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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58)화 (59/124)

<58화>

등 뒤에 비서로 보이는 젊은 여성을 대동한 여자는 한눈에 봐도 고급스럽고 세련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드라마에 종종 나오는 재벌가 사모님 같은 분위기였다.

“저기, 초면에 실례지만 좀 물어볼 게 있어서요.”

하지만 온화한 미소는 드라마 속 오만하고 싸늘한 사모님들과는 좀 달랐다. 그래서 예서도 긴장을 늦추고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네. 말씀하세요. 무슨 일이신지….”

“혹 우리 주혁이… 여자친구 맞을까요? 방금 주혁이 차가 나가는 걸 봤거든요.”

예서의 눈이 커졌다. 집안 어른들의 단골 식당이라 했던 한주혁의 말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그럼 혹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친아들처럼 키워주셨다는 큰어머니…?

“네, 맞, 맞습니다만….”

“어머나. 역시.”

여인의 미소가 서서히 걷혔다. 드라마 속 사모님들처럼 거만하진 않았지만 왜인지 표정이 딱딱하게 변해 있었다.

“아 참, 이럴 게 아니라 소개부터 해야겠죠. 난 원미란이라고 해요. 주혁이 큰엄마랍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민예서라고 합니다.”

예서는 허리를 90도로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긴장으로 손끝이 덜덜 떨렸지만 애써 차분함을 유지했다.

“근데 저녁 먹고 벌써 헤어진 거예요? 아직 9시도 안 됐는데.”

“아… 네. 선배가 회사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먼저 갔습니다.”

오피스텔에서 기다릴 예정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한주혁의 백모는 등 뒤의 비서에게 뭐라고 빠르게 말을 하더니 다시 돌아섰다. 여전히 딱딱한 표정이었지만 무례하거나 싸하진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주혁이 만나는 여자분에 대해 많이 궁금했어요. 나랑 남편이 워낙 캐물으니까 대략적인 신상은 말해줬지만… 그 외에는 도통 말을 안 해서 말이죠.”

“…….”

“저기, 민예서 씨. 혹시 괜찮으면 나랑 같이 차 한잔 안 할래요? 나도 막 지인과 식사 자리 끝내고 집에 가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마주친 김에 물어볼 것도 있어서요.”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건물 너머 눈에 익은 로고를 가리켜 보였다.

“마침 옆에 베이커리가 있네요. 프랜차이즈라 커피 맛은 별로일 것 같지만, 뭐 내가 진한 아메리카노는 웬만하면 다 마시니까. 예서 씨는 괜찮겠어요?”

“네, 저는… 저도 괜찮습니다.”

예서는 얼떨떨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일단은 어른이 원하시는 대로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이따 선배에게 얘기를 하긴 해야겠지…?

예서는 앞장서서 카페로 향하는 두 여자를 따라나섰다. 원미란의 안색이 묘하게 경직된 게 마음에 걸렸다. 긴장을 풀고자 몰래 심호흡을 크게 내쉬었지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

원미란이 잠시 통화를 하는 사이, 예서는 그녀의 몫까지 직접 주문해서 트레이를 자리로 가져왔다. 원미란은 왜 네가 결제하지 않았느냐고 비서에게 핀잔을 던졌지만 결국 고마움을 표하고 자리에 앉았다.

긴장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테이블 위로는 정적만이 흘렀다. 간간이 들려오는 주위의 소음과 음악이 아니었다면 훨씬 더 불편했을 것이다. 마주 앉은 지 벌써 몇 분이 흘렀지만 원미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커피만 홀짝이고 있었다.

“생각보다 괜찮네요.”

“네?”

“커피 말이에요. 프랜차이즈라도 파나마 게이샤라 그런지 풍미가 좋아요.”

“아아, 네.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예서가 엷게 웃었다. 조금 안심이 되어, 그녀도 제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입가로 기울여 한 모금 마셨다. 날이 추웠지만 어쩐지 차가운 것을 마셔야 정신이 명료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긴장이 풀리니 그제야 상대방의 모습이 제대로 시야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한주혁의 본가는 평소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유한 것 같았다. 원미란이 몸에 두른 모피와 캐시미어가 아니라도, 팔찌와 시계, 목걸이도 굉장한 고가품이었다.

하이엔드니 위버럭셔리니, 명품에 원체 관심이 많았던 수민이 약국에서 일할 때 몇 가지 특정 브랜드 상품을 휴대폰으로 질리도록 보여줬기에, 저도 모르게 눈에 각인되어 버린 듯했다.

“예서 씨. 아, 그냥 예서 씨라고 부를게요.”

“네, 편히 말씀하세요.”

안도감도 잠시, 전신이 다시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원미란의 얼굴이 어쩐지 더 딱딱해진 것 같았다. 웃음기라곤 하나 없이, 상대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평가하는 시선이 수초간 계속되었다. 마침내 원미란이 불쑥 말을 꺼냈을 때였다.

“얼마 드리면 될까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모골이 송연하다는 느낌이 이런 걸까. 눈앞의 귀부인은 아랫사람을 노골적으로 깔보고 하대하는 드라마 속 재벌가 사모님 같지는 않았다. 그녀를 보는 눈빛에 멸시가 담겨 있지도 않았다.

“계좌번호 불러주면 모바일 뱅킹으로 바로 보내줄게요.”

하지만 결국 본질적인 목표와 소망은 동일한 것이었던 듯했다. 그들의 기대치에 턱도 없이 모자란 존재, 그대로 뒀다가 후환이 깊어질 수도 있을 불안 요소를 확실히 잘라내기 위해 그녀를 보자고 했던 거였다.

그래. 그래서….

한주혁을 통해 저에 대한 대략적인 신상은 들었다고 했으니 그녀가 홀어머니 슬하에 변변한 것 하나 없고, 구청 비정규직 직원으로 일하는 작가 지망생이란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반면 한주혁은 얼마 전 제 손으로 만든 스타트업을 상장기업으로까지 키워 수십억 원의 가치로 대기업에 매각할 만큼 비범한 인재였다. 게다가 지금은 그 스타트업을 인수한 SG그룹의 계열사, SG바이오에 전격 스카우트되어 처음부터 대리 직함을 달고 IT 총괄전략팀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 조카에게 그녀 같은 여자가 어울린다 생각하실 리가 없었다.

“저쪽에 앉은 우리 김 비서에게 시켜서요. 김 비서, 잠깐만 이리….”

“자, 잠깐만요. 사모님.”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가족의 반대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지만, 눈앞의 상황에 묵묵히 순응할 수가 없었다.

“저 돈, 안 받습니다. 아니, 못 받습니다.”

선배를 포기할 순 없었다. 예서는 덜덜 떨리는 두 손을 꼭 맞잡고 힘주어 말했다. 어른에게 불손하게 보이지 않을까 염려보다, 선배와 강제로 결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훨씬 더 컸다.

“저, 주혁 선배 정말 많이 좋아합니다. 아니, 사랑합니다. 진심이에요.”

원미란은 비서를 부르려던 손짓도 멈추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고운 눈매 위로 당혹감과 혼란이 한가득 떠올라 있었다.

“주혁 선배가 워낙 가진 것도 많고 모든 면에서… 제가 감히 바랄 수도 없는 사람인 건 잘 알아요. 하지만 저는 선배란 사람 그 자체를 사랑합니다.”

“저기, 예서 씨….”

“제가 정말 부족한 건 압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지켜봐 주시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뒷말을 삼켰다. 마음 같아서는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만약 그녀가 그러길 원한다면, 여기 당장 무릎 꿇고 앉아 빌 각오도 되어 있었다.

주혁 선배, 계속 만나게 해 주세요. 제발. 이렇게 빌게요.

“저, 예서 씨 있잖아요. 돈은 그러니까… 이 커피값 얘기한 건데.”

“네…?”

“아니, 이거 파나마 게이샤니까 만 원은 넘을 거잖아요. 예서 씨가 마시는 그 보통 아메리카노보다는 훨씬 더 비쌀 텐데 일부러 내 건 게이샤로 주문해 준 거 같아서.”

“아….”

원미란의 말대로 파나마 게이샤 드립은 만 2천 원, 보통 아메리카노는 4천 원이었다. 설마 얼마면 되겠냐고, 계좌 이체를 해 주겠다고 한 게 커피값을 말한 것이었다니.

“음… 나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원미란이 민망한 듯 중얼거렸다. 예서는 쥐구멍이라도 찾듯 고개를 푹 떨구고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이제는 다른 이유로 울고 싶었다.

“내가 뭐 드라마에 나오는 나쁜 사모님도 아니구… 나, 그런 사람 아니에요.”

“아아, 네. 죄송…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엉뚱한 말을 해서….”

“우리가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주혁이를 친아들처럼 키워오긴 했지만, 내가 그런 속물은 아니랍니다. 그런 오해는 안 해 주길 바라요….”

“죄송합니다. 오해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기쁘네요. 오해했을 땐 예서 씨도 많이 놀랐겠지만 우리 주혁이를 그렇게 좋아한다니…. 마음이 너무 절절해서 눈물 날 뻔했다니까요.”

그러더니 그동안 딱딱했던 표정을 풀고 내내 도도하게 끼고 있던 팔짱도 풀었다.

“역시 안 되겠다, 나 그냥 편하게 얘기할게요. 역시 무게 잡는 건 체질에 안 맞아. 잠시만요, 커피에 시럽도 잔뜩 넣구… 원래 처음만 쓰게 마시고 나머지는 달게 먹거든요. 김 비서, 미안하지만 저기 카운터에 시럽하구 설탕 좀 가져다줄래? 응, 고마워.”

원미란은 휴, 한숨을 내뱉더니 실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 사실은 정 여사가, 아, 정 여사는 우리 집 살림을 20년 넘게 맡아주는 집사장인데 날 맨날 잡거든. 사모님, 왜 자꾸 직원들이 들어왔다가 결국 저한테 크게 혼나고 근무지 변경되는 줄 아세요? 사모님이 처음부터 너무 실실 웃으시면서 너무 사람 좋게 응, 응, 해 주셔서 애들이 기강이 해이해지는 거잖아요, 막 이러면서…. 처음엔 웃지 말고 무게를 좀 잡고 있어야 사람들이 좀 어려워하고 만만치 않게 본다나 뭐라나.”

“…….”

“아무튼 난 주혁이가 누구랑 만나든, 관여할 생각 전혀 없어요. 보통 까다롭고 기준이 높은 애가 아닌데, 어련히 알아서 마음을 주고 제 사람으로 곁에 두겠나 싶어서. 그런 쪽으로는 나나 걔 큰 아빠나 전적으로 믿고 알아서 하겠거니 해요.”

“아아, 네….”

“우리 아버님이 살아 계셨어도 똑같이 말씀하셨을 거야. 주혁이 할아버지 올해 초에 돌아가신 건 알죠?”

네, 예서는 다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경조사로 휴가를 나왔을 때, 예서는 그녀도 같이 문상을 가겠다고 했지만 한주혁은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다고 제지했다. 당시만 해도 그녀의 존재를 집안 어른들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무튼 그러니까 긴장 좀 풀어요. 근데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맞아. 커피! 얼마예요? 김 비서, 이리….”

“괘, 괜찮아요. 사모님. 그렇게 큰 금액도 아니니 제가 대접하는 걸로 해 주세요.”

그동안 한주혁에게 받은 것만 해도 커피 수천 잔은 될 것이다. 아무리 신세를 지지 않으려 나름 애를 썼어도, 그는 물 한 잔도 예서의 지갑에서 나오게 하는 법이 없었다. 그동안 받은 노트북이나 호텔비, 당장 저번에만 해도 거래처에서 연말 선물로 받은 건데 쓸 일이 없다고 억지로 가방에 넣어준 상품권도 백만 원 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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