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하지만 친할머니에 대한 말은 결국 꺼내지 못했다. 저녁에 외조모가 온다고 해서 잠시 약국에 들렀을 때였다. 모친 이경은은 제조실 문을 닫고 그녀의 얼굴을 넌지시 살폈다.
“얼굴빛이 왜 그리 어두워? 오늘 출장 떠난다고 점심 같이한다 하지 않았어? 혹시 싸웠니?”
눈빛에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그 불순한 희망을 보는 순간, 서러움이 울컥 치밀었다.
“엄마.”
“뭐가 잘 안 맞았나 보네. 그러게, 너랑 그 애는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다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약혼은 없던 일로 하….”
“엄마, 정말 왜 그러세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길 가던 사람이라도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당신이 배 아파 낳은 친딸이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남자와 약혼까지 했는데, 대체 왜 헤어지길 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제가 왜 주혁 선배와 잘 안되길 바라시는 건지 진짜 이유를 알고 싶어요, 엄마.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한 번은 고민 끝에 두 딸의 엄마인 옛 상사에게 상의한 적도 있었다. 구청 대체 근무 당시, 그녀의 사수였던 주무관은 예서의 계약 기간이 끝난 후로도 가끔 안부를 물어왔고 얼마 전에는 단둘이 식사를 하기도 했다.
-음… 나도 엄마지만 그건 정말 어떤 마음이신지 잘 모르겠네. 집안도 좋고 아무 문제 없다며.
한주혁의 집안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을 피하고 대략적인 것들만 얘기했다. 주무관은 한참 고개를 갸웃하다가 결국 가장 그럴듯한 결론을 유추했다.
-집안이 너무 차이 나니까 결혼해도 예서 씨가 힘들 거라고 계속 강조하셨다며. 역시 그 이유 때문에 걱정하시는 게 아닐까? 아는 사람 딸이 딱 예서 씨 또래인데 그런 상황이라 무척 힘든 경우라든가.
예서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알기로는 모친의 주위에 그런 지인은 없었다. 무엇보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뭔가가 느껴졌다. 그녀만 모르고 모친만 알고 있는 무언가. 하지만 그 석연찮은 느낌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있긴 뭐가 있어? 한참 기우는 결혼이니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지!”
모친은 오히려 그녀가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언성을 높였다. 그때 문이 활짝 열리며 외조모 윤미실이 안으로 들어섰다. 문밖에서 모녀의 대화를 들었는지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뭔 일이고, 이게? 다 저녁에 왜 목소리를 높이고들 그러노, 밖에 손님 듣구로.”
“아니 난 저 걱정해서 그러는 걸, 지 엄마한테 눈 똑바로 뜨고 따지잖아요. 따지길!”
“예서야, 여기서 이카지 말고 집에 가서 밥 묵고 있어라. 나랑 느그 엄마는 일찌감치 먹고 왔다. 국이랑 찌개 끓여놨고, 니 가져가라고 냉장고에 반찬 몇 개 도시락 가방 넣어논 거 까묵지 말고.”
외조모는 갈 때 꼭 가져가라고 당부하며 손녀를 제조실 밖으로 살살 밀었다. 이대로 더 있어봤자 모녀간 감정만 더 나빠질 거라 염려하는 눈치였다.
“죄송해요, 할머니.”
예서는 순순히 제조실을 나섰다. 감정이 격앙되어 빨개진 제 얼굴이 건물 후문 유리창에 비쳐 보였다. 가슴이 답답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치기도 했다. 그래도 깝깝한 마음은 풀리지가 않았다.
일진이 사나운 날 같았다. 오후에는 선배, 저녁에는 모친. 밉든 곱든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가깝고 중요한 두 사람과 차례대로 어긋나 버린 기분이었다. 예서는 몰아치는 감정의 파란을 다스리며 건물을 나섰다.
아파트로 막 들어서려는 순간 제조실 책상에 놓고 온 휴대폰이 생각났다. 밥부터 먹고 가져올까 했지만 결국 약국으로 다시 향했다.
그 짧은 동안에도 선배로부터 연락이 올까 봐 걱정이 됐다. 한시라도 휴대폰을 몸에서 놓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
약국에 다시 돌아왔을 때 수민의 후임 직원은 동네 이웃 손님들과 수다 중이었다. 카운터를 지나 제조실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닫힌 문 너머로 외조모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니 아직도 그 연꽃 신당인가 뭔가 그 여자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기가. 민 서방 사고로 먼저 가삔 거, 그거 하나 맞췄다고.”
“그거 하나가 아니죠. 남편이 절명수가 있으니 조심해라, 갑자기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저인들 믿었겠어요? 어디서 무당 나부랭이가 헛소리야, 어이가 없어 화가 나서 나왔는데 결국 한 달 후 애들 아빠가 어떻게 됐어요? 우연치고는 너무 절묘하잖아요.”
“그렇다고 애들 앞날을 그 여자 말에 끼워 맞춘다는 게 말이 되나, 말이. 시상에, 예서 운기가 원체 쎄서 너무 잘 되삐면 정우가 역풍을 맞아가 푹 고꾸라지니께 예서 앞날을 어카든 눌러야 한다는 기 말이 되냐고.”
이게 무슨 소리지…?
예서는 문고리를 잡은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연꽃 신당은 그녀도 들어본 적 있었다. 모친이 옛날부터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철학관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로도 1년에 두 번은 꼭 찾아가는 듯했고, 정우의 유학이 결정되기까지 그 무속인과 자주 통화하는 눈치기도 했었다.
“그런 말 마세요. 지금까지 연꽃 선녀님 말대로 안 된 게 있었나요? 하나가 어떤 게 좀 처지면 다른 건 좀 낫고, 둘이 좀 적당히 균형이 맞아야 되는데 예서가 모든 면에서 정우보다 너무 앞서버려 정우를 결국 타지까지 보낸 거 아니냐고요.”
휴우, 이경은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더니 무겁게 한숨지었다.
“쌍둥이라 배 속에서부터 지 오빠 기운을 다 뺏어 먹는다더니 결국 우리 정우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잖아요. 연꽃 선녀님 말대로, 사내애가 가는 족족 기집애가 앞길을 막는다더니….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공부도 좀 적당히 시키고, 대학도 적당한 데 가라고 뭐든 튀지 않게 일부러 기죽이고 꾹꾹 눌러서 키웠는데도 저렇게 계속 튀어 올라서…. 결국은 정우가 그 기운과 멀어지게끔 멀리 보낸 거 아니냐구요.”
예서의 손이 스르르, 문고리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는 싸늘함이 전신을 에워싸고 있었다. 조금만 미동을 하면 그 한기에 통째로 삼켜질 것만 같았다.
“정우 애미 니 진짜 눈에 뭐 씌인 거 아니가. 아무리 니가 그런 거에 의지해서라도 정우 잘 되게끔 밀어주려는 맘은 알지만, 참말로 내는 이해가 안 된다카이. 그럼 아예 이 기회에 시집을 보내가 아예 남의 식구 맹글면 되는 거 아이가. 사위 자리도 번드르르하니 대한민국 최고 집안이라카믄 결혼을 마 반대할 이유가 뭐가 있겠노 이 말이다.”
“저도 당연히 그러고 싶어요. 김 약사 막내아들, 인하 정도만 돼도 하루라도 빨리 보내죠. 근데 올해 초 연꽃 선녀님이 그럽디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에 이어 모친이 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 집에 보내면 예서에게 아예 날개를 달아주는 형국이라잖아요. 재벌이 아니라 재벌 할애비라도 우리 정우에겐 득 될 거 하나 없고, 그나마 정우에게 남아 있던 운도 예서가 죄다 끌고 가버린다는데 뭐가 좋다고 찬성을 해요? 우리 정우, 저렇게 계속 제자리 못 찾고 엇나가다가 크게 잘못될 수도 있다잖아요.”
“뭔, 뭔! 어데 삽짓거리에서 개가 짖는 소리가 그보다는 덜 해괴하겄다! 미신 아이가!”
“아니에요! 연꽃 선녀님 말이, 쌍둥이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잡아먹는 척진 사주라서 예서가 잘될수록 정우는 반대로 더 못될 거라고 했는데 실제로도 그렇잖아요. 예서가 잘 될수록 우리 정우는 점점 더 되는 일이 없다니까요? 난들 예서가 못되기를 바라겠어요? 다만 적당히 딱 보통만 하기를 바랄 뿐이에요. 지 오빠 운 좀 잡아먹지 않게.”
“니 그 말을 진짜 믿나. 그래서 예서 그런 집 아랑 약혼한 거도 그케 반대하는기가. 참말로. 니 약대까지 나와가 약사님, 약사님 소리 듣는 배운 사람 맞나.”
퍽, 퍽, 가슴 치는 소리에 이어 외조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우 글마가 어릴 때부터 비실비실 매가리도 없고 영 끈기도 없어서 책상머리에 붙어 있질 못해가 대학도 내동 떨어지고 그, 뭐꼬, 툭하면 게임인지 뭔지 하고 앉았던 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니 때문이다. 정우 애미야. 그칸데 이제 와서 와 애먼 예서 탓을 하고 자빠졌노, 자빠지길. 그 연꽃 신당인지 개 잡꽃 신당인지 가서 확 불이라도 질러 삐기 전에 그 노망난 할마씨랑 끊으라!”
“엄마도 그동안 정우만 어째 저리 되는 일이 없냐고 짠해하고 예서보다 더 신경 쓰고 그러셨으면서, 뭘 그러세요? 내가 언제 예서 잘못되길 바란 것도 아니고. 딸도 내 자식인데 내가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을 리가 있겠냐구요.”
“아, 그거랑 미신 잡꺼리를 신봉하는 기 같나! 시상에, 똑똑한 사짜 배운 사람들이 사이비에 더 빠져든다 카더이 그게 바로 여깄었다, 여기! 하이고, 깝깝해서 내가 목이 다 탄다!”
외조모가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의자를 뒤로 확 끄는 소리가 났다. 예서는 본능적으로 제조실과 화장실 사이 구석으로 물러났다. 전신이 석상처럼 굳은 중에도 몸이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엄마, 같이 가요. 손님도 없는데 미스 김에게 맡겨놓고 그냥 들어가야겠어요. 아 참, 아까 반찬 해뒀다더니 정우 보내줄 마른반찬도 있어요? 우리 정우, 여름에도 집에 오질 못하고 불쌍해서 어째….”
카운터 쪽으로 멀어지는 모친의 목소리가 아주 낯설게 들렸다. 예서는 구석에 한참 서 있다가 아무도 없는 제조실로 들어섰다. 놓고 간 휴대폰을 손에 쥐고 후문을 통해 나가는 동안, 뇌가 텅텅 비어버린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방금 뭘 들었지? 대체 무슨 말을… 무슨 소리를….
뇌가 하얗게 바랜 와중에도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모친과 외조모가 가고 있을 아파트 방향이 아닌, 대로변의 버스 정류장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모친이었다. 예서는 길 한가운데 오도카니 서서 밝게 빛나는 화면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받지 않자 이번에는 문자가 날아왔다.
[밥 안 먹고 그냥 집에 간 거야? 할머니가 반찬 싸두신 것도 안 가져갔네.]
예서는 잠자코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넣고는 막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다. 낯익은 거리의 풍경이 갑자기 생경해 보였다. 지금까지 그녀가 몸담아왔던 세상이 순식간에 허상이자 가상의 세계였던 것처럼 시야가 멍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뒤늦은 깨달음이 백지처럼 공허한 머릿속을 채워왔다. 이제야 모든 게 납득이 되었다.
모친이 왜 어릴 적부터, 특히 아빠가 돌아가신 뒤부터 유독 정우를 더 편애하기 시작했는지. 그녀를 향한 이해할 수 없는 언행들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