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정신이 들어 보니 벌써 8시가 넘어 있었다.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쫄쫄 굶었는데도 배에서는 아무 감각이 없었다.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동시에, 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 집엔 내가 있을 곳이 없어….
-너, 그럴 거면 썩 나가! 너만 없으면 정우랑 나랑 둘이 아무 문제 없는데 꼭 네가 문제야!
모친의 말이 맞았다. 그녀와 민정우 사이에는 늘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무조건적으로 품고 기꺼이 희생하는 관계에서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을까?
그 집에 그녀만 없으면, 엄마와 쌍둥이 오빠 둘이서 언제까지고 행복할 것 같았다. 그녀는 완벽한 모자(母子) 사이에 눈치 없이 낀 천덕꾸러기이자, 매끄럽게 맞물린 가구의 모서리 위로 툭 튀어나온 못 같은 존재니까.
이제는 정말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한주혁의 주장대로 정말로 독립이라도 감행해야 할까. 그럼 조금은 행복해질까.
그녀도 가족이고 자식인 만큼, 언젠가는 그 자체로 인정하고 사랑해 줄 거란 희망과 기대 따위 완전히 내려놓고 홀로 내 갈 길을 간다면. 처음부터 고아였던 것처럼.
예서는 먹먹한 가슴을 억누르고 오늘 밤 어디 가야 할지 다시 고심해 보았다. 다시 채린이 집에라도 가서 신세를 져야 하나, 어디 찜질방에라도 가 있을까 고민하던 중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혹시 선배? 재빨리 휴대폰을 확인해 보았다.
[누나, 잘 지내? 엄마가 요즘 연락이 뜸했다고 문자 한번 넣어 보래서. 지금 여긴 새벽 6신데 요즘 새벽 알바 시작했어. 별일 없지?]
LA에 있는 고모네, 경현이었다. 반가움에 가슴이 찡했다. 눈가에 열기가 다시 몰리기 시작했다.
[응. 별일 없어. 연락해줘서 고마워. 고모랑 고모부께도 안부 전해드리고 주말에 전화 드리겠다고 말씀드려줘.]
몇 번 문자가 오간 뒤 예서는 카페에서 일어났다. 근처의 24시간 여성 전용 찜질방으로 향할 때 전화가 걸려 왔다. 무심코 화면을 들여다본 예서의 두 눈이 커졌다.
잘못 본 게 아닌지, 여러 번 손등으로 문지르는 눈가가 다시 시큰해졌다.
***
인천공항은 늦은 시간에도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박성준과 일등석 라운지로 향하는 동안, 완전히 방전되어 꺼져 버린 휴대폰이 생각났다.
“아, 졸리다. 타자마자 바로 자야지. 근데 오늘 예서, 배웅 안 나오냐? 종강했잖아.”
“여기까지 오라 가라 할 순 없지. 종강 끝나도 바쁜 애를.”
주혁은 휴대폰에 보조 배터리를 연결하며 노트북으로 메시지에 접속했다. 박성준이 계정에 로그인하는 그에게 음료를 건네주었다.
“야, 그래도 오늘 잠깐이라도 못 보면 앞으로 최소 3주는 못 보잖아. 이번에 미국 가는 거 때문에 휴가 다 몰아 쓰고 당분간 주말도 정신없을 거라며.”
“…….”
“난 아무리 생각해도 너 새끼가 이해가 안 간다. 그렇게 좋아하면서 왜 그렇게 몸 사리고 자제하고 그러냐?”
“너처럼 단순한 새끼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겠지. 이해하려고 애쓰지도 마.”
그는 냉소적으로 픽, 웃으며 그 새 날아온 수백 개의 메시지를 훑어보았다. 눈으로 업무상 필요한 부분은 빠르게 입력하는 동안 입술이 저절로 달싹였다.
“너무 소중해서 잃을 수 없으니까 거리 두는 그 마음을… 네가 어떻게 알겠어.”
“응? 뭐라고?”
주혁은 대답 없이 커서를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시선이 메시지 중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선배. 지금쯤 미국에 있을 텐데 이런 문자 보내서 정말 미안해요. 실은 오전에 제 노트북이 랜섬웨어 해킹을 당해서 중요한 파일이 다 암호화돼 버렸어요. 하루 종일 복구업체도 다니고 컴공과 선배들에게도 도움을 청해봤는데 방법이 없네요. 혹시나 해서… 정말 중요한 자료들이 있어서 마지막으로 선배에게도 조언을 구해봐요.]
“성준아, 전화 좀 줘 봐.”
“어? 잠깐만.”
“아니, 됐어. 5% 충전됐으니까.”
주혁은 보조 배터리에 휴대폰을 연결한 채 곧바로 민예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래지 않아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배? 지금 미국이에요?
“지금 어디야?”
-지금요? 학교 정문 앞 카페에 있다가 이제 찜질방 가려고요….
“찜질방은 왜.”
대답은 한참 후에 돌아왔다. 희미한 숨소리에 심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울지 않으려고, 감정을 토해내지 않으려고 이 악물고 입술을 앙다무는 얼굴이 눈에 선했다. 분노가 치밀면서도 기묘한 쾌감이 가슴을 뻐근하게 채워왔다.
-정우가 노트북을 그렇게 만들었는데 엄마가….
그 비틀린 모순과 양가적인 감정을 모른 채, 예서는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집에 가기 싫어요. 나만 없어지면 아무 문제 없으니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갈라지는 목소리, 떨리는 숨결은 담담했던 문자와는 사뭇 달랐다. 민예서는 애써 숨을 고르며 다시 화제를 돌렸다.
-해커가 어느 사이트에 들어가서 비트코인 오백만 원을 결제하라고 해서… 이메일로 잠깐 기다려달라고 하려다가 일단 그대로 뒀어요. 선배에게 먼저 얘기하기까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잘했어. 돈을 줘도 순순히 돌려주지 않는 악질적인 놈들이 많으니까 섣불리 응해선 안 돼. 그럼 노트북은? 지금 가지고 있어?”
-네.
“그럼 찜질방에 가지 말고 내 오피스텔에 가 있어. 택시 타고 바로.”
-네? 하지만 선배, 지금 미국에 있는… 아, 공항에 있네요. 그렇죠?
때마침 탑승을 재촉하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혁은 휴대폰을 어깨와 턱 사이에 끼우고 가방을 챙기며 덧붙였다.
“응. 팀에 화이트 해커가 있으니까 바로 오피스텔로 호출해서 봐 달라고 할게.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아무리 빨라도 한 시간쯤 걸릴 거야.”
-아… 알겠어요, 선배.
“일단 끊을게.”
주혁은 통화를 끊자마자 기내용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성준이 뭔가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통보를 날렸다.
“미국 못 갈 것 같다. 미안. 수하물 가방은 네가 좀 챙겨줘, 여기.”
“뭐? 예서에게 무슨 일 생겼어? 해킹당했대?”
성준은 위탁수하물 택을 받아 들면서도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아니 야! 방금 오피스텔에 직원 보내주기로 했잖아, 그런데 네가 왜 가!”
“급한 회사 일이 막 생각났어. 어차피 옷하고 신발밖에 없으니까 버려도 되고, 뒤져보고 맘에 드는 거 있으면 다 가져.”
“진짜? 야, 그럼 네 하객 정장 그거 내가 입을래. 무려 브리오니잖아.”
“안 맞을 텐데. 맘대로 해.”
“농담이고, 늦게라도 올 거지? 어르신들이 난리 치실 텐데 아직 이틀 남았으니까 빨리 해결해 주고 와! 어?”
성준이 등 뒤에 대고 계속 뭐라고 소리쳤지만 그는 이미 라운지를 벗어난 뒤였다. 이렇게 된 이상 늦게라도 미국에 갈 생각은 없었다.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부대에 알리고 규율에 맡기면 되겠지. 문자를 본 순간, 민예서에게 가면 안 된다고 되뇌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감정에 휘둘리면 안 돼. 연애를 최우선으로 하지 않겠다고 예서에게도 늘 강조해왔잖아.
냉정하게 생각해야 된다고 이를 악물었지만 결국 감정이 이성을 누르고야 말았다. 결정적인 순간, 늘 철저히 을이 되어 버리는 현실이 한심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
텅 빈 복층 오피스텔은 적막했다. 예서는 1층 소파에 앉아서 한주혁의 직원을 잠자코 기다렸다.
혹시 몰라 휴대폰을 5분 간격으로 들여다봤지만 새로운 연락은 없었다. 과외 중인 자매도 마침 어제부터 휴가로 가족 여행을 떠나서 다행이었다. 한순간에 날아간 5십만 자 원고 외에는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선배가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연락이 닿아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리고 너무도 고마웠다. 공항에서까지 연락을 해서 직원을 보내주기까지 한다니 고맙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컥, 눈물부터 터져 나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어쩌면 선배와 헤어지는 게 최선일지 모른다며, 그와의 관계 자체를 회의적으로 생각했던 게 거짓말 같았다.
하지만 석연찮은 느낌은 그대로였다. 두 사람의 관계와 미래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일단 선배가 미국에서 돌아온 뒤 얼굴을 마주 보고 얘기해야 하리라.
정확히 한 시간 10분이 지났을 때 현관 패드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화이트 해커라는 직원이 온 모양이었다.
예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오래 기다렸어?”
“선배…?”
한주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새 좀 야위어 턱선에 더 날이 서 보였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입영 전의 그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았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그 화이트 해커 직원은요?”
“나야, 그 화이트 해커.”
그가 여상하게 말하며 기내용 가방으로 보이는 백을 현관 앞에 내려놓았다.
“원래 그걸로 시작했어, 고등학생 때부터. 아무튼 노트북부터 보자.”
“서, 설마. 비행기 안 타고 온 거예요? 미국 안 가고?”
“응.”
“친척분 결혼식에 꼭 참석해야 된다고 했잖아요. 어르신들이 꼭 와야 된다고 신신당부하셨고 다른 중요한 가족 행사도 있다고….”
“괜찮아.”
그는 눈 깜짝할 새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네가 더 훨씬 중요해.”
그녀를 끌어당기는 손길도 예전처럼 부드러웠다. 익숙한 숲 향기가 훅 다가왔다. 다음 순간 예서는 그의 품속 깊이 있었다. 한주혁은 그녀를 꼭 안은 채 덧붙였다.
“많이 속상했지?”
정수리에 울리는 저음에 예서는 더 버티지 못했다. 그녀는 한주혁의 품에서 한참을 엉엉,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형용할 수 없는 안도감과 감동이 물밀듯 밀려와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난 역시 선배를 좋아해…. 아니, 사랑해.
역시 그를 포기할 순 없었다.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미워도 하고, 야속하고 미우면서도 결국은 놓을 수 없는 단 한 사람.
결국 이렇게 와 주었잖아.
죽을 만큼 힘들고 막막한 지금. 아무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고, 누구도 날 소중히 봐주지 않는 현실로 기꺼이 와주었다. 늘 연애가 최우선이 될 수 없다, 못을 박았는데도 불구하고 결국은 다른 어떤 것보다 그녀를 우선순위로 여기고 공항에서 달려온 것이다.
“선배… 고마워요.”
감사의 표현은 다시 눈물 속에 묻혀 버렸다. 한주혁은 그렇게 다시 그녀의 유일함이 되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며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그를 향한 제 마음만은 무엇보다 확고했다.
이내 하나로 녹아드는 입술과 온기, 혀가 얽혀드는 감각 속에서 그 확신은 보다 굳건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