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선배. 차는요? 뭐 따뜻한 거라도….”
“아니, 괜찮아.”
주혁은 방금까지 조수민이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 코트를 벗었다. 재킷 사이로 SG바이오 제약회사 사원증 목걸이가 설핏 보였다. 그가 맞은편의 민예서를 보며 싱긋 웃었다.
“조금만 앉아 있다 밥 먹으러 가자. 근처에 우리 집 단골 식당 예약해뒀는데 괜찮아? 너 고기 좀 먹일 거라 했잖아.”
“고깃집이에요?”
“스키야키.”
“앗, 좋아요! 안 그래도 뜨거운 국물 먹고 싶었는데.”
민예서가 환하게 웃었다. 그와 함께라면 뭘 먹든 다 좋다고 얼굴에 쓰여 있었다. 그녀는 그의 안색을 살피며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회사 일로 워낙 바빠 3주 만에 보는 그는 여전히 수려한 가운데 조금 피곤해 보였다.
“회사는 어때요? 혁신 에너지부는 엄청 힘들다던데….”
아무래도 심적으로도 고단하지 않을까. 아무리 소규모의 스타트업이었다 해도 제 사업을 꾸려가던 오너일 때와는 천지 차이일 터였다.
“그럭저럭 할 만해. 생각만큼 힘들지도 않고. 나보다 네가 더 힘든 거 아냐?”
“저야말로 별로 힘든 거 없어요. 아무래도 외국인이 많은 지역이라 민원 업무가 좀 복잡할 때도 있는데, 주무관님들이 워낙 잘 도와주시니까요.”
민예서는 4학년 1학기에 일찌감치 조기졸업을 하고 9월부터 지역 구청에서 육아휴직자 대체, 기간제 근로자로 일하고 있었다.
학교 이름과 학과 성적을 고려하면 그가 소속된 SG바이오를 포함한 어지간한 대기업 공채에 너끈히 통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매일 꼬박꼬박, 오후 6시부터 오롯이 소설 작업에만 매진할 수 있는 근로 환경이 뭣보다 최우선이었다.
그때 주혁의 휴대폰에서 벨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는 시선에 저도 모르게 날이 섰는지, 맞은편의 민예서가 긴장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회사야. 잠깐만 통화하고 올게. ”
그는 기계적인 웃음으로 그녀를 안심시키고 카페와 연결된 건물 로비로 향했다. 전혀 반갑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언제까지고 연락을 무시할 수만도 없었다.
그 염병할 혈연이기에. 차라리 남이면 죽을 때까지 더는 볼 일도 없을 텐데. 원하고 선택해서 가족이 된 것도 아닌데 개 같은 혈연이란 것 때문에 시원하게 떼어놓을 수가 없다.
-주혁아.
“무슨 일입니까.”
-그냥… 잘 있나 해서 전화해 봤단다.
나긋나긋, 교양이 철철 넘쳐흐르는 음색에 욕지기가 치밀었다. 신물과 구역질이 올라와 위가 쓰릴 지경이었다.
-추석에도 안 오고, 지난번에도 세종에 왔더구나….
대답이 없자 류혜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처연한 음색이 다시 속을 뒤집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일부러 내가 없을 때를 골라서 온 거니?
“그게 궁금해서 전화하셨나요?”
-혁아. 이제는 제발 이 이모를 용서해 줄 수 없겠니…?
“그렇게 부르지 말라 그랬죠.”
악문 잇새로 억눌린 분노가 터져 나왔다. 어릴 적 아무것도 모를 때 그를 불렀던 애칭조차 역겨웠다. 그토록 다정하고 올바른 가면 너머, 누구보다 더럽고 추잡한 이중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주혁아, 내가 널 친아들처럼 예뻐하고 소중히 아꼈던 마음만은 진심이었어. 내 첫 조카였잖니. 얼마나 특별했는지 몰라. 다른 건 몰라도 제발 내 애정만은 의심하지 말고….
“처음이자 마지막 조카였죠.”
-주….
“정말 지겹군요. 매번 똑같은 소리….”
급기야 휴대폰 너머에서는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수없이 말했지만 그만 내버려 두세요. 이러다 수틀리면 저도 제가 어떻게 할지 모르니까.”
로비 끝에 걸린 거울에 제 얼굴이 보였다. 스스로의 눈에도 무서울 만큼 무감해 보였다. 이럴 때의 자신은 사람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더 싫었다. 이렇게 만드는 존재들이 한결 더 가증스럽고 지리멸렬했다.
-주혁….
“제 쪽에서만 신경 써서 피하는 것도 한도가 있을 테니까 앞으로는 이모님께서도 협력해 주시면 좋겠네요. 한쪽보다는 양쪽 모두 노력을 해야 얼굴 마주칠 일이 없을 테니까. 그럼.”
담담하게 쏘아붙이곤 통화를 종료해 버렸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번호를 차단했다. 후일은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외조모의 건강은 늘 제자리였다. 특별히 나빠지지도 않고, 눈에 띄게 호전되지도 않는다. 그녀가 생을 마감하길 바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든 걸 알 바에는 차라리 그 전에 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 차녀 류혜수의 기행, 그게 결국 장녀 부부의 죽음과 어떻게 직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자식인 외손주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얻게 했는지에 대해서 알기 전에 떠나시는 편이 최선일 것이다.
“회사에 급한 일 있는 거 아니에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봐야 한다거나….”
“아냐. 외근 결과 보고서 받았는데 궁금한 게 있다고 해서. 더는 연락 안 올 거야.”
주혁은 다시 자리에 돌아가 예서에게 웃어 보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정을 가장하고 온화함을 되찾는 건 무척 쉬웠다.
특히 민예서 앞에서는. 민예서가 제 속에 일으킨 파장이라면 모를까, 다른 외부적인 요인 중 그를 필요 이상 동요시킬 만한 것은 전무했다.
***
잠시 후 두 사람은 실제 온천 집처럼 꾸며진 스키야키 식당의 2층 독실에 마주 앉았다. 실내는 아늑했고 눈앞에 차려진 코스 음식은 시각과 미각 모두 훌륭했다.
뭣보다 민예서가 가리는 거 하나 없이 맛있게 잘 먹어서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하긴 입맛이 지랄같이 까다로운 건 늘 그였지, 그녀의 식성은 꽤 무던했다. 직원이 토치로 파를 구워 불 향을 내주고 그 위에 등심 스테이크를 굽자 민예서의 눈은 더 보석처럼 반짝였다.
“많이 먹어.”
그가 그녀의 접시를 끌어가 먹기 좋게 잘린 스테이크를 듬뿍 올려주었다.
“선배, 너무 많아요! 선배도 먹어야죠.”
“난 점심 회식 때도 고기 먹었어. 여기, 트러플 솔트에도 찍어 먹고.”
민예서는 감동한 듯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유독 저를 챙기는 자상함에 약했다. 팬케이크 집에서 처음으로 단둘이 식사를 했던 근 3년 전, 그날도 그랬었다.
스테이크를 다 먹고 나자 전골냄비에 야채와 육수, 그 위에 한우 고기를 얹고 본격적으로 스키야키를 끓였다. 이번에도 고기를 집어 예서의 접시에만 부지런히 놓아주고 그가 시키는 대로 달걀물에 폭 찍어 먹는 모습을 즐거운 듯 바라보았다. 민예서가 먹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그래서 조금 후회감이 들기도 했다. 잠시 후 그가 꺼낼 얘기에 부디 너무 놀라지 않기만을 바랐다. 동시에, 아주 큰 바람을 일으키길 소망하기도 했다.
민예서가 아프길 바라진 않았다. 우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는 건 좋았다.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과 물리적으로 멀어질 미래에 가슴을 졸이며 혹여나 그 거리감이 심적인 간격까지 벌려놓진 않을까, 미리부터 불안을 품으며 무너지는 모습은 그에게 늘 짜릿한 쾌감을 선사했다.
그는 그 돼먹지 못한 즐거움에의 기대, 비틀린 모순을 숨기고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구청 일은 1년 계약이니까 내년 8월 말에 끝나지? 공모전도 내년 5월이고.”
“네.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두 번째 도전이니까 더 잘해야죠…!”
민예서는 머쓱하게 웃었다. 올해 처음으로 참여한 공모전에선 고배를 마셨고, 메이저급 출판사마다 개별 투고를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현재는 신생 출판사 한 곳에 투고를 해놓은 뒤 결과를 기다리며 차기 도전작을 준비 중에 있었다.
“그냥….”
“네?”
“아냐, 아무것도.”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내 옆에만 있지 그래. 집도, 돈도, 원하는 건 뭐든 해 줄 수 있으니까 그깟 푼돈 벌겠다고 사서 고생하지 말고.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음식과 나란히 씹어 삼켰다. 솔직히 판타지 소설이란 것도 그랬다. 민예서처럼 똑똑한 사람이 왜 그런 허무맹랑한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고, 앞으로도 더 낭비하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재능이 아까워. 훨씬 더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일을 하고도 남을 텐데.
그는 디저트로 나온 말차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어 예서 앞에 놓아주었다. 정말로 뭐든 다 해 줄 수 있었다.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유학을 가길 원한다면 물심양면, 얼마든지 지원해 줄 수 있다. 물론 제일 좋은 건 저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지만 적당히 사회생활도 해야 할 테니까.
“예서… 잠깐만.”
휴대폰에서 재차 벨이 울렸다. 이번엔 정말 회사에서 온 전화였다. 그것도 큰아버지의 제1 비서실 직통번호였다. 그는 한숨을 얕게 내쉬며 제 몫으로 나온 아포가토도 예서 쪽으로 밀어주었다.
“회사에서 또 연락이 왔네. 여기, 난 별로 생각 없으니까 내 것도 먹으면서 잠시만 기다려.”
“…네, 선배.”
민예서는 조금은 염려 섞인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서기 전 유리문에 얼굴이 슬쩍 비쳤다. 두 눈은 사슴처럼 동그랗게 뜨여 있고, 입에는 스푼을 문 채 제 뒷모습을 쫓고 있는 얼굴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
다시 자리로 돌아온 그의 얼굴에 난감함이 비쳐 보였다. 그녀가 말끔히 비운 디저트 접시를 보자 시선이 밝아졌지만 이내 다시 어두워졌다.
“어쩌지. 아무래도 사무실에 잠깐 들러야 할 것 같아. 심각한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서. 너 먼저 오피스텔에 가 있어야겠다.”
예서가 뜨악한 표정으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제 겨우 7시가 좀 넘긴 했지만 이 시간에 회사에서 다시 부르다니, 그가 너무 힘들 것 같았다.
“선배, 정말 괜찮겠어요? 다녀오면 쉬어야 할 텐데 내가 있으면….”
“금요일이잖아.”
주말 내내 너랑 있을 건데 당연히 네가 있어야지. 한주혁이 들릴락 말락 야릇하게 덧붙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걸치는 예서의 목에 제 머플러를 둘러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추위를 잘 타지 않았다.
다행히 그가 최근 옮긴 오피스텔은 식당에서 도보로 5분밖에 되지 않았다. 예서가 주차장에서 한주혁을 배웅하고 돌아서서 음식점 건물을 나서려 할 때였다. 그윽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치며 누군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저기… 아가씨.”
“네?”
예서가 깜짝 놀라 돌아섰다. 처음 보는 중년 여성이 주차장 입구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