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하지 마! 석우 씨한테 그러지 마…!
류혜수는 형부인 그의 아버지를 보호하듯 꼭 끌어안고, 제 친언니와 대치하고 있었다. 모친 류혜정의 손에는 뭔가가 들려 있었다. 너무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날붙이 특유의 빛이 번뜩였다.
엄마, 안 돼. 하지 마.
심장이 쿵, 쿵, 세차게 뛰었다. 귀가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힘이 발목을 붙잡아 바닥에 꽉 눌러대는 것 같았다. 가뜩이나 성장이 더디고 몸이 약한 몸뚱이가 그대로 굳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여보!
아버지의 고함이 귀를 웅웅 울렸다. 발을 구르고 옷자락이 스치는 격렬한 몸싸움이 짧은 순간 고막을 찢을 듯 거칠게 일어났다.
아악!
찢어지는 비명에 양쪽 귀를 꽉 틀어막았다. 피에 물든 소음이었다.
혼절 직전, 방 안 어디선가 환한 빛이 확 켜졌다가 다시 꺼졌다. 스탠드 등의 마지막 발악 같았다. 그대로 정신을 잃고 다시 깨어났을 때 상황은 모두 끝나 있었다.
SG그룹의 장남 부부는 양평 별장에서 모처럼 가족 간의 휴가를 보내던 중, 한밤중에 강도의 침입을 받아 나란히 목숨을 잃는 참극을 맞게 되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부부의 외아들은 무사했지만 극심한 정신적 충격으로 극비리에 요양 중이었다. 그게 대외적으로 알려진 집안사였다.
사건의 실제 진상은 그의 친가와 외가의 극소수만이 알았고, 그들 모두 이 사건을 덮기로 합의했다. 정신과 진료를 받고 있던 남편이 부부싸움 중 이성을 잃고 아내를 흉기로 찌른 뒤, 곧바로 제 목숨도 끊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길 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 진상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진실을 아는 사람은 단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년 후, 계곡에서 조난을 당하기 전만 해도 그의 기억은 사장되어 있었다. 발을 헛디뎌 떨어지기 직전 어느 여자아이의 손에 잡혀 대롱대롱 매달려 있기 전까지만 해도.
무의식이 일부러 꼭꼭 묻어둔 기억은 아주 사소한 계기로도 갑자기 떠 오른다 했던가. 제 손을 꼭 붙들고 버티던 구원자는 어린이 재단 로고가 새겨진 단체복을 입고 있었다. 그 병아리처럼 노란 옷, 가슴팍에 매달려 흔들거리던 금빛 단추는 어머니가 밤마다 잠옷 위에 걸쳤던 카디건의 진짜 금장식을 연상시켰다.
조금만 더 빨리 어른들이 올라와 아이들을 구조했다면. 몇 분만 더 일찍 그 아이와 떨어졌다면 수면 아래 기억은 그대로 잠들게 됐을지도.
만약 그랬다면 어른들조차 모르고 있던 그날 밤의 진실, 그 더럽고 추한 진상은 영원히 묻혔을까.
***
주혁은 새벽 3시에 깨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민예서로부터 출근한다는 톡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문자창에 손가락을 댔다가 떼어내길 반복하다 결국 단말기를 내려놓았다.
밀고 당기는 갑을 게임 때문은 아니었다. 휘둘리지 않기 위해 버티고, 자제하고, 역으로 휘두르며 조종하고자 하는 단계는 이미 지나 있었다.
-우리, 약혼하자. 예서야.
제 입에서 먼저 약혼이란 단어가 튀어나온 순간부터 줄다리기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진 게임이었지만 더는 상관없었다. 기꺼이 즐겁게 패배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난관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마지막 시험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미친 새끼.
스스로가 미친놈이란 걸 잘 알았다. 개새끼. 아니, 개만도 못한 새끼였다. 하지만 민예서를 온전히 장악하고 싶은 염원이 이성보다 더 강했다. 조용히, 격렬하게 날뛰는 광기는 그러다 그녀를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의 위에 있었다.
결국 그 좆같은 유전자를 이기지 못한 건가.
그 분야 최고의 정신과 전문의도, 임상 3상까지 마치고 상용화를 앞둔 최신 신경정신과 약도 제 광증을 누르지 못했던 모양이다.
피식, 씁쓸한 실소가 흘러나왔다. 어릴 적 길었던 요양과 꾸준히 지속한 정신과 치료, 잠잠했었던 10대를 지나 20대부터 시작된 사촌 형과의 상담 치료도 결국 무용지물로 끝나고 말았다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민예서만 오롯이 가질 수 있다면. 그녀만 제 방식대로, 온전히 손안에 들어오면 다른 건 어떻게 되든 좋을 것 같았다.
***
그날 저녁, 모친이 보인 반응은 예서의 예상과는 좀 달랐다. 한주혁이 미국으로 가기 직전 집안 어르신들과 식사 자리도 한 번 가졌고 약혼도 찬성하셨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부터, 이경은의 눈빛이 달라졌다.
“뭐? 이미 만나 뵌 거야?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깜짝 놀라긴 했지만 결코 달가워 보이진 않았다. 차라리 속물처럼 드러내놓고 뭔가를 바라며 기뻐하는 눈치였다면 마음이 편했을까. 반가움은커녕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중에 선배가 귀국하면 말하려고 했어요. 아직 선배 할아버지도 못 뵈었고, 일단 선배가 할 일을 다 마쳐야 본격적으로 진행이 되니까…. 선배도 그렇지만, 선배 백부님과 백모님도 신중하신 성격이신 것 같았어요.”
“글쎄. 내가 볼 땐 그 집에서 일부러 시간을 끄는 것 같은데. 2년이나 떨어져 있는데 그동안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이런 생각하시는 거 아니겠냐고.”
이경은의 어조는 눈빛만큼이나 싸늘했다.
“예서야. 너, 내가 엄마로서 다시 말하는데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너도 냉정하게 생각해 봐. 막말로 단둘이 한 약혼이 무슨 약혼이야? 내일이라도 헤어지면 아무 의미 없는 거지.”
“엄마. 사실은 선배가 반지도….”
대화를 하면 할수록 자꾸 가슴이 답답했다. 약혼반지에 대해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모친이 좀 더 빨랐다.
“잘 생각해 봐. 너 저번에 내가 정우 취직 때문에 인하랑 엮으려고 했다고 얼마나 열을 내고 정색했어? 한밤중에 집까지 뛰쳐나간 거 기억 안 나? 그 집은 인하네보다 훨씬 더 대단한 집안이잖아. 재벌 아니냐고, 재벌.”
“…….”
“그럼 오히려 엄마가 더 기뻐하면서 그 남자 꼭 잡으라고 신신당부하고 그래야 하지 않아? 정우 취직에다 이것저것 떨어질 콩고물만 해도 어디 인하네랑 비교가 되는 집안이냐구. 그런데도 엄마가 왜 이렇게 말리겠니?”
“엄마. 엄마가 뭘 걱정하시는 건지는 알겠지만 저랑 선배는….”
“그래, 지금이야 내 말은 귀에 들리지도 않겠지. 일단 이렇게 떨어져 있는 동안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다른 가능성도 염두에 두란 얘기야. 설령 결혼까지 간다고 해도 친정이 너무 기울면 사는 내내 네가 기죽고 힘들 수 있어.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대한민국에서 그런 건 절대 안 변해.”
“…….”
“물론 끝까지 결혼해서 무탈하게 잘 살면야 그것만큼 엄마가 바라는 게 어디 있겠니.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란 얘기지. 네 미래랑 진로도… 아 참, 그러고 보니 8월에 대체 근무 끝나잖아. 그땐 제대로 취직자리 알아볼 거지?”
“그게, 실은….”
예서는 소설에 대해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공모전에 보기 좋게 또 떨어져 놓고는 여전히 포기를 못 하냐는 핀잔이 날아올 게 뻔했다.
“네.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보다 이거….”
모친이 더 뭐라 말을 꺼내기 전에 재빨리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주방 탁자에 올렸다.
“적금 든 거 만료돼서 이자만 빼 왔어요. 조금이지만 정우 용돈에 보태시라고요….”
얼마 전 민정우가 다시 국제전화로 돈 얘기를 꺼냈을 때 확실히 못을 박았다.
-이제 더는 안 돼. 정 용돈이 부족하면 엄마한테 말씀드리면 되잖아.
그렇게 일침을 가하고도 마음이 약해져서 내내 신경이 쓰였다. 며칠 고심하다 결국 모친에게 직접 주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나마 민정우가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인근 4년제로 간신히 편입에 성공하여 다행이었다. 이번에도 패스하지 못했다면 집안 분위기는 외할머니 생신이고 뭐고, 완전히 무덤 같았을 것이다.
“어머, 세상에. 네가 웬일이니! 이렇게 오빠 생각도 다 하고…. 너도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이제야 철이 드나 보다. 응?”
모친은 흐뭇함에 활짝 웃음 지었다. 예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서서 욕실로 향했다. 이제야 철이 들은 것 같다는 모친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대학 4년 내내 학비는 장학금으로, 용돈은 스스로 벌어서 자급자족했지만 그녀에겐 부질없고 의미 없는 거였나. 단 한 번, 당신의 아들을 위해 내민 돈 얼마가 모친에겐 훨씬 가치 있고 철든 행위인 모양이었다.
“어디 보자. …30만 원이네? 아유, 이걸 누구 코에 붙이니. 그래도 없는 것보단 훨씬 낫지.”
욕실 문을 닫기 직전 모친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동안 정우가 그녀에게서 따로 가져간 돈만 수백만 원인데.
나쁘게 생각 말자. 그래도 엄마는 나도 나름대로 걱정해 주시니까….
예서는 손을 씻으며 찜찜한 마음을 씻어내리려 애썼다.
당신의 말마따나, 모친이 정말 정우만 생각하고 그녀는 걱정하지 않았다면. 그럼 정우에게 미칠 수 있는 여러 이점들을 먼저 고려해, 반대로 선배와의 교제를 적극 부추기지 않았을까.
하지만 모친은 그 문제에 있어서만은 오롯이 그녀만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것만은 진심인 것 같았다.
***
다시 돌아온 초여름, 6월 중순의 공항은 어딜 봐도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예서는 입국장 인파에 뒤섞여 내심 초조해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연착되어 벌써 세 시간째 기다리던 중이었다.
마침내 입국장 문 너머 낯익은 얼굴이 보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예서는 단숨에 달려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1년 반, 정확히는 17개월 만의 해후였다.
“선배…!”
“잘 지냈지?”
그윽한 저음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그리워했던 그만의 체취와 온기가 전신을 통째로 삼켜버릴 것 같았다. 예서는 그의 너른 가슴팍에 강아지처럼 매달려 숨을 후욱, 크게 들이쉬었다.
“너무 보고 싶었어요….”
“예서야. 잠깐만.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일단 여기서 나가자.”
하지만 놓아주긴커녕 되려 팔에 힘을 주었다. 그와 조금이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한주혁이 그녀의 목을 감싸 안으며 웃었다.
“화상통화도 많이 했잖아, 우리.”
“그래도 직접 보는 건 1년 반 만이니까….”
“예서야.”
그의 저음이 한 톤 더 낮아졌다. 은밀한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잠깐의 틈 뒤에 속삭임이 이어졌다.
“나가자. 키스하고 싶어서 돌아버리겠는데… 여기선 안 되잖아.”
그제야 민예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