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답은 하루 뒤에 도착했다.
[나중에 얘기하자. 내일부터 며칠 미국에 가 있을 예정이야. 사촌 누나 결혼식이 있어.]
아, 맞아. 전에 국외 거주 친족의 경조사를 사유로 국외여행을 신청하고 허가도 받아놓을 거라 했었지. 그게 다음 주였나.
[네, 선배.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답문을 보내자마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일단 답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한 한편, 한참 늦은 답문에 싸늘한 불안이 밀려왔다.
혹시 헤어지자고 하는 건… 그러고 싶은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설마.
어떻게 기말고사를 마무리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장학금을 놓치면 안 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는지, 다행히 망친 건 없었다. 그동안 심신이 극도로 긴장한 탓일까, 종강일에 다시 쓰러져 하루를 꼬박 앓기도 했다.
거실에서 하루 종일 시끄럽게 울려대는 음악과 게임, TV 소리 때문에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어제부터 쌍둥이 오빠 정우가 와 있었다.
-예서야. 저번처럼 정우에게 방 좀 내주고 넌 엄마랑 안방 좀 쓰자. 응? 정우, 외국에서 혼자 외롭게 고생하는데 방학 동안 편하게 쉬다 가게. 엄마는 밤에 잠만 자니까 낮에는 너 혼자 자유롭게 써도 되잖니.
방까지 내줬는데… 뭐가 됐든 방에서 문 닫고 하면 될걸.
예서는 골까지 울리는 머리를 감싸 쥐고 부스스 일어나 몇 번이나 한숨을 뱉어냈다. 소리 좀 줄이라고 여러 번 얘기했지만 소용없었다.
“하아… 정말 독립하고 싶다.”
-그냥 집에서 나와. 내가 우리 오피스텔에 공실 알아볼게. 돈 걱정은 하지 말고.
-네? …아니에요. 괜찮아요, 선배.
지난겨울, 모친과 한밤중에 언성을 높이고 집을 뛰쳐나왔을 때 그가 달려와서 말했다. 그냥 해 보는 말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쨌거나 선배의 신세를 지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서 무마시켰었다.
다시 쾅, 쾅, 울리는 음악 소리에 골이 지끈거렸다. 예서는 이불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쓰고 소설 생각을 하려 애썼다. 하지만 이번에도 의식의 흐름은 여지없이 한주혁에게 흘러가 그와의 기억 한가운데 고였다.
-선배는 어떤 책 재밌게 읽었어요? 좋아하는 작가는요?
그의 입영 전, 오피스텔 침대 위에서 마주 보고 누워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글쎄. 가장 최근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공정하다는 착각>, 존 D. 록펠러의 경제서들도 재밌게 읽었고… 특별히 좋아하는 저자는 없어.
-소설 쪽은요? 혹시… 판타지 문학도 좋아해요?
-전혀. 소설은 원래 안 읽어.
뜻밖의 대답에 말문이 막혔던 기억이 났다. 실은 내년에 있을 웹소설 공모전에 참가할 판타지 소설을 쓰고 있다, 털어놓으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판타지 같은 건 더더욱. 영화는 킬링타임으로 보는 편이지만 읽는 건 시간 낭비 같아서. 장르 문학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뜬구름 잡는 픽션은 내 취향과 거리가 멀어.
-아… 그렇군요.
시선이 저절로 침대 맞은편, 온갖 인문서와 경제 관련 서적들로 빽빽하게 들어찬 그의 책장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저 많은 책 중에 소설은 없었다. 심지어 고전문학조차도 없었다.
내심 낙담했었다. 가족도, 친구들도 모르는 꿈에 대해 그에게만은 털어놓고 응원도 받고 싶었는데. 읽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로 여긴다니 더는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끙끙 앓는 동안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묵직한 서글픔이 북받쳐 올라와 심장을 더 세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소리죽여 끅끅, 우는 동안 방에 둔 노트북이 떠올랐다. 민정우가 혹 건드리기 전에 가져와야 한다는 경각심이 들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괜찮겠지…. 가족 공용 PC가 거실에 있으니까 그걸 쓰진 않을 거야.
나중에 가져와야지 되새기며 다시 눈을 감았다. 다행히 소음은 더 들려오지 않았다. 뭔가 다른 것에 몰두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한주혁이 미웠다. 만나자마자 달려들어 몸만 취하고 저 좋을 대로만 대하는데도, 그에 대해 지적하자 오히려 그녀가 예민한 것처럼 느끼게끔 했다. 그뿐인가, 이래라저래라 지적하고 선을 넘으면 언제든 헤어지겠다는 명료한 언질까지 던졌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기어이 굽히고 낮춰서 사과를 했는데도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인 줄 알았다. 좋아하게 되기 전의 차디찬 모습은 단지 겉으로만 풍기는 분위기인 줄만 알았는데. 어쩌면 그 첫인상이 한주혁의 실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는 나를 정말 좋아할까? 나는 왜 그런 사람을 좋아하게 됐을까. 모르겠어, 이대로 계속하는 게 맞는 건지….
무의식 너머에서도 영원히 풀리지 않을 미궁 속을 헤매는 막막함이 일었다. 막막함은 이내 가장 고통스럽고 두려운 결말로 치달았다.
결국 선배와 헤어지는 게 맞는 걸까.
***
노트북을 방에 그대로 두지 않았어야 했다. 그게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였음을 깨달은 건 민정우가 전날 밤, 노트북을 랜섬웨어 바이러스에 감염시켜 파일을 모두 날려 버린 뒤였다.
황급히 노트북을 들고 인근 수리센터에 갔지만 소설 파일을 복구할 방법은 없었다. 틈틈이 저장해둔 USB를 잃어버려 마침 무료 클라우드 서비스를 알아보던 차에 민정우가 일을 저질러 버린 것이다. 원격조정 전문 복구업체의 답변도 절망적이었다.
-이미 중요 데이터의 확장자가 변형되어 노트북에 있던 문서와 파일이 암호화가 된 상태입니다. 일단 암호화가 된 파일은 암호 키가 있어야 복구가 가능하거든요. 임시파일 형태로 흔적이 남은 파일은 복구가 가능한 경우도 있지만 고객님의 자료는 안타깝게도 복구가 어려운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결국 선택지는 둘뿐이었다. 자료를 다 날리고 포맷을 하든가, 랜섬웨어 해커가 요구하는 5백만 원을 주든가. 하지만 그만한 거금이 있을 리 만무했다. 더 큰 문제는 해커가 암호화 키를 넘겨준다고 해도 백 퍼센트 복구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는 복구업체의 의견이었다.
“미쳤어, 정말! 거실에 데스크탑 있는데 왜 내 노트북을 써! 허락도 없이!”
“그건 오래돼서 게임을 할 수가 없잖아. 느려터져서 네 걸로 잠깐만 하려고 했는데…. 뭘 자꾸 다운받으라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눌렀는데 그렇게 될 줄 알았겠냐. 진짜 미안하다.”
민정우는 사과를 거듭하다 나중에는 아, 어쩌라고! 네가 진작 백업해놨으면 됐을 거 아냐! 하고 벌컥 화를 냈다. 모친도 아들의 점심을 챙겨주러 때마침 약국에서 돌아와 자초지종을 듣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아니, 학기 중도 아니고 중요한 과제나 공부 관련된 거는 다 저장을 해뒀다며. 그럼 된 거 아냐? 그 소설인지 뭔지는 처음부터 다시 쓰면 되지.”
“대학 합격한 날부터 쓰기 시작해서 지난 2년 반 넘게 써온 거예요. 50만 자가 넘는데, 그걸 처음부터 다시 쓰라니…. 흑….”
그리고 모친에게 5백만 원을 빌려줄 수 없겠냐고 청했다. 나중에 졸업해서 꼭 갚겠다고 사정했지만 이 약사는 어이가 없는지 딸의 애원을 뿌리쳤다.
“뭐? 5백만 원? 5십만 원도 아니고. 그까짓 허무맹랑한 얘기 살리겠다고 생돈 5백만 원을 달라니, 참 내. 그 돈이면 정우 두 달 치 월세랑 생활비야.”
“미쳤네, 미쳤어. 소설은 무슨, 어디서 개 씹 헛소리. 웹소 공모전은 또 뭐야.”
방문 너머에서 조용히 혀를 차는 정우의 속삭임에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정신이 들었을 땐 그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쥔 채 마구 흔들고 있었다.
“민정우, 너… 함부로 말하지 마! 네가 뭘 안다고…!”
“하, 씨발. 너 지금 내 멱살 잡았냐? 어? 이 개 같은 년이 어디서….”
한참을 서로 드잡이가 이어졌다. 싸움을 말린 건 모친이었다. 이 약사는 예서의 뒤통수를 끄집어당겨 아들에게서 떼어놓고 빽 소리를 질렀다.
“오빠한테 무슨 짓이야! 아, 진짜 못 살겠네! 너 그럴 거면 썩 나가!”
이경은은 눈을 부라리며 예서를 향해 삿대질을 해댔다.
“너만 없으면 정우랑 나랑 둘이 아무 문제 없는데 꼭 네가 문제야!”
“엄마, 나 여기 피 나.”
민정우는 한술 더 떠 훌쩍대며 턱에 생긴 손톱자국을 가리켜 보였다. 모친이 혀를 차며 아들의 턱을 매만지다 다시 딸에게 고개를 팩 돌렸다.
“그러게, 정우 말대로 네가 처음부터 저장을 잘 해뒀으면 그럴 일도 없었잖아! 노트북이 네 거였니? 내 돈으로 사준 거 아냐, 처음부터. 이미 날아간 거 그냥 포기하고 다시 차근차근 시작해! 다들 그렇게 살지, 어느 집 개 이름도 아니고 무슨 몇백만 원을 해커에게 준다는 거야?”
“노트북, 제 돈으로 산 거였어요.”
예서가 쥐어뜯겨 산발이 된 채 모친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정확히는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던 민정우를 본 것이었지만 그는 금세 안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제가 알바로 벌어서 중고 카페에서 산 거였다고요. 엄마는 기억도 못 하시겠지만.”
“그래서? 그동안 너 어디서 먹고 자고 살았어? 정우가 미국에서 혼자 고생하는 동안 넌 이 집에서 편안하게 잘살고 있었잖아!”
모친은 열이 뻗치는지 언성을 더 높였다.
“너, 정우한테 그럴 거면 그냥 나가! 이 집에서 나가라고!”
“…네, 그럴게요.”
예서가 가쁜 숨을 들이쉬며 옷이며 휴대폰을 챙겨 들었다. 이미 무용지물이 된 노트북도 가방 안에 집어넣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왔다.
모친과 쌍둥이 오빠에 대한 분노도 분노였지만, 어떻게든 파일을 복구시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더 강했다. 다른 건 몰라도 소설 원고만은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설정집 자료와 파일은 과제용 USB에 따로 저장해두었지만 그 많은 원고를 단 한 장도 살릴 수 없다니 미칠 것 같았다.
점심도 굶은 채 복구센터를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친구들에게도 상의해봤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예서는 지친 몸을 이끌고 학교 앞 카페에 주저앉았다. 혹시 몰라, 컴퓨터공학과 선배들이 봐주겠다는 제안에 한달음에 달려왔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할 무렵, 학교 앞 카페 구석에 앉았을 때야 한주혁이 떠올랐다. 예서는 허둥지둥 가방을 꺼내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미국에 간다고 했었지. 진작 떠나고 없을 것 같았다.
바보. 멍청이. 왜 이제야 생각났을까. 보안 관련 스타트업을 하니까 어쩌면 선배가 뭔가 방법을 알지도 모르는데….
눈물이 왈칵 솟구치며 자책한 것도 잠시, 예서는 고개를 저었다. 전문가들도 안 된다고 한 걸, 선배라고 달리 대책이 있을 리 만무하다. 고작해야 해커에게 전자화폐로 넘겨줄 수 있을 돈을 빌리는 게 최선 아닐까.
그래. 5백만 원.
침침하게 젖어 있던 눈이 비로소 반짝였다. 몇 시간 만에 처음으로 안색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선배라면 빌려주지 않을까. 절대 떼먹지 않고 갚을 거니까. 이자까지 쳐서.
예서는 휴대폰을 쥐고 머뭇거리다 전화를 걸어 보았다. 이미 비행 중인지 폰 너머로는 지금은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기계음만 흘러나왔다. 예서는 굴하지 않고 문자를 보냈다. 어찌 됐든 현지에 도착하면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선배. 지금쯤 미국에 있을 텐데 이런 문자 보내서 정말 미안해요.]
자초지종을 간략히 설명하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이메일 계정을 열어 보았다. 서툰 영어로, 복호화 대가로 돈을 요구한 해커에게 며칠만 기다려달라고 답장을 보내려다가 그만두었다.
휴대폰으로 메일을 주고받다가 폰도 해킹이 되어 버릴까 봐 겁이 났다. 일단 한주혁이 뭐라고 답을 해 줄 때까지 기다려 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