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65)화 (66/124)

<65화>

선배. 선배가 원래 소설도 안 읽고 관심이 없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응원 한마디만 해 주면 안 돼요?

그는 뭐든 척척 잘 해내서일까. 잘 될 거야. 이번에는 꼭 좋은 소식이 있을 테니까 힘내- 그렇게 한마디만 해 준다면, 그럼 정말로 그렇게 될 것처럼 든든할 것 같았다.

한주혁은 정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연인이자 약혼자였다. 물론 지금에 이르기까지, 굴곡도 적지 않았다. 좋아하지만 갖기는 싫다고 밀어내면서, 다른 남자에게 가는 건 또 원하지 않는다던 교제 전부터 시작해,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떠나기 며칠 전에나 입영과 유학을 알려줬을 뿐 아니라 그녀가 참다 참다 문제를 제기할 때면 만약 헤어지고 싶다면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 누구든 어느 한 명이 원하면 깔끔하게 놓아주자는 말로 상처를 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제일 힘든 순간, 그는 모든 일을 다 제치고 달려와서 곁에 있어 주었다. 연애보다 일이 우선순위일 때가 많을 거라던 처음 말과는 달리. 정우 때문에 소설 파일을 영원히 날릴 뻔했을 때는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직전, 공항에서 되돌아오기도 했다.

이제는 시간도, 돈도,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다. 그녀가 극구 마다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독립할 집과 생활비도 아낌없이 퍼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단지 응원 한마디뿐인데도, 그걸 해달라고 요구하기가 너무도 어려웠다. 다른 건 물심양면 아끼지 않는 그인데, 어째서 그녀의 유일한 꿈이자 최종 목표인 일에 대해서만은 언급 자체를 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

시간이 흘러 여름도 끝물에 다다라 있었다.

한주혁이 돌아온 이상, 공모전 외에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갈 줄 알았다. 그는 9월에 본부장 승진이 예정되어 있었고 그의 백부와 백모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녀를 예비 조카며느리처럼 대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모친 이경은의 정식 허락과 공모전, 둘뿐이었다. 여름이 지나고 9월 추석 직후 상견례를 하기로 한 만큼, 여전히 결혼이 마뜩잖아 보이는 모친도 결국은 마음을 돌릴 거라 믿었다.

더 큰 문제는 한창 진행 중인 공모전이었다. 그에 대해서만은 자신이 오롯이 감당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주위의 전폭적인 지원과 응원이 있다고 해도, 결국 성패는 제 몫인 까닭이었다.

“선배. 지금 뭐라고….”

그래서 굳이 응원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한마디 격려도 없고 이렇다 할 관심이 없는 게 서운하긴 했지만, 한 번도 드러내놓고 내색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상황은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소설에 너무 전념하지 말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 그렇게 힘들게 올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야. 만약 이번 공모전에도….”

그가 잠깐 틈을 두고 말을 이었다. 조심스럽지만 역시 할 말은 해야겠다는 얼굴이었다.

“만에 하나, 이번 공모전에도 낙선하면 더더욱. 솔직히 이번에도 안 되면 그때는 냉정하게 현실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고 봐. 좋아하고 열정이 있는 것과 진짜 잘 할 수 있는 적성이 늘 일치하는 건 아니니까.”

예서는 정말로 할 말을 잃었다. 그 나름대로는 최대한 돌려서 말하고 있었지만, 결국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창작은 노력만으로 안 되는 영역이야. 아무리 하고 싶대도 재능이 없으면 그만두는 게 현실적으로 맞아.

반박할 수 없는, 옳은 말이었지만 충격은 별개의 문제였다. 예서의 낯빛이 굳어지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쓰지 말라는 게 아니라 취미로 가볍게 쓰란 얘기야. 몇 년 안에 내가 도와줄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고.”

“선배가 도와줄 기회라니 무슨… 말이에요?”

“회사 모바일 전략기획팀에서 슈퍼 IP 부문 집중 투자와 업체 인수를 검토 중이야. 궁극적으로 스트리밍 서비스용 엔터테인먼트 계열사 구축에 관심이 있는 것 같고. 내가 소속된 사업부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지만.”

구심점은 여전히 제약과 화학 쪽에 두더라도, SG도 대세에 맞춰 디지털 콘텐츠 사업에 발을 담글 준비 중이었다. 예서는 그제야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것 같았다.

“선배. 그건… 저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이며, 그 뒤에 복잡하게 얽혀 있을 이해관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그가 어떤 식으로든 그녀를 돕고자 한다면, 일단 작품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까지는 가능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물론 선배네 회사니까 당연히 잘 되길 바라고,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당연히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게 노력하겠지만 그건 완전히 다른….”

“다를 거 없어. 지금 너도 그렇게 말했잖아. 회사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당연히 나설 거라고. 나도 똑같은 마음이야.”

“선배.”

물론 수면 위로 수월하게 올라갈 순 있을 것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행운이랄 수 있었다.

하지만 수면 아래로 다시 거꾸러지든, 제대로 비상하든, 궁극적인 결과는 오롯이 그녀에게 달려 있다. 대중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기에, 능력이든 재능이든 그럴 수밖에 없는 바닥이었다.

“저는 그런 편법을 쓸 생각… 없어요. 결국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인 거, 선배도 잘 알잖아요.”

“네가 편법이라 칭하는 건 현실적으로 늘 통용되는 일상이야. 물론 그게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업상 관계도 그렇고 세상 어떤 분야든 다 그래. 오로지 재능과 실력만으로 평가되고 결정되는 일은 어디에도 없어. 때로는 업계 정치나 이해관계가 더 크게 좌우되니까.”

“선배. 선배의 의도는 잘 알겠어요.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요. 그렇지만… 공모전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까….”

예서는 테이블 아래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왜일까. 아늑하고 로맨틱했던 레스토랑 프라이빗 룸의 공기가 순식간에 불편하게 느껴졌다. 한낮의 햇살이 테라스 창가를 촘촘하게 둘러싼 나뭇가지 사이 눈부시게 내리쬐는데도, 한기가 몸 깊숙이 엄습하는 듯했다.

“그러니까 결과 나올 때까지는 일단… 지켜봐 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응원 한마디라도 해 주면 안 될까요? 아무리 사탕발림, 그저 형식적인 격려일 뿐이라도. 이번엔 잘 될 거야.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믿어. 그런 단 한 마디라도.

“그래. 결과 나오면 다시 얘기해. 나는 네가 어떤 상황에서든, 무엇 때문이든 힘들지 않기를 바라. 단지 그것뿐이야.”

“네. 선배…. 알아요. 고마워요.”

예서는 애써 웃어 보였다. 식사가 끝나고 한주혁은 곧바로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며칠 해외 출장이 잡혀있어 출국 직전 호텔에서 함께 한 하룻밤, 그리고 아침 겸 점심 식사였다. 예서는 그를 호텔 앞에서 배웅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남산 주변 길은 한적하고 아름다웠지만 발걸음은 그다지 가볍지 않았다. 산책하듯 여유롭게 거니는 걸음이라기보다 갈 길 잃고 헤매는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잠시 후 예서는 버스 정류장 벤치에 힘없이 걸터앉았다. 새 구두에 적응하지 못한 한쪽 발뒤꿈치가 조금 까져 있었다. 한주혁이 어제 호텔 아케이드에서 사 온 수백만 원짜리 펌프스는 먼지가 묻어도 반짝반짝 윤기가 흘렀다. 하지만 발에 꼭 맞지는 않아서 조금 아팠다.

가방 안에는 한주혁이 오래전에 준 카드가 있었다. 어쩌다 보니 카드꽂이에 늘 끼워져 있을 뿐 한 번도 밖으로 나온 적은 없었다. 뭐든 사고, 무엇에든 쓰라고 늘 당부했지만 그럴 일이 없었다.

만약 원한다면, 그 카드로 집까지 공주처럼 모셔다 줄 리무진 택시를 부를 수도 있으리라. 다시 호텔로 되돌아가 그와 묵었던 가장 비싼 객실에 며칠 더 체크인을 하고, 룸서비스로 고가의 와인과 식사며 스파 마사지 등, 돈으로 가능한 모든 호사를 누릴 수도 있다.

한주혁은 잘했다고 기뻐하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라고 격려할 것이다.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정말로 받고 싶고, 듣고 싶은 격려는 그의 돈을 펑펑 쓰는 데 있지 않았다.

-나는 네가 소설 쓰는 일에 너무 전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이유도, 그의 진심도 모두 머리로는 잘 이해했다. 하지만 심장이 계속 가라앉고 있었다. 자꾸만 아래로 침잠하는 이 마음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만하자. 무슨 말을 해도 복에 겨워 투정 부리는 소리로 들릴 거야.

제 귀에도 그렇게 들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가장 큰 응원과 격려를 받고 싶은 제 약혼자였다. 그러나 그 한 가지 외에는 너무나 자상하고 좋은 연인이기도 했다. 더 바랄 수 없을 만큼. 그래서 여기서 더 바라는 건 너무 철없는 욕심 같았다.

하지만 공모전에서 입상이라도 하면 그 역시 달리 생각하게 될 터였다. 조금이나마 재능이 있다고 입증된 것일 테니 선배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그때는 비로소 진심으로 응원해 줄 것 같았다. 반드시 그럴 거라 믿었다.

“그래, 그러니까 나만 잘하면 돼. 이번에야말로 정말 최선을 다했으니까 잘 될 거야. 팀장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버스에 타서 착석하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국제전화 번호는 미국의 민자영이었다. 예서는 지체 않고 바로 통화에 응했다. 그러고 보니 경현이 군 입대 때문에 가을쯤 들어올 거라 했었지.

“고모. 예서예요.”

-그래. 잠깐 통화 괜찮아? 다른 게 아니라….

민자영의 목소리는 수심에 잠겨 있었다. 아무래도 저번에 언급했던 할머니 문제인 것 같았다.

-니들 할머니가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아. 경현이 방학도 시작했으니까 일찌감치 먼저 한국 시댁에 보낼까 해. 아무래도 다음 주에 가지 싶은데 고모부랑 나도 급한 일 처리해두고 2주 뒤에는 건너갈 생각이란다.

“네, 고모. 그럼 경현이 오면 같이 요양원에 가볼게요.”

-괜찮겠어? 너 무슨, 그 공모전인가 하느라 바쁘잖니.

“노트북 가져가면 되니까 괜찮아요. 그보다… 이제는 엄마께도 한 번 운을 떼볼게요. 할머니 상태가 워낙 안 좋으시니까 엄마도 이제는 아셔야 할 테니까요.

고모와 통화를 마치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고모 가족과 달리 할머니와 관련된 좋은 기억은 없었다. 할머니는 지금의 엄마처럼 늘 정우를 금지옥엽처럼 대했고, 엄마보다 더 당당하고 노골적으로 그를 편애했었다.

-가시나가 공부 잘 해봐야 뭐 소용 있노. 어차피 시집가서 냄의 식구 될 낀데.

-예서 니 지금 니 오빠야한테 뭐라캤노? 아무리 한 날 같이 나왔어도 니, 오빠는 오빤데 가쓰나가 어데 오빠한테 대들고 까부노, 까불길!

그래서 솔직히 조모의 상태에 깊은 슬픔은 없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오늘내일하시는 혈육이니 가보는 게 도리처럼 느껴졌다. 모친도 이 정도로 오랜 세월 단절했으면 이제는 어느 정도 마음이 풀리지 않았을까.

정우는 여름 보충 학기 수업을 들을 예정이라 귀국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모친이 동의한다면 경현까지 셋이 창원에 내려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