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마음 풀자. 그나마 내가 제일 먼저 알게 됐잖아.
예서는 제조실 거울 너머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안색이 핼쑥하니 생기가 없었다.
선배는 친형제나 다름없는 사촌에게도, 집안 어르신들에게도 입영을 알리지 않았어. 그나마 나한테 제일 빨리 알려준 거야. 그러니까 네가 마음 풀고 이해해야 돼.
손이 멋대로 테이블 위로 뻗어가 휴대폰을 더듬었다.
선배는 원래 그런 사람이잖아. 차갑고 냉정하고 무심하고…. 어릴 적 부모님을 한꺼번에 잃은 상처로 얼마 전까지 정신과 상담도 받았어. 날 만난 이후로는 더는 상담을 가지 않고 약도 먹지 않게 되었다고 했지만….
그와의 대화창은 사흘 전으로 멈춰 있었다. 그동안 문자를 몇 번이나 썼다가 지웠는지 셀 수도 없었다.
[선배는 대체 어떤 사람이에요?]
[나는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나를 정말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선배는 늘 그런 식이에요. 전에도 그랬죠. 날 좋아하긴 하지만 사귈 마음은 없다고. 하지만 내가 다른 남자와 가까이 지내거나 만나는 건 싫다고. 이번에도 똑같잖아요. 나랑 헤어지는 건 원하지 않지만, 내가 원하면 헤어지겠다고.]
[도대체 선배가 원하는 건 뭐예요?]
보내려다 만 문자들이 뇌리를 스치자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일단 통화가 되는지부터 먼저 물어보자, 마음을 다잡고 전화기 표시를 누르려고 할 때였다. 화면에 불쑥 창이 떠올랐다.
[예서야.]
흠칫 놀란 손가락이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혹시 집이나 약국에 있으면 잠깐 나와줄 수 있을까? 지금 아파트 뒤 놀이터에 있어.]
예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화면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잠깐만. 혹시….
벅찬 가슴을 진정시키고 답문을 보내려던 그 순간, 얼굴이 저절로 굳었다.
만약 선배 쪽에서 헤어지자고 말하려고 온 거라면? 설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방금 전까지 희열로 쿵쾅거리던 그 박동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한주혁이었다. 그녀가 메시지를 읽고는 답이 없자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예서는 목을 몇 번이나 가다듬고는 통화에 응했다.
“네, 선배.”
-미안. 말도 없이 와서. 많이 바빠?
“아뇨, 안 바빠요.”
혹시 헤어지자 말하려고 왔어요? 목구멍을 넘어서서 입술 위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내뱉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나갈게요. 잠시만요.”
곧 폐점 시간이긴 했다. 친구가 집 앞에 와 있다는 말에, 수민은 혼자 문 닫을 수 있으니 어서 가보라고 그녀를 떠밀었다. 예서는 패딩을 걸치는 둥 마는 둥 황망히 놀이터 쪽으로 뛰듯이 걸었다. 가슴은 여전히 불안으로 무거운 채였다.
***
한주혁의 차는 놀이터 공터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차체에 비스듬히 기대 서 있다가, 저만치서 다가오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낮게 혀를 찼다.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추운데 머플러도 안 하고.”
커다란 손이 서슴없이 뻗어와 예서의 목에 캐시미어를 바짝 둘러 묶었다. 그의 입김이 닿으며 특유의 체취가 전신을 휘감아왔다. 불안으로 경직되어 있던 얼굴이 저도 모르게 홧홧해졌다. 그러다 흠칫, 또다시 밀려오는 초조함에 입술이 다시 굳어졌다.
원래도 세심하긴 하지만 오늘따라 더 다정한 것 같았다. 예전에 종종 봤던 모친의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갑자기 그녀만 쇼핑몰에 데려가 옷이며 맛있는 것을 사줄 때 엄마는 다른 사람처럼 너무도 상냥했었지.
-예서야. 정우 말인데, 역시 유학을 가야 하지 싶다.
-엄마 혼자 힘드니까 졸업 전까지는 학비며 용돈, 네가 좀 알아서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래 줄 수 있겠니?
잠깐의 따스함과 친근함 뒤에는 늘 다른 목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서는 무의식적으로 머플러 끝을 붙잡았다. 그렇게 하면 머플러의 주인을 붙잡을 수 있기라도 하듯.
역시 헤어지자는 말을 하려고 온 걸까.
“표정이 왜 그래. 아직 화가 안 풀린 거야?”
그녀의 어두운 얼굴에 한주혁의 눈매가 다시 서늘해졌다.
“추운데 차에서 얘기하자.”
그는 그녀가 탈 때까지 차 문을 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예서는 운전석 옆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다시 열리는 소리에 이어 특유의 체취가 아늑한 히터 온기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이제 두 사람은 그들만의 밀폐된 공간에 있었다.
그녀는 그가 건네는 텀블러를 망설이다 받아 들었다. 건너편 카페에서 산 듯 익숙한 맛의 레몬차가 들어 있었다. 몸이 순식간에 녹아내릴 듯 따뜻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예서는 창 너머, 미동도 않는 놀이터의 그네를 물끄러미 보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 역시 운전석에 오도카니 앉아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 저는-”
“예서야. 나는….”
동시에 말이 튀어나왔다. 그가 예서를 돌아보았다. 먼저 말하라는 듯 입술을 한일자로 다문 낯이 그녀만큼이나 굳어 있었다. 어쩌면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속내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저는 선배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선배도 제 마음, 이미 알 거라 생각하고요.”
예서가 텀블러를 홀더에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 돼요. 왜 선배가 지금까지 말을 해 주지 않았는지.”
“미안해. 여러 번 말하려다가 어쩌다 보니 못 하게 됐어. 왜 진작 말하지 않고 미뤘는지 생각해 봤는데… 결국은 별일 아니라고 생각한 탓이었어. 그런 것 같아.”
“별일이 아니라고요?”
잠시나마 누그러질 뻔했던 마음이 다시 격앙되었다. 예서의 음색이 저도 모르게 다시 싸늘해졌다.
“아무리 휴가를 나온다고 해도 1년 6개월이나 헤어져 있어야 하는 상황인데, 선배에겐 그게 별일이 아닌 거였어요?”
“주말에 볼 수 있어. 주중도 외출이 가능하긴 해. 부대 위치에 따라 주중에 보는 건 어려울 수 있겠지만.”
“네…?”
“카투사야. 군대.”
예서의 눈에서 혼란이 걷혔다. 과에도 카투사에 복무 중인 선배가 있었고, 동기인 이동환도 카투사에 입영하길 원했다. 어깨너머 듣다 보니, 일반 군대보다 훨씬 자유로운 카투사의 외출과 외박 시스템에 대해서도 자연히 알게 되었다.
“그래서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나 봐. 주말 내내 같이 있을 수 있는 것만은 확실하니까. 오히려 프로젝트에 매달려 있을 때보다 자주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서. 그래도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왜 말 안 했어요?”
예서의 눈에서 다시 불꽃이 튀었다. 불끈 말아쥔 주먹이, 당장이라도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 기세였다.
“네가 끝까지 듣지 않고 가 버렸잖아.”
말도 안 된다. 그녀가 가기 전까지 말할 시간은 충분했다.
“그래서 얘기하려고 이렇게 온 거야.”
한주혁이 그녀의 항변을 재차 막았다.
“미안해.”
흑, 눈물이 터졌다. 다시 치밀어오른 분노 때문에 시야가 흐려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차 문을 열고 나가려고 손을 더듬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한주혁이 그녀를 제 품에 끌어당기며 그만의 체취와 온기가 순식간에 전신을 덮쳐왔다.
“정말 미안해.”
거듭되는 사과가 정수리에 울렸다. 뿌리치고 싶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일부러 이러는 걸까? 다시 뿌리치려고 힘을 줬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울지 마.”
“흐윽….”
“그래도 1년에 몇 번 볼까 말까 하는 것보단 낫잖아. 적어도 주말엔 무조건 볼 수 있고, 휴일이라도 끼면 더 오래 있을 수 있고. 가까이에 배치되면 주중에도 보는 게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으니까.”
커다란 손이 예서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거렸다. 예서는 그의 품에 코를 박고 한참을 더 울었다. 너무 밉고 싫었지만 역시 미워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었다. 끝까지 말해 주지 않았다는 분노보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날 수 있다는 기쁨이 훨씬 더 컸다.
“이제 좀 풀렸어?”
울음이 잦아들고 코를 훌쩍이자 그가 몸을 떼어 내고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엉망이 된 얼굴 여기저기를 문지르고 매만지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머플러며 코트 앞섶이 콧물, 눈물로 범벅이 됐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아니. 안 풀렸어요.”
붉게 젖은 눈이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 와중에도 그의 팔꿈치 언저리를 꽉 잡고 있는 악력은 그대로였다.
“이제 안 그런다고 약속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늘 말해 주지 않는 거.”
“약속해.”
“…….”
“나쁜 버릇인데 도무지 고쳐지질 않아.”
그가 콘솔박스를 열고 티슈를 꺼내 예서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집에서 계속 전화가 와서 단단히 각오 중이야. 성준이 자식이 그 새 본가에 다 불어 버린 모양이야.”
“당연하죠. 얼마나 놀라고 당황하셨겠어요. 지금이라도 빨리 집에 가서 말씀드려요….”
“그래도 돼? 너 이렇게 두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바로 정리해 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그럼 우리, 헤어지는 거 아니지?”
“…….”
“예서야.”
“그럴 마음 없다고 했잖아요. 선배도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 여기까지 온 걸 테고…. 그래도 아직 다 풀린 건 아니에요.”
예서가 그의 손을 떨쳐내고 제 손으로 느릿느릿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나는 선배가 어느 정도로 내게 진심인지 모르겠어요. 날 좋아하고 헤어질 마음이 없다고 말은 하지만… 내가 선배를 좋아하는 만큼은 아닌 것 같아서….”
입술이 희미하게 달싹였다. 아래로 떨군 시선이 내내, 제 손을 감싸 쥔 그의 손등 위에 있었다. 그래서 그의 눈에 어린 희열을 보지 못했다.
“그런 생각 하지 마.”
주혁은 예서를 다시 제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말했듯이 연애가 항상 1순위거나 네가 늘 우선일 순 없어. 현실적으로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하지만 내 마음만은 진심이야.”
“…….”
“믿어 줘.”
그가 포옹을 풀고 민예서의 눈두덩에 입술을 맞췄다. 입술은 콧대를 타고 점점 더 아래로 내려와 그녀의 것 위에 안착했다.
혀끝에 와닿는 살결이 보드랍고 달았다. 원래 한바탕 울고 나면 입술 맛이 이렇게 더 진해지는 걸까. 의아함을 해갈할 틈도 없이, 혀가 저절로 그 달큰한 살갗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예서가 움찔, 허리를 비틀었지만 그를 뿌리치진 않았다.
입천장을 진득하게 훑다 거세게 혀를 빨아대는 내내, 더 습하고 뜨거운 점막이 생각났다. 더 질척하고 쫀쫀하게 달라붙는 속살을 떠올리는 동안 아랫도리가 터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