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선배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저도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하룻밤이라도 같이 있는 건데 뭐가 문제냐고 한다면, 우리 둘… 선배와 제 연애 가치관이 너무 다르고…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결론 같아요.”
“…….”
“말 나온 김에 연락 문제도 솔직히 얘기할게요. 아무리 바빠도… 선배가 너무 무심하다고 쭉 생각해 왔어요. 제가 느낀 게 그러니까… 달리 어떻게 돌려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테이블 위로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조금 전보다 더 길고 무거운 침묵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활기찬 재즈풍 음악, 저만치서 맴도는 카페 손님들의 쾌활한 웃음소리와 완전히 유리되어 그들만의 공간에 갇힌 착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한주혁이 마침내 운을 뗐다. 나른한 동시에 조금 날이 서 보였다. 예서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한쪽 눈두덩을 문지르고 꾹꾹 누르는 몸짓에는 별 동요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묻어나 있었다.
-헤어지고 싶어?
예전에 갑작스러운 입영 통보에 예서가 서운함을 드러냈을 때 그가 던진 말이 떠올랐다.
-여기서 멈추고 싶은지 네 의향을 묻는 거야. 나는 헤어지고 싶지 않아.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그에 따를 생각이야.
입영보다 그 말이 더 충격이었다. 결국 그가 입대를 며칠 앞두고 먼저 찾아와서 화해를 하긴 했지만, 당시 받았던 상처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기시감에, 애써 차분하게 되물었다.
“선배는요? 선배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
헤어지고 싶나요? 저번처럼 똑같이 말할 건가요?
그 무언의 물음을 들었는지 한주혁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테이블 아래 맞잡은 손에서 땀이 끈적거렸다.
그가 정말 원하는 게 뭘까. 만에 하나, 정말로 애정이 식고 그녀에게 질린 거라면. 그래서 제 입에서 먼저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길 바라는 거라면….
“난 늘 똑같아.”
그가 억양 없이 말을 이었다.
“연애 가치관이 같든 다르든, 잘 맞든 맞지 않든 나는 마지막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단 한 번도. 늘 끝을 암시하는 분위기를 내비치는 건 너고.”
“선배, 그건….”
“그래서 이제 내 쪽에서도 단서를 달까 해.”
“…….”
“누가 됐든, 우리 둘 중 하나가 끝내고 싶을 때 순순히 놓아주기로 하자.”
테이블 아래, 맞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한순간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두 눈이 맞은편의 한주혁만 멀거니 보고 있었다.
“우리는 연애를 하는 거고, 연애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종속되어야 하는 족쇄 따위가 아니잖아. 둘 다 각자의 삶이 있고, 이건 처음부터 확실히 강조한 거지만 늘 연애가 우선순위가 될 순 없어. 현실적으로 그게 맞아. 적어도 나는 그래.”
예서는 저도 모르게 잠시 떨어졌던 손을 다시 맞잡았다. 체기가 있는 것처럼 손끝이 냉하고 무뎠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건 하나야. 간단해. 피곤한 감정 소모, 간섭, 네 뜻대로 날 바꾸려 들거나 맞춰주길 원하는 거- 이것만 삼가고 선을 넘지 않으면 너랑 계속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그 이상은 나도 장담할 수 없어.”
가슴 어딘가에 금이 가는 느낌에 멍하니 있었다. 시선이 그의 어깨 너머, 벽지 무늬에 망연자실 박혀 있었다.
“선을… 넘지 말라고요?”
간신히 입을 열었을 땐 입 안이 성대까지 바짝 말라 있었다.
“서운하게 들려도 어쩔 수 없어. 앞으로도 생길 수 있는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차원에서 미리 못 박아두는 거고, 다른 의미는 없어.”
예서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왜 갑자기 이렇게까지 멀리 간 거지?
제가 뭘 잘못 말한 건지, 처음부터 차근차근 돌이켜 보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시간관념조차 흐릿해질 무렵, 그가 마침내 정적을 깼다.
“일단 저녁부터 먹자. 이왕 나왔으니까 네가 말한 대로.”
“아뇨….”
예서가 찻잔 위로 떨궜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서 혀가 저절로 움직이는 듯했다.
“오늘은…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요. 미안해요, 선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와 마주 보고 밥을 먹으며 평소처럼 얘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헤어질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아니, 헤어질 수가 없었다. 죽어도 그건 못 할 것 같았다.
“갈게요, 선배.”
“그래, 그렇게 해.”
그가 선선히 자리에서 일어나 등받이에 걸쳐둔 재킷을 집어 들었다.
“마음 정리되면 연락해.”
일말의 주저함도, 당황스러움도 없어 보였다. 그녀를 붙잡아 달래거나 좀 더 얘기를 해 보려는 의도도 일절 엿보이지 않았다.
한주혁은 트레이를 리턴 테이블에 반납하고 돌아서서 곧장 출구로 향했다. 그리고 그대로 오피스텔 층으로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향해 멀어졌다. 단 한 번도 그녀 쪽을 뒤돌아보지 않았다.
예서는 그가 사라진 건물 정문을 한참 바라보다 천천히 돌아섰다. 조금 전 금이 갔던 가슴이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발아래가 무너지는 감각에 몇 번이나 걸음을 멈췄다.
줄줄 흐르는 눈물을 깨달은 건, 맞은편 행인의 깜짝 놀란 시선과 마주쳤을 때였다.
***
며칠이 흘렀다. 그렇게 주말은 지나갔고, 다시 시작된 일상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예상대로 흘러갔다. 그녀가 때아닌 몸살로 끙끙 앓느라 주말을 온통 방에서만 보냈다는 게 유일한 변수였다.
한주혁은 주말 내내 감감무소식이었다. 심지어 부대로 돌아간다는 말도, 복귀했다는 알림도 없었다. 최악의 상상을 무수히 해 보기도 했다.
만약 내가 이대로 쭉, 아무 말이 없다면. 연락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래서 죽을힘을 다해 일주일을 버텼다. 기말고사 준비와 과외, 약국 일과 틈틈이 소설 설정집을 정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게 오히려 감사할 지경이었다.
닷새 내내 조금도 틈이 생기지 않게끔 스스로를 더 몰아치고 바쁘게 밀어붙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슴이 먹먹하다 못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순간들을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금요일이 돌아오고, 토요일로 넘어가고, 일요일 오후가 되기까지 그에게선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분노의 감정만이 밀어닥쳤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렇게 못을 박고, 뒤 한 번 돌아보는 일 없이 가 버리더니 늘 하던 연락도 뚝 끊어 버리고.
분노는 이내 극심한 우려와 의혹으로 바뀌었다. 선배가 정말 마음이 떠난 건 아닐까. 말은 헤어질 생각이 없다고 했지만 이대로 헤어져도 상관없는 건 아닌지.
결국 일요일 오전에 문자를 보냈다. 자존심보다 바닥 모를 불안이 훨씬 더 강했다.
[선배. 미안해요. 선배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앞으로는 제가 조심할게요.]
셀 수 없이 쓰고 지웠던 말들은 일주일 뒤, 결국 짧은 두 줄로 집약되어 그에게 날아갔다. 누군가는 그녀를 배알도 없는 멍청이라고 욕할 터였다.
하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더 좋아해서 더 아쉬운 쪽이란 자괴감보다, 그를 잃을까 봐 두려운 마음이 훨씬 더 컸다. 거의 공포에 가까운 초조함이었다.
몇 시간을 기다렸지만 답장은 없었다. 확인은 했지만 답이 없다는 사실이 불안을 더 부추겼다. 예서는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급히 전철역으로 향했다. 오피스텔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그가 통상 귀대로 출발하는 시간이 두 시간 정도 남았을 때였다.
정문 앞에서 전화를 걸어봤지만 신호만 갈 뿐 연결되진 않았다. 정문으로 들어서서 중문 벽의 세대 호출 버튼을 눌렀지만 답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예서는 잠시 망설이다 데스크의 보안직원에게 다가가 인터폰을 해달라고 요청해 보았다.
“22층 그 젊은 사장 말이죠? 배우같이 아주 훤칠하고. 근데 집에 없어요. 아까 부대 들어간다고 나가던데.”
“네? 혹시 언제쯤 갔나요?”
“글쎄, 한 40분? 50분? 한참 됐구만.”
“아… 네.”
“조금만 빨리 오시지. 아직 멀리는 안 갔을 테니 한 번 연락해 봐요.”
초로의 직원은 친절하게 덧붙이곤 업무 컴퓨터 쪽으로 돌아섰다.
“네, 감사합니다…!”
예서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곤 건물 밖으로 나왔다. 다시 전화를 해 봤지만 여전히 신호만 갈 뿐 응답이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문자도 다시 보냈다.
[선배. 지금 오피스텔 앞인데 경비 아저씨께서 선배가 30분 전에 나갔다고 알려주셨어요. 아직 서울이에요?]
한참을 기다렸지만 답은 없었다. 이번에는 읽은 표시도 뜨지 않았다.
[혹시 되돌아오기 어려우면 주중에 에스코트 가면 안 될까요? 화요일 오후 수업 종강이거든요.]
평일 일과 후에는 통상 밤 9시까지 부대 밖 외출이 허용됐기에 적어도 두세 시간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메시지를 읽지 않은 상태 그대로였다. 눈물이 다시 치밀어올랐다.
선배, 혹시 화 많이 났어요? 내가 그렇게 말해서… 떼쓰고 징징거려서 질린 거예요?
다시 문자를 쓰려고 했지만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이대로 선배가 날 버린 거면 어떡하지, 내겐 선배밖에 없는데…. 이렇게 좋아하는데. 선배가 아니면, 날 봐 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극도의 불안감과 절망에 길 한가운데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가까스로 정신이 들었을 때는 지하철 역사의 구석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뒤늦은 후회감에 목이 메었다. 결국 이렇게 된 게 오롯이 제 잘못 같았다.
그런 말, 하지 말 걸. 왜 그런 투정을 부려서…. 그저 하룻밤 내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만족했어야 했다. 너무 좋아한 나머지 과욕을 부린 대가가 이렇게 혹독할 줄은.
어느새 눈앞의 상황은 무의식 속에서 가장 두려워했던 결론으로 치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