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그는 한참 뒤에나 움직임을 멈췄다. 예서의 이마며 눈두덩, 젖은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고 진득하게 입술을 빨면서 숨을 고르던 것도 잠시, 두 손이 골반을 들어 올렸다.
허리가 위로 들리며 발목이 단단한 어깨뼈 위에 닿았다. 흑, 밭은 신음을 내보내는 순간 음경이 다시 짓치고 들어왔다. 순식간에 안까지 들어차는 압박에 예서의 숨이 가빠졌다.
“잠깐, 잠깐만…! 좀 천천히요, 선배….”
그는 대답 대신 위로 들린 무릎 안쪽에 쪽, 입을 맞췄다. 그 반동에 선단이 경부 앞까지 훅 찔러 들며 새된 비명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읏, 선, 너무 깊…! 아아!”
소파가 정신없이 삐걱거렸다. 철벅대는 소리에 장단을 맞추듯 끼익, 끽 소리를 내던 가구가 점점 더 거칠게 흔들리며 바닥을 긁어댔다. 절정이 가까울수록 예서의 울음을 머금은 소음도 더 커지고 있었다.
“예서… 흣…!”
사정은 느리고도 격렬했다. 그는 죄다 쏟아놓고도 예서를 꼭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다 축 늘어진 알몸은 막 토해낸 체액으로 얼룩져 있었다.
***
그날 밤, 몇 번의 정사를 거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동틀 무렵 간신히 눈을 떴을 때 예서는 침대 위에 홀로 있었다.
“선배…?”
예서는 찐득거리는 알몸을 간신히 일으켜 침대 아래 발을 디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뻐근하니 동통이 일었고, 전신의 근육이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리고 있었다. 얼마나 신음을 흘리고 비명을 질렀는지 침을 넘기는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선배, 어디 있어요….”
한주혁은 1층에도 없었다. 휴대폰을 집어 들자 몇 시간 전 도착한 문자가 보였다.
[미안.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겠어. 집에 일이 생겨서 주말 내내 바쁠 것 같아. 카드 놓고 왔으니까 그걸로 뭐라도 시켜 먹고 편하게 있다가 가.]
집에 일이 생겼다고?
혹 안 좋은 일인가, 걱정되는 마음이 앞섰다. 예서는 휴대폰을 황급히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 문자를 보냈다. 통화를 하고 싶었지만 바쁠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
[선배. 무슨 안 좋은 일 생긴 건 아니죠? 혹시 누가 편찮으시기라도 한 거예요?]
답은 금세 돌아왔다.
[아냐. 큰아버지 회사 보안에 문제가 생겨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일단 건강 문제는 아니니 다행이었다.
[선배. 무슨 그럼 내일도 못 보는 거예요?]
이어 문자를 보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읽은 표시도 뜨지 않았다. 예서는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 테이블로 향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끙끙 앓는 신음이 절로 나왔다.
테이블 위에는 카드가 달랑 놓여 있었다. 텅 빈 오피스텔은 기계 소리 하나 없이 고적하기 짝이 없었다. 뒤늦게 당혹감이 밀려왔다. 갑자기 주말이 붕 떠 버린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주말 내내? 지금 토요일 오전인데 그럼 일요일 밤 부대로 복귀할 때까지 다시 못 보는 건가?
하아, 예서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테이블에 주저앉았다. 석 달 만의 재회였다. 당황스러웠다. 마주 보고 앉아 같이 밥도 먹고 군 생활이 어떤지, 힘들진 않은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쩔 수 없잖아. 집에 일이 생겼는데.
머리로는 당연히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감정은 그렇지가 못했다. 예서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그의 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욕실에서 나와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다시 눈물이 핑 돌며 시선이 한없이 땅바닥만 향했다.
어젯밤 제대로 대화를 조금이라도 했더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관계만 하지 않고…. 그럼 이렇게까지 아쉽진 않았을 것 같았다.
***
한주혁은 이제 금요일마다 부대에서 나와 그녀를 오피스텔로 불렀다. 그리고 매주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오전까지 격렬한 섹스가 이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녘, 그녀는 어김없이 텅 빈 오피스텔에서 깨어났다. 전송된 문자의 내용도 한결같았다. 사유는 스타트업 일, 어버이날 집안 행사, 동창회 등 다양했고 때로는 이유를 밝히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5월이 훌쩍 지나가 버리고 마지막 주, 그가 관성처럼 연락해 왔을 때 예서는 오피스텔로 가지 않았다. 대신 건물 1층의 카페에서 만나자고 답문을 보냈다. 그게 세 시간 전이었다.
“무슨 일 있어? 올라와서 얘기하면 될걸.”
“문 열자마자 선배는 늘 바로… 말할 틈도 주지 않잖아요.”
공공장소에서 적나라한 표현을 쓰기가 민망해서 어조를 한껏 낮췄다. 한주혁의 입에서 희미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무슨 의미의 한숨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얘긴데.”
한주혁은 뻐근한 뒷목을 누르며 엷게 웃었다. 하지만 웃음도 잠시, 두 눈은 너울을 두른 듯 어둡게 일렁거렸다. 속내가 철저히 가려진 시선이었다.
“선배. 저 돌려서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얘기할게요.”
그가 기꺼이 경청하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등을 의자에 더 바짝 기댔다. 무의식적인 오만함과 나른함이 온몸에 배어 있었다.
문득 깨달았다. 한주혁이 보통의 연인처럼 다정하고 헌신적인 모습을 보일 때는 그녀가 가장 나약한 모습을 보일 때였다. 혹은 티끌만큼의 자존심과 자존감도 없이, 밑바닥까지 죄다 드러내는 순간이거나.
이를테면 너무 힘들다, 다 내려놓고 음성 메시지를 남겼을 때.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눈물을 그 앞에서만 흘렸던 날처럼. 지금처럼 거리를 두고 정색한 얼굴일 때가 아니라.
“선배가 주중엔 군 복무, 주말엔 스타트업 때문에 바쁜 거 잘 알아요.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주말 중 적어도 하룻밤만이라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고,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정말로.”
“…….”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고저 없이 담담한 어조, 여전히 속이 읽히지 않는 눈이었다. 마침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자리를 떠서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예서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본론으로 바로 들어갔다.
“만나자마자 바로 침대에 가서 눈 떴을 땐 저밖에 없어요. 늘 그런 루틴인데… 선배는 이게 정상 같은지, 저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는 여전히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섹스 자체가 싫다는 건 아닐 테고. 섹스 외 같이 하는 게 없다고 불평하는 거야?”
나긋나긋한 어조였다. 날은 서 있지 않았지만 온기도 없었다. 적나라한 단어에 예서가 얼굴을 붉히며 순순히 수긍했다.
“뭔가 대단한 걸 같이 하길 바라진 않아요. 잠깐이라도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일어나면 선배는 늘 옆에 없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지만 당분간 이해해줬으면 해. 나도 제대로 데이트란 걸 하고 싶지만, 지금은 벌려둔 일이 너무 많아. 제대하고 큰아버지 회사로 들어와 일을 도우라는 압박도 있고, 여러 가지로 좀 복잡한 시기니까.”
예서는 그의 대답을 한참 곱씹어 보았다. 이상하게도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군 복무나 스타트업 일, 가업을 이을지에 대한 진로 고민 등은 사실일 것이다. 거짓말로 여겨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왜일까. 만약 제 직감이 맞다면, 그녀가 느끼는 묘한 거리감은 다른 것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뭔지 정확히는 몰랐다. 잡힐 듯 말 듯, 아주 미묘한 불온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제대로 데이트를 하자는 게 아니라… 물론 그것도 원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선배가 시간이 안 되니까 하룻밤 동안 같이 있는 것만도 좋아요. 하지만 대화 한마디 하지 않고 오직 그것만… 하잖아요. 새벽에 급히 나갈 때까지. 선배가 원하는 게 그게 다인 것처럼.”
자괴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비참함에 눈물도 다시 핑 돌았지만 꾹 참고 말을 이었다.
“나도 대화를 원해. 하지만 네가 중간에 정신을 놔 버리잖아.”
예서가 귀를 의심했다. 유리알처럼 무감한 눈빛, 담담하게 그녀의 탓을 하는 저음에 가슴이 서늘했다.
“선배는… 선배가 일단 그것부터 시작하잖아요. 한 번 하면 멈추질 않고 한 번으로 끝나지도 않고….”
먼저 대화나 식사부터 하고 밤이 더 깊어지면 관계에 돌입하는 게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보기가 무섭게 짐승처럼 늘 옷부터 벗기기 바빴다. 옷을 입은 채 삽입부터 할 때도 있었다.
한주혁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둘 사이를 메꾸고 있었다. 예서가 테이블 아래 두 손을 꼭 맞잡았다. 왜 아무 말이 없는 건지, 당혹감은 이내 긴장으로 바뀌었다.
내가 잘못 말한 걸까? 하지만 이대로는… 역시 이대로는 이상해.
언젠가부터 그녀에게 바라는 건 몸뿐인 듯했다. 처음엔 이렇지 않았는데 점점 더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오래된 연인이 상대를 향한 열정과 설렘은 고갈된 채 그저 관성적으로 섹스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처음 만난 건 1년 반 전이지만 사귀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한 달이 막 되자마자 군대에 가 버리고, 처음 말과 달리 연락도 잘 안되는 데다 수개월 만에 보게 돼서 더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벌써 식은 건가? 이렇게 빨리…? 이렇게 쉽게?
“그래서 선배와 얘기를 좀 하고 싶었어요. 이건 아닌 것 같다고….”
결국 바라는 건 확신이었다. 그가 오해라고 말해 주고, 제 감정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고 그들은 아무 문제도 없으며,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어 미안했다는 말. 단 두세 마디면 족했다. 결국은 제 불안을 불식시켜 줄 대답을 바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난 여전히 잘 모르겠어. 그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인지. 어떻게 지내는지 휴대폰으로 근황은 늘 알고 있잖아. 내가 연락이 좀 늦긴 하지만 그건 상황상 이해해 주기로 상호 합의했었고.”
침묵이 흘렀다. 예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는….”
저도 모르게 울컥한 목소리였다. 그녀가 원했던 것과 다른 반응에 전신이 뻣뻣하게 굳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