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59)화 (60/124)

<59화>

“그럼 그럴게요. 근데 사모님이라니 난 그 호칭 별론데. 나도 엄연히 사회생활 하는 사람이라 직책도 따로 있거든요.”

원미란이 콧잔등을 살짝 찡그리며 백을 열어 명함을 꺼냈다.

“여기, 내 명함. 앞으로는 원 관장이라고 불러줄래요? 우리 정 여사랑 김 비서도 다 그렇게 부르거든요.”

고급스러운 명함 위에는 ‘가온 아트센터 원미란 관장’이라 쓰여 있었다. 가온 아트센터?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가 본 적은 없지만 이태원 쪽에 꽤 유명한 곳 아니었나?

“네, 알겠습니다. 원 관장님.”

“나중에 주혁이가 정식으로 소개해 주면 그때부터는 주혁이가 부르듯 백모님이라 불러주고요.”

뜻밖의 제안에 예서가 잠시 주춤거렸다. 하지만 원미란은 여상하게 덧붙였다.

“주혁이가 정식으로 소개할 때가 되면 그때는 이미… 둘 사이가 완전히 공인된 사이가 되어 있단 의미일 테니까요.”

“…….”

“결혼해야 되는데, 우리 주혁이.”

아이스 커피를 다시 입가로 가져가던 예서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내로라하는 가문들에서 혼담이 막 쏟아지고 있어요. 군대도 다녀오고 스타트업으로 감도 익혔겠다, 이제 회사도 들어오고 하니 아주 난리가 났답니다. 어찌나 탐을 내는지.”

예서의 심장 어딘가가 따끔거렸다. 원미란은 천연덕스럽게 커피를 마시곤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하지만 다른 건 필요 없어요. 아무리 대단한 집안이고, 훌륭한 신붓감이면 뭐 하겠어요. 주혁이는 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기가 좋아야 결혼할 애인데.”

“…….”

“평범한 배경에서 올바로 자란 아이라면 나도 적극 찬성이고. 왜, 그, 영국 왕세자비도 평민 출신이잖아요. 물론 굉장히 부유한 집안이라 재력 면에서는 친정도 상류층이라지만 왕실의 일원이 될 만한 레벨은 아니었다잖아요. 어머, 어쩐지 핀트가 좀 나가 버린 것 같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린 주혁이 의사를 적극 존중할 거란 거예요.”

“네….”

“크리스마스에 뭐 해요? 아, 참. 당연히 주혁이랑 만나겠지…. 그럼 마지막 토요일에 나랑 만나 점심 하지 않을래요? 예서 씨가 오늘 커피 대접해줬으니까 그날은 내 차례로.”

“네? 30일에요…?”

“생각해 보니까 어차피 이렇게 우연히 마주친 거, 우리끼린 따로 만나도 괜찮을 것 같거든요. 주혁이가 정식으로 소개하는 건 그때 가서 또 따로 만나는 거고….”

예서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무리 봐도 호의인 건 확실해 보였지만, 부담스럽지 않을 리가.

“저… 사모, 아니, 관장님. 말씀은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괜찮으시다면 주혁 선배에게도 한 번 의향을 물어보고….”

“아니, 우리 둘이 만나는데 그 애 의향이 왜 중요해요. 자기도 끼고 싶다면 굳이 말릴 순 없겠지만.”

“…….”

“일단 우리끼리 번호부터 교환해요. 내 번호는 이거. 아, 걱정 말아요. 난 비대면 별로 안 좋아하고 글자 치는 것도 느려서 전화나 톡은 거의 안 할 거니깐.”

“아, 네….”

예서가 번호를 저장하고 제 것도 알려주고 나자 원미란은 만족한 듯 웃었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다시 덧붙였다.

“근데 우리 주혁이 빨리 결혼해야 하는데…. 주혁이 알고 보면 정말 짠한 아이랍니다. 예서 씨랑 끝까지 잘 됐으면 좋겠어요.”

예서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때 집에서 전화가 왔는지 원미란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는 정 여사로 추정되는 사용인과 잠시 대화를 나누곤 예서에게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유, 우리 집 양반이 막 귀가하셨다고, 나 언제 들어오냐고 호통을 치셨다는데…. 암만해도 잔소리하실 뭔 일이 생긴 건지. 내가 하루도 맘 편하게 외출을 못 해요. 예서 양 집은 어느 쪽이죠?”

“저는 괜찮습니다. 여기서 가까우니 금방 갈 수 있어요.”

예서는 극구 사양하며 원미란을 배웅했다. 9시가 넘은 시간인데, 이제부터 한주혁의 오피스텔에 가겠다고 차마 말할 순 없었다. 아무리 연인 사이란 걸 알아도, 겉으로 드러내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래요, 그럼! 대신, 30일 점심에는 꼭 보는 걸로 해요. 알았죠?”

원미란의 차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주혁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그는 SG에 입사하기 직전, 예전의 업무용 오피스텔을 정리하고 인근의 주거용 오피스텔로 옮겼다.

예서는 신호등 앞에서 다시 명함을 꺼내어 보았다. 그제야 가온 미술관이 퍼뜩 생각났다. 서강, 현 SG화학그룹의 문화재단이 설립한 융합 미술관이다. 그리고 지금 주혁이 소속된 회사는 SG그룹의 계열사인 SG바이오였다.

-내로라하는 가문들에서 혼담이 막 쏟아지고 있어요. 군대도 다녀오고 스타트업으로 감도 익혔겠다, 이제 회사도 들어오고 하니 아주 난리가 났답니다.

원미란의 말이 곧바로 떠올랐다. ‘이제 회사도 들어오고 하니’라고 하셨지, 분명.

설마.

예서는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바뀐 뒤로도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머리가 멍했다. 대학 시절, 그의 본가가 약국을 한다던 소문도 생각났다.

약을 다루는 가업인 건 맞았다. 그게 약국이 아니라 국내 굴지의 제약회사란 것만 달랐을 뿐.

***

SG화학그룹 회장, 한태진은 신경질적으로 케이스를 드르륵 열어 시가를 꺼내 물었다. 그러고는 한참을 뻑뻑 피워대다 벼락같이 소리를 내질렀다.

“아니, 툭하면 서프라이즈야! 근본 없는 집구석도 아니고!”

주혁은 백부의 이어지는 호통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렇다고 반성의 기미나 유감인 기색이 있지도 않았다. 책상 앞에 전봇대처럼 꼿꼿하게 선 모양새는 그저 뇌를 비우고 몸만 거기 있겠다는 분위기마저 풍기고 있었다.

“네가 혈혈단신 혼자냐? 혼자 잘 처먹고 처자고 처살 거면 아예 연 끊고 네 갈 길 처가지 그랬냐고!”

“저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번번이 붙잡으신 건 할아버지와 백부님이셨습니다.”

“…….”

“할아버지 장례식이 끝나고 백부님이 간곡히 말씀하셨죠. 스타트업 그룹에 합병시키고 정식으로 회사에 들어오라고. 그럼 다른 건 일절 간섭하지 않겠다고요.”

“누가 뭐랬냐? 누가 간섭했냐고. 좀 미리미리, 상식적인 선에서 미리 알려만 달라는 거였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

“네 큰엄마도 얼마나 놀랄 거야. 갑자기 일주일 뒤 출국이라니. 군대 갈 때도 그러더니 도대체가… 개 쌍놈 새끼.”

“…….”

다행히 한태진의 불벼락과 고성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그를 소파에 앉혀두고 한참을 조곤조곤 설교를 늘어놓고 나서야 조카를 놓아주었다.

오피스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9시가 넘어 있었다. 출발할 때 민예서에게 문자를 보내놓고, 막상 답장은 건물 앞에 도착해서야 확인했다.

[지금 가는 중이야.]

[네.]

어딘가 묘했다. 원래 이렇게 단음절로 답장하는 법이 없는데.

민예서는 늘 할 말만 간략하게 보내고, 답장도 단답식으로 짧게 치는 그와는 달랐다. 항상 구구절절 말이 많은 평소 같았으면 추운데 천천히 오라느니, 커피를 내려놓을까, 뭐 다른 거 필요한 건 없냐, 여러 가지 말을 얹었을 터였다.

컨디션이 별로 안 좋은가?

주혁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이 시간에 문을 연 약국이나 병원이 있던가, 가늠해 보았다. 현관까지 가는 발걸음이 느리면서도 거침이 없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짐승처럼 굴지는 않았다. 들어서는 즉시, 대화는 없이 옷부터 벗기고 성급하게 밀어붙이는 행위는 의식적으로 삼가고 있었다.

막상 민예서가 그걸 문제 삼았을 때는, 그녀가 선을 넘으면 헤어질 생각도 하고 있다며 맘에 없는 개소리를 지껄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섹스까지 소위 ‘분위기를 띄우는’ 텀을 가지고자 노력해왔다. 인내심을 끌어모아 서서히 분위기가 달궈지도록 대화로 뜸을 들였고, 이제는 그 과정이 하나의 익숙함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래도 오늘은 평소보다 더 빨리 눕혔으면 좋겠는데. 이미 식사 중에 얘기할 만큼 했으니까.

한숨을 삼키며 문을 열었다. 하지만 민예서는 현관 앞에 없었다. 조금 전의 단답식 문자처럼, 다시 묘한 이질감이 엄습했다. 꼬리를 흔들며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늘 미리 나와 있다가 그가 들어서면 쫄래쫄래 따라오는 게 정상인데.

“예서야.”

싸늘한 바람이 실내에 희미하게 스며 있었다. 그때 베란다 문이 열리며 민예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이 한겨울 공기에 노출되어 발개져 있었다.

“아, 선배. 왔어요?”

“추운데 왜 나가 있었어. 감기 걸리게.”

“잠깐 바람 좀 쐬느라….”

역시 뭔가 이상했다. 평소 같으면 그에게 바짝 다가와 먼저 폭 안거나 안겼을 텐데, 오늘은 시선도 우물쭈물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라기보다… 물어볼 게 있긴 해요.”

두 사람은 이내 따뜻한 찻잔을 놓고 거실 소파에 마주 앉았다. 그녀가 스키야키 식당에서 큰어머니와 우연히 마주쳤다는 얘기, 올해 마지막 토요일에 점심 초대를 했다는 것까지 딱히 놀랍진 않았다. 어차피 빠르든 늦든, 민예서의 존재는 집안 어른들에게 드러나게 되어 있다.

문제는 민예서가 그에게 무언으로 표하는 거리감이었다. 그를 보는 눈빛이 어딘가 낯설었다. 주혁은 그 사실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배. 직설적으로 물을게요. 선배, SG그룹 회장님의 조카… 맞아요?”

“응.”

여상하게 툭 내던지듯 답했다. 그게 뭐 중요한 일이야? 반문하는 듯한 대꾸에 민예서는 당황한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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