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그래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뭐. 내가 회장도 아닌데.”
“그럼 SG에 들어간 것도….”
“블라인드 공채에서 먼저 합격은 해두었고, 주주총회에서 스타트업에서의 성과를 인정받아 특례 채용으로 승인받았어. 뭐, 그마저도 처음부터 집안 배경으로 가능한 게 아니었냐 따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스타트업 창업자금은 할아버지나 큰아버지에게 10원 한 푼 도움받은 건 없어.”
“그래도 외부에서 자금을 끌어올 수 있었던 건 선배의 배경 때문 아니었을까요.”
“맞는 말이야.”
예서의 무심한 지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굳이 부정하고 싶진 않았다.
“물론 그만한 자금이 있다고 해도 누구나 선배처럼 엄청난 성과를 내진 못했겠지만요.”
“들었다 놨다 잘하네, 민예서.”
그가 장난기 어린 어조로 말했지만 예서는 웃지 않았다. 대신, 그가 예상했던 말을 꺼냈다.
“잘 모르겠어요, 선배. 선배가 갑자기 너무 멀게 느껴져서….”
“뭐가 멀어. 이렇게 가까운데.”
그는 여전히 가벼운 투로 툭 던지며 예서에게 바짝 다가가 앉았다.
“우리 큰어머니와 한 시간이나 얘기했으면 분명히 알 텐데. 집에선 내가 누구와 연애하든,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거.”
“하지만….”
“난 그냥 나야, 예서야. 지금까지 네가 알아 왔던 한주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그가 달래듯 예서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그녀가 이렇게 불안해할수록 내심 기쁘다는 사실은 꽁꽁 숨긴 채, 최대한 성숙한 연인인 척 가식을 떠는 스스로가 가증스러웠다. 물론 그 위선을 예서가 알게 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지금도, 앞으로도.”
주혁은 담담하게 말하다 실소를 지었다.
“아, 달라지는 거 있긴 있네. 이젠 좀 편하게 돈 써도 되겠어.”
“……?”
“그동안 네 눈치 보느라 제대로 쓰지도 못했잖아. 툭하면 신세 진다고, 밥 먹고 차 마시는 데이트 비용 외엔 뭘 받지를 않으니.”
“데이트 비용을 늘 선배가 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니, 지금 월셋집 보증금도 선배가 빌려줬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신세를….”
“그런 의미에서, 그 원룸은 보증금 빼서 네가 비상금으로 가지고, 여기로 이사 오는 게 어때?”
“네? 그게 무슨….”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 건물, 너무 낡았잖아. 보안도 걱정되고.”
“서, 설마 동거? 동거하자고요?”
그가 불쑥 던진 제안에 민예서의 눈이 커졌다. 뺨이 귓불까지 발갛게 물들어 발그레했다. 문득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오해한 대로 동거를 해도 좋았을 것 같은데.
“선배, 아직 거기까진 생각을 안 해 봤….”
“동거도 좋지. 좋지만 2년 동안은 여기서 너 혼자 살아야 할 것 같은데.”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내가 왜 선배 집에 혼자… 선배는 어디서 살고요?”
점점 모를 소리에 민예서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말은 동거가 웬 말이냐 기겁하면서도 내심 싫지만은 않았던 모양이었다.
“예서야. 실은 할 얘기가 있어.”
“…뭔데요?”
긴 속눈썹 아래, 사슴처럼 크고 맑은 눈망울이 조금 떨렸다. 심장이 불안으로 덜걱,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곧 보일 동요가 눈에 선해 심장이 뛰었다.
개새끼.
스스로를 향해 욕지거리가 나왔다. 다신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또다시 시험해 보는 자신이 역겨웠다.
그런데도 그만두질 못했다. 민예서가 어디까지 그를 받아줄지, 참아줄지에 대한 의구심과 기대감을 품었다가 번번이 그를 놓지 못하는 그녀의 감정에 만족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지나고 27일, 미국에 가게 됐어. 1월 초부터 하버드 MBA 과정 시작이라.”
“네…?”
“처음엔 생각이 없었지만 큰아버지가 자꾸 권유하셔서. 바이오 제약 쪽이 앞으로는 북미 쪽에 더 치우칠 예정이기도 하니까.”
“…….”
“2년 과정이지만 가능한 1년 반 안에 끝낼 생각이야.”
민예서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어딘가 멍한 듯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시선은 2년 전 입영 소식을 전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희미하게 달싹이는 입술만이, 그녀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기대하고 원했던 반응이었다.
“그동안 네가 여기서 지내는 게 여러 가지로 좋을 것 같아. 그편이 나도 안심되니까. 이사는 날짜만 정하면 본가 직원이 알아서 해 줄 거고, 매달 관리비는 어차피 자동이체로….”
“선배.”
억눌린 감정을 추스르느라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저한테 또… 이러네요.”
“…….”
“작년과 똑같은 상황이잖아요. 일주일 뒤 입영한다고…. 이번엔 미국에 간다고요? 그것도 닷새 뒤…?”
“일단 신청은 해두고 취소하려다 마음을 바꿨던 게 얼마 전이었어. 그래서 더 일찍 말하지 못했던 거야. 미안해.”
“적어도 몇 달 전에는 신청을 했을 텐데, 어쩌면 갈지도 모른다고 그때 말을 해 줬어야 하지 않나요…?”
“예서야.”
“모르겠어요. 선배가 저한테 왜 이러는지…. 왜 저번과 똑같이….”
“똑같지 않아. 이번엔 그때보다 훨씬 여유 있게 연락도 할 수 있어.”
민예서의 반응은 그의 기대치를 조금 벗어나 있었다. 분노 쪽이 훨씬 더 극렬해 보였다. 실망 역시도. 2년 전에도 그랬지만 그때와는 또 달랐다.
“예서야.”
“…갈게요.”
민예서는 콧잔등이 붉게 달아오른 채 가방과 코트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혁은 그녀를 뒤따랐지만 이번엔 민예서가 좀 더 빨랐다. 그녀가 신을 신는 둥 마는 둥 현관문에 손을 대는 순간, 주혁이 중문 앞에 멈춰 섰다.
“민예서, 너. 지금 나가면 끝이야.”
그녀가 뒤돌아선 채 우뚝 멈춰 섰다. 어깨가 긴장으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재차 말했다.
“정말로 끝이야.”
제 귀에도 초연한 음색이 가증스러웠다.
“나 너 다시는 안 봐.”
“…….”
“물론 네 쪽에서 먼저 그만두자면 더더욱 할 말 없고.”
민예서는 현관문을 바라본 채 오도카니 서 있었다. 이제는 희미한 경련마저 감지되지 않았다. 주혁은 바지 주머니 속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초조함에 땀이 나서 손 마디 마디가 질척거렸다.
“그래도 좋아? 좋다면 가.”
싸늘한 목소리에 뒤돌아선 민예서의 어깨가 다시 움찔 떨렸다. 그 와중에도 문손잡이를 잡은 손은 그대로였다. 그래서 불안했다. 불안이 광증을 불러와 형체 없는 괴물로 그를 덮칠 것만 같았다.
어떡하지, 이대로 민예서가 가 버리면. 이번에야말로 실망하고 화가 나서 끝내겠다고 하면. 아냐. 그럴 리 없어. 민예서는 그러지 못해. 저 여자는 나를 사랑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날 놓지 못한다고. 어떤 좆같은 짓을 하고 시험을 해도.
양가적인 감정이 양쪽 귓가에서 번갈아 울리는 것 같았다. 영원 같은 적막이 흘렀다. 주혁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한 발짝 다가섰을 때였다. 손잡이를 잡고 있던 민예서의 손이 스르륵 떨어졌다.
“…싫어.”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가 이어졌다.
“싫어. 싫다고.”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며, 머리카락이 길게 드리워진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선배랑 끝내기 싫어요. 하지만…, 이대로 계속하고 싶지도 않아요. 왜, 왜 매번 나에게 이러는지 모르겠어….”
목소리가 젖어 들며 기어이 흐느낌이 뒤를 이었다. 주혁은 희열로 벅찬 가슴을 억누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쾌재를 부르는 승리감, 역시 민예서란 여자에게 제 존재가 얼마나 단단하고 굳건한 것인지 확인한 기쁨, 그 어느 것도 무감한 얼굴 위로는 드러나 있지 않았다.
내가 그랬지. 민예서는 날 절대 놓지 못한다고.
확신에 찬 발걸음이 그녀의 등 뒤에서 멈췄다. 그가 그대로 민예서를 끌어안고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해.”
그를 뿌리치려는 몸짓에, 상체를 안은 팔에 더 힘이 들어갔다. 그는 민예서의 등을 제 가슴에 완전히 붙이고 귓가에 속삭였다.
“하지만 이번엔 달라. 정말로.”
대답 대신 가느다란 흐느낌이 이어졌다. 그 눈물이 기껍고도 애달파 그는 저도 모르게 불쑥 내뱉었다.
“약혼하자.”
깜짝 놀란 기척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흐느낌이 잦아들고 있었다.
“우리, 약혼하자. 예서야.”
다분히 충동적인 말이었지만 되돌릴 생각 따윈 없었다. 어쨌든 언젠가는 거칠 과정이 아닌가. 약혼이든, 결혼이든, 어차피 끝은 정해져 있으니까.
“예서야. 나 좀 봐.”
포옹을 풀고 제 쪽으로 부드럽게 어깨를 돌려세웠다. 눈물에 젖어 사과처럼 빨개진 얼굴, 잔뜩 젖어 속눈썹을 황망하게 깜빡이는 눈동자가 그를 마주 보았다.
주혁은 한순간 시선을 떨궜다.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워 계속 보고 있다가는 젖은 눈가가 버석거릴 때까지 혀로 정신없이 빨고 핥을 것만 같았다.
“야, 약혼요…?”
“응.”
그는 혀를 내밀어 눈두덩을 게걸스럽게 핥는 대신, 한 손을 들어 얼룩진 뺨을 차분하게 감싸 쥐었다.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잖아. 우리 결혼.”
나랑 결혼해 줄래? 우리 결혼할까? 일반적인 청혼의 표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혼은 청혼이었다. 어차피 우리의 운명, 종착역은 결혼이란 소리가 청혼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민예서의 예쁜 눈망울이 좀 더 커졌다. 그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 우리 뭐할까, 이번 주말엔 어디 갈까, 뭐 먹을까, 날씨 얘기를 하듯 여상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시간이 빠듯하니까 약혼식은 내가 돌아와서 해야겠지만. 아니면 그때 약혼식 생략하고 바로 결혼해도 되고. 일단 반지 교환하고, 큰어머니와 약속한 30일은 26일로 당겨서 그때 간단히 어른들 뵙자.”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민예서와 결혼을 논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자연스럽고 마땅한 일처럼 여겨졌다. 민예서는 이제 눈뿐 아니라 입술까지 희미하게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