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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62)화 (63/124)

<62화>

그의 목을 끌어안고 다시 잠들기 직전, 한주혁이 계속 속삭였지만 뭐라고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질 않았다.

예서야.

그리고 또 어떤 말을 했었지.

그냥 미국에 가자, 같이. 역시 맘이 놓이지 않아. 너 혼자 두고 못 가겠어.

그런 말을 되풀이했던 것 같았다.

“선배….”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제 자취방의 침대 위에 홀로 있었다. 꿈에서 완전히 깨어나 몸을 일으키기까진 한참이 더 걸렸다. 실제였던 꿈이라서일까, 방금 전까지 정말로 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았다.

예서는 아쉬운 착각을 떨치고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의 커튼을 걷었다. 6시가 채 되지 않은 하늘은 이미 해가 쨍했다.

그녀는 서둘러 침대를 가지런히 정돈하고 욕실로 들어가기 전 커피부터 내렸다. 항상 일찍 일어나는 덕분에 출근 준비는 늘 여유로웠다.

[선배, 지금 출근해요. 저녁 맛있게 먹고 잘 자요!]

미국의 한주혁에게 메시지를 보내놓고 출근 준비를 마쳤다. 답문은 늘 한참 만에 느지막이 왔기에 미리부터 문자를 기다리진 않았다.

자취방을 나서기 직전, 서랍을 열어 약혼반지에 눈도장을 찍는 의식도 잊지 않았다. 벨벳 케이스 안에 자리한 로즈골드 다이아몬드는 영롱한 핑크빛을 머금고 있었다.

오늘은 어쩐지 손에도 끼어보고 싶었다. 예서는 반지를 약지에 살며시 끼어보곤 다시 케이스에 넣었다. 매일 끼고 다니고 싶었지만 너무 눈에 띄는 데다 지나치게 고가의 보석이라 그럴 순 없었다. 한주혁이 끝까지 알려주지 않아, 수민을 통해 가격을 알게 됐을 때 경악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이른 목요일 아침, 한산한 거리 가득 6월의 공기가 만연해 있었다. 어느덧 해가 바뀌어 날은 봄과 여름의 경계에 이르러 있었다.

요 며칠 감정의 기복이 유독 널을 뛰었던 탓일까. 신호등 옆, 차체에 비친 제 얼굴이 왠지 낯설어 보였다. 평소보다 더 생생했던 꿈에 홀로 얼굴이 붉어진 까닭이었다. 그때 반대쪽에서 걸어오는 단골 카페의 주인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머, 예서 씨. 벌써 출근해요? 하여간 정말 부지런하다니까.”

“안녕하세요, 사장님?”

“구청 근무도 이제 두 달하고 좀 더 남았네. 그렇죠? 그 후엔 어디로 가요?”

“아직 정해진 건 없어요. 아마 조금 쉬었다가 다시….”

“좀 쉬었다가 다시 구직활동하려나 보네요. 그래요. 잠깐 푹 쉬고 재충전했다가 열심히 일하는 것도 좋지.”

짧은 대화를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카페 사장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8월 중순, 대체 근무가 끝나고 나면 연말까진 글에만 매진할 생각이었다.

지난 5월 공모전은 다시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한 출판사에서 그녀의 작품을 눈여겨보곤 뜻밖의 제안을 해 온 바 있었다. 최근 디지털 콘텐츠 사업을 확장하며 웹소설과 웹툰 IP를 중심으로 엔터테인먼트 사업까지 발을 넓히고 있는 중견 출판사였다.

-정통 판타지가 아닌 현대 판타지를 써 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작가님께서 이번에 공모전에 연재하셨던 정통 판타지도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었어요. 다만… 장르 자체가 요즘 국내 시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어렵다고 해야 할까요.

미팅에서 B 출판사 엔터테인먼트 사업본부 웹소설 부서 기획팀장이라 자신을 소개한 여자는 추후 영상화까지 가능할 만한 콘텐츠가 공모전에서 입상할 기회가 훨씬 많다고, 최근의 장르 소설 흐름에 대해 상세히 말해 주었다. 어떤 모임에도 소속되지 않고 혼자 글만 써 왔던 그녀로서는 매우 유용한 정보와 팁들이었다.

-만약 이야기 전개나 장르 자체에 대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힘닿는 데까지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김 팀장은 명함을 꺼내서 건넸다. 예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명함을 받아 들었다. 그녀의 친절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공모전에 현대 판타지로 입상한다 해도, 공모전을 주최한 측과 출간계약을 하게 되니 B 출판사엔 아무런 이득도 없을 터였다. 그녀의 속을 읽었는지 김 팀장은 거침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만약 공모전에서 입상하게 되시면 그다음 차기작을 저희와 계약해 주셨으면 해서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만에 하나 입상을 못 하게 될 경우에도 저희와 해 주시길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저희와 현대 판타지 작품을 계약하시게 될 경우, 만약 작가님께서 원하신다면 이번에 낙선한 서양풍 판타지 작품도 함께 계약하고 싶습니다.

구두 약속일 뿐 어디에도 강제성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집필 중 정말로 연락해서 뭔가 도움을 받게 된다면 도의상 다른 출판사와 손을 잡긴 어려울 터였다. 김 팀장은 그만큼 그녀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크게 봤다고 덧붙이며 미팅을 마무리했다.

다시 낙선한 상심을 접고, 결국 그 조언을 받아들여 현대 판타지물을 구상한 지 고작 일주일째였다. 하지만 막상 쓰기 시작하니 정통 판타지를 쓸 때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다. 전개도 막히는 법 없이 술술 잘 진행되어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쩌면 그 기획팀장의 안목이 정확했는지도 몰라.

문제는 다시 1년을 집필에 투자하는 데 대한 주위의 시선이었다. 모친은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금전적인 지원을 해 주는 입장이 아니다 보니 강한 반대는 하지 못했다. 사실 모친보다는 한주혁의 반응이 좀 더 마음에 걸렸다.

-장르를 바꿔서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고?

-네, 선배.

얼마 전 미국에 있는 그와 통화했을 때였다. 출판사 팀장과의 미팅에 대해 들려줬을 때, 그는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불쑥 말했다.

-그래서, 내년 공모전을 다시 준비하겠다는 거구나.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다시 입을 열기까지의 간격도 미묘하게 길어서 어딘가 석연찮았다.

-네, 선배. 그래서 8월에 대체 근무 끝나면 12월까진 글에만 집중하려고 해요. 일단 그 팀장님의 조언대로 현판으로 한 번만 더 도전해 보려고요.

이번에도 잠시 틈이 생겼다. 예서가 뭐라 더 말하기 전에 그가 답했다.

-그럼 그동안 내 카드로 생활해. 전에 준 거 전혀 안 쓰고 있잖아.

-아니에요, 선배. 그동안 저축해 둔 거 있어요.

얼마 전까지는 민정우가 자꾸 손을 벌리는 바람에 다소 빠듯했지만, 12월까지 잘 아끼면 버틸 수 있을 듯했다.

-어차피 결혼할 사인데 상관없잖아. 돈 걱정 하지 말고 편하게 지내.

-알았어요. 돈 떨어지면 그때는 진짜 쓸게요.

그렇게 무마시킨 뒤 통화를 끊었을 때는 묘한 서운함이 밀려왔다. 솔직히 돈보다 격려 한 마디를 기대했는데.

이번에는 꼭 잘 될 거야. 힘내. 그런 단순한 말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한주혁은 평소 그런 응원을 해 주는 스타일이 아니긴 했다. 틀에 박힌 응원은 더더욱.

그러고 보니 확실한 응원 군단은 따로 있었다. 졸업 후 바빠서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꾸준히 연락하는 채린과, 새은, 수민 언니, 그리고 LA의 고모네 가족이 그랬다. 특히 판타지를 즐겨 읽는다는 사촌 동생 경현은 더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필명을 아는 사람은 한주혁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은 쑥스럽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기도 했지만, 성별 미상이 좋다는 일반적인 업계의 정설 때문이었다. 공모전이 시작되면 친구들에게도 필명을 알려줄 생각이었다.

대로를 건너 기간제 사무직으로 일하는 구청에 다다랐을 때였다. 휴대폰에서 벨이 울렸다. 혹시 선배?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발신자에 뜬 사람은 모친이었다.

“네, 엄마. 지금 출근 중이에요.”

-어. 다른 게 아니라 주말에 집에 오라고. 외할머니 생신이라 시골에서 올라오시니까 너도 와 있어야지. 좀 거들어주고.

“네, 그렇지 않아도 주말엔 가 보려고 했어요.”

-그래. 별일 없지? 그리고 외할머니 오시기 전에 그 얘기도 좀 다시 하고 싶으니까…. 네가 만난다는 SG그룹 아들 말이야. 이왕이면 내일 오렴. 금요일이잖아.

예서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하지만 곧 침착을 되찾고 차분하게 말했다.

“네… 알았어요. 내일 퇴근하고 바로 갈게요.”

구청에 들어서서 사람들과 밝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아서도 무거운 마음은 쉬이 가라앉질 않았다. 엄마는 그녀와 한주혁과의 관계를 썩 내켜 하지 않았다.

-예서야. 내가 너 상처받으라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집안에서 정말 널 반기겠니? 냉정하게 말해서… 가능성이 없다면 그런 만남은 최대한 일찍 접는 게 현명해.

모친이 부정적인 생각부터 하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 그녀도 다른 사람 일이었다면 현실적인 회의감부터 들었을지도.

-엄마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집안 차이가 그렇게 나는데 결혼이 가능하겠냐고. 아무리 모든 연애가 결혼을 전제로 하는 건 아니라지만 어차피 헤어질 게 뻔한 교제는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다 엄마로서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고깝게 듣진 말고. 차라리 정우면 남자니까 그러려니 하겠지만 넌 여자잖니. 응? 나중에 흠으로 남을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내일 저녁, 둘만의 약혼에 대해서도 실토할 생각이었다. 그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시간이 너무 촉박해 양가 상견례나 인사는 아직 하지 못했지만 한주혁의 집안에서는 이미 그녀를 받아들였다고. 둘 사이가 단순한 교제 이상이란 사실을 밝히는 게 아무래도 좋을 듯했다.

그럼 엄마도 더는 걱정하지 않으시겠지. 그 정도로 확실한 관계인 걸 알면 그때는….

***

쨍강, 뭔가 깨지는 소리에 이어 누군가의 악다구니가 들렸다.

-엄마…?

잠이 덜 깬 눈두덩을 비비며 부모님의 침실로 향했다. 불길한 마음에 심장이 쿵, 쿵 뛰었다. 살짝 열린 방문 앞에는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모 류혜수였다.

-이….

이모의 등에 손이 닿기 직전, 방 안쪽에서 다시 소음이 울려 퍼졌다. 다음 몇 초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판단할 새도 없었다.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새 일어났다.

부서지는 굉음과 함께, 천장 샹들리에가 깨지며 방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구석의 스탠드 등만이 고장 난 손전등처럼 깜빡대길 반복하고 있었다.

-안 돼!

그 순간 류혜수가 안으로 뛰어들어 누군가의 몸을 감쌌다. 처음에는 그녀가 아버지 한석우를 가로막고 엄마 류혜정을 끌어안은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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