수 성과를 크게 본 모양이군요.”
“그래. 그리고 우리 측의 독보적인 데이터 보안 시스템도 큰 역할을 했다. 아무래도 제약기업 입장에서는 신약 개발 임상시험이나 연구 결과가 외부로 유출되는 걸 두려워하니까. 그건 순전히 네 공로다, 주혁아.”
한 회장이 흡족한 듯 소리 내서 웃었다. 다음 미팅 자리에서 그 보안 시스템을 프리젠테이션으로 어필하는 게 이번 출장 중 그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주혁은 그 결과에 자신이 있었다. 스스로 설계한 프로세스는 머릿속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그 알고리즘을 최대한 알아듣기 쉽게 풀어내고 납득시키는 건 너무도 쉬웠다.
그가 입을 열기만 해도 이목이 집중되는 건 아주 어릴 때부터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모두가 귀를 기울이고, 결국은 설득되는 게 정해진 수순이었다.
“이번 일만 잘돼도 우리가 국내 제약업계 톱3 반열에 들게 될 거다. 조만간 계열사도 확장해 SG바이오에서 SG생명과학으로 재편해야겠지.”
“톱3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주혁이 창 너머 마천루에 시선을 박고는 억양 없이 말했다.
“무조건 1위가 되어야죠.”
그가 가치를 두는 건 오로지 맨 위의 고지였다. 그 이하는 2위든, 3위든 다 똑같이 의미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