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56)화 (57/124)

<56화>

1년 6개월 후

1년도 더 지난 이야기를 복기하며 수민에게 들려주는 동안, 예서는 잠시 말을 멈췄다. 당시 감동에 북받쳤던 순간이 어제 일처럼 선명해 가슴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사흘 앞둔 레스토랑은 불 켜진 트리와 반짝거리는 장식들로 눈이 부셨다. 조수민은 서빙된 디저트도 잊고서 다음 이야기를 독촉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와아… 정말 감동이다. 드라마 같아. 화이트 해커라니 멋있잖아!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결국 데이터는 복구했어?”

“네, 일어나 보니 진짜 복구가 됐더라고요.”

공모전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한 소설에 대해서도 자세히 털어놓았다. 기어이 해커에게 돈을 지불해야 한다면 혹시 5백만 원을 빌려줄 수 있는지, 훌쩍거리며 묻기도 했다. 은행 이자도 확실히 쳐서 갚겠다는 말에 한주혁이 실소를 지었던 기억도 났다.

-하루 종일 굶고 뭐 하는 짓이야, 도대체. 다 먹고 푹 자.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인근 야식집에서 시켜준 백반에다 그가 직접 끓여준 캐모마일 차까지 마시자 긴장이 풀렸는지 노골노골 졸음이 왔었다. 소파에 잠깐 눈을 붙이자마자 그래도 곯아떨어졌던 것 같다.

-암호화 키 스토리지 다 살펴봤어? 아무리 봐도 옛날 거고 프로도 아닌데, 이 개새끼.

잠깐씩 의식이 돌아왔을 때였다. 어느새 제 몸이 2층 침실 침대에 뉘어져 있었다. 살짝 열린 문 너머로 나직한 욕설에다 혀 차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한주혁이 누군가와 통화하며 동시에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리고 있었다. 2층 거실에서 그녀의 노트북 복원 작업 중인 듯했다.

-해독 프로그램 죄다 끌어모아 실행해도 그대론데. 역시 그 방법밖에 없을까? 역으로 엿 먹이는 방법.

스피커폰 너머 낯선 음성이 핏, 웃으며 덧붙였다.

-한 대표. 그냥 그 자식 이메일 주소 줘 봐. 블랙 컴으로 내가 독소를 심어놓을게. 이런 구닥다리 확장자를 쓰는 거 보면 분명히 프로인 척하는 아마추어잖아. 아, 5백 중에 3백 정도는 미리 보내놓긴 해야 될 거야. 그래야 낚이지.

의식이 다시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도무지 눈이 떠지질 않았다. 보이지 않는 뭔가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붙들고 깊은 심연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동분서주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어떻게 했냐고 아무리 물어도, 어차피 전 전문가도 아니니까 말해도 모른다고 웃기만 하더라고요. 해커에게 돈 준 거 아니냐고 몇 번이나 캐물었지만 한 푼도 안 썼다는데….”

“줬어도 너한텐 안 줬다고 했겠지! 진짜 너무 멋있다. 완전 참사랑 아니니?”

수민의 감탄에 예서는 엷게 웃었다. 사실 마음고생 한 적도 많았지만 그 얘기는 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이 정도를 털어놓는 것도 그녀가 공인중개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해 더는 모친의 약국에서 일하지 않아서였다.

늘 그녀에게 친언니처럼 대해줬기에 약국을 그만둘 때도 아쉬움을 금치 못해 가끔 보기로 했는데, 어쩌다 보니 몇 달이 지난 오늘에야 날을 잡을 수 있었다. 얘기를 하다 보니 화제가 그녀의 베일에 싸인 남자친구가 되었고, 급기야 1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 며칠 동안 남친 오피스텔에서 지내다 온 거였구나. 난 네가 아픈 것도 아닌데 계속 약국에 안 나오고, 약사님도 어째 표정이 좋지 않아서 정우 때문에 또 뭔 일 있었나 했었지. 정우가 한국에 와 있을 때였으니까. 그러다 네가 왔을 땐 내가 또 집에 일이 생겨서 보름이나 약국을 비웠고…. 다시 왔을 땐 흐지부지, 다 잊어버렸는데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수민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약사님은 요즘도 똑같으셔? 하긴 그러시겠지. 나도 부모님이 오빠들에게만 몰빵해 주는 집에서 자랐는데 왜 모르겠니. 그래도 우리 집은 시골 무지랭이 어르신들이니 그렇다 치지만, 약사님은 그렇게 배우신 분이 왜… 아이고, 이 입! 미안!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

아무리 그래도 딸 면전에 대고 모친의 욕을 하는 건 아니다 싶었는지 그녀는 대화를 끊고 일어났다. 예서는 씁쓸한 웃음만 지었다. 모친은 요즘도 똑같을 것이다. 아마 영원히 그 마음 그대로가 아닐까.

한주혁은 다행히 파일은 복구했지만 노트북이 제대로 포맷되지 않는다면서, 사무실의 노트북 하나를 내주고 데이터도 다 옮겨주었다. 아무리 봐도 새것이었지만, 그는 창고에 처박혀 있던 여분이었다고 끝까지 주장했다.

여름 동안 독립하라고 종용도 했지만 그것만은 따를 수 없었다. 그럴 자금이 없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그의 돈을 덥석 받을 수도 없어서 다른 명분으로 열심히 둘러댔다.

-진짜 괜찮아요, 선배. 아까 엄마가 어디 있냐고 전화도 하셨고….

그건 사실이었다. 정우도 뒤늦게 미안하다고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물론 여전히 속이 풀리진 않았지만, 또다시 마음이 약해지긴 했다.

어쨌든 모친은 딸에게도 나름의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당신이 낳은 자식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게 더 그녀를 힘들게 했다. 차라리 티끌만큼의 애정도 없다면 그녀 쪽에서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었을 텐데.

-졸업 때까진 집에 있을게요. 앞으로는 노트북도 비밀번호 꼭 설정해 두고 쓸 테니까 이젠 그런 일 없을 거예요.

-그럼 주말만이라도 여기 있어. 직원들, 주말에는 전부 재택근무하니까 금요일 저녁부터 텅텅 빌 거야. 언제든지 와 있어도 돼.

마지못해 그러겠다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실행하진 않았다. 어쩐지 그가 없는 그의 공간에 혼자 있고 싶진 않았다. 자리로 돌아온 수민의 목소리가 잠시 과거를 더듬던 의식을 다시 끌어올렸다.

“그나저나 정우는? 올해도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4년제로 편입 못했다며. 아휴, 도대체 언제 졸업할 거라니. 약사님 등골 좀 그만 빼먹고 이젠 정신 좀 차려야 할 텐데.”

“내년에는 하겠죠. 못하면 엄마가 지원을 끊겠다고 단단히 선언하셨으니까….”

쌍둥이 오빠의 얘기가 나오자 예서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사실 정우는 모친의 것뿐 아니라 그녀의 등골까지 빼고 있었다.

-예서야. 딱 500달러만. 응? 내가 진짜 한국 가서 꼭 갚을게. 응? 어쩌다 보니까 생활비를 이달에 다 써 버렸는데 허튼 데 쓴 건 절대 아니고, 튜터가 나 내년엔 꼭 편입되게 해 주겠다고 신경을 많이 써줘서 뭘 사 주느라고…. 돈이 남은 줄 알았는데 내가 착각한 거였어.

-튜터에게 대체 뭘 사줬길래. 튜터 비용은 엄마가 따로 보내주시잖아. 혹시… 튜터, 여자야?

-어? 아, 아니야! 남자야, 남자.

여자구나.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보내주지 않겠다, 돈 없다고 딱 잘라 거절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적게나마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오는 걸 민정우도 모를 리 없었다.

-이번만이야. 내 월급에 월세랑 생활비만도 빠듯해. 알잖아.

그러나 결국 그다음 달에도 300달러를 요청해서 보내주었다. 엄마가 보내주는 용돈이 적은 금액은 아닌데도 번번이 그러는 걸 보면, 아무래도 여자친구가 생겼거나 낭비벽이 더 심해진 것 같았다.

-민정우. 이제 더는 안 돼. 엄마에게 말할 거야.

-그럼 딱 100달러만… 응? 이게 정말 마지막이야. 이제 진짜 손 안 벌릴게, 제발!

그게 한 달 전, 11월이었다. 다행히 그 뒤로는 연락이 없었지만 언제 또 우는소리를 할지 몰라 불안했다. 민정우만 생각하면 갑갑하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 끝은 있는 걸까.

졸업을 하고, 자취해서 독립만 하면 완전히 해방되고 제 삶에만 집중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독하게 마음먹으면 그렇게 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다. 하지만 차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 예서야. 엄마가 너 독립하는 데 보증금도 하나 마련 못 해 주고. 어쩌겠니. 정우 때문에 도무지 숨 쉴 구멍이 없으니…. 대신, 엄마가 그거 하나만은 약속할게. 아무리 어려워도 너한테까지 돈 얘긴 안 할 테니까 그것만은 안심해도 돼.

모친의 말이 무색하게, 민정우는 기어이 저에게까지 손을 벌리고 있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그녀도 매달 적자가 날 판이었다. 매번 마음 약해지지 말자, 굳게 마음먹으면서도 민정우가 애원하면 독하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

“아무튼 남친, 지금은 스타트업 매각하고 어디 대기업에 들어갔다고? 전에 그 집도 약국 한다지 않았어?”

수민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한주혁에 대해 물었다.

“네, 저도 그렇게 듣긴 했는데… 언젠가는 큰아버지 회사에 들어가 일을 도와드려야 된다고 한 적도 있었고. 아직 집안 얘기는 자세히 해 주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근데 왜 그렇게 비밀이 많아? 벌써 사귄 지 2년 꽉 채워가는데 좀 수상….”

수민의 눈길이 예서의 등 뒤에서 멈췄다. 키가 전봇대처럼 크고 훤칠한 남자가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찔러넣고 예서의 의자 뒤에 서 있었다.

어딘가 날카로운 시선과 부딪친 짧은 찰나, 수민은 숨을 훅 들이쉬었다. 남자는 누그러진 얼굴로 수민에게 고개를 살짝 까딱해 보이곤 예서의 목덜미로 손을 뻗었다. 긴 머리칼을 부드럽게 휘감는 손은 덩치처럼 꽤 컸지만, 창백할 만큼 하얀 손가락은 길고 예뻤다.

“예서야.”

“…선배?”

예서가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두 눈이 햇빛에 반사된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예서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의 예리함은 씻은 듯 사라지고 온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어, 아직 4시인데…. 저녁 약속까지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아, 수민 언니. 여긴 주혁 선배예요. 선배, 수민 언니. 내가 얘기 많이 했었죠.”

“외근이 일찍 끝나서. 지나다가 창밖에서 보이길래.”

그리고 수민에게 다시 인사를 건넸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방해해서 죄송하고요. 약속 시간 맞춰서 다시 올 테니 편히 얘기 나누세요.”

수민은 찔끔 놀라면서도 마주 웃어 보였다. 왜 이렇게 비밀이 많냐, 수상하다, 설마 그 말을 듣진 않았겠지.

“네, 반가워요. 그리고 음, 예서야. 나도 아까 스터디 모임에서 저녁 약속 있다고 했잖아? 미리 가 있으면 되니까 이만 갈게.”

“네? 언니, 괜찮아요. 저랑 마저 얘기하고 5시에 가세요!”

“아냐. 우린 다음에 또 보면 되지. 아, 이거 크리스마스 선물 진짜 잘 먹을게! 설에 우리 엄마 반찬 보내줄 테니까 자취방 냉장고 꼭 비워두고. 알았지?”

수민은 눈치 빠르게 옷가지며 가방을 후다닥 집어 들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전철역까지 가시면 태워다 드릴까요?”

“아, 아뇨. 괜찮아요. 버스 있어요. 예서야, 그럼 연락할게!”

그냥 해 본 말인지, 진심인지는 몰라도 이쯤에서 빨리 사라져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녀가 이만 가보겠다고 일어났을 때 은근히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착각인가?

수민은 카페 밖에서 언니, 잘 가요! 소리치는 예서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곤 버스 정류장을 향해 총총 걸었다. 그린 듯 수려하던 남자의 잔상이 뇌리에 콕 박혀 있었다.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네.

스물여섯이면 서른 중반인 그녀에겐 막냇동생뻘인데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으니. 하지만 외모와는 별개로, 편안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남자는 한 공간에 있기만 해도 숨이 막힐 것 같은 유형이었다.

한 마디로 기가 겁나 센 타입인 거지. 타고난 카리스마, 위압감, 무언의 압박 등 여러 가지 수식어로 표현될 순 있겠지만.

“하. 진짜 눈 돌아가게 잘생기긴 했는데… 돈도 많은 듯하고 능력 있고 귀티에 부티 나는 게 집안도 꽤 좋을 같긴 한데. 참 이상하단 말이지.”

수민은 마침 도착한 버스에 올라타 앉았다. 잠시 정차한 사이 창 너머로 방금까지 예서와 있었던 카페 입구가 보였다.

왜 이렇게 싸하지? 느낌이 너무 어두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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