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49)화 (50/124)

<49화>

달력을 볼 때마다 앞으로 나흘 뒤의 날짜만 눈에 들어왔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지만 그에게선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엄마. 혹시… 고모네 소식 들으신 거 없어요?

-뭐? 그 사람들 얘긴 갑자기 왜 꺼내?

한주혁의 집에서 그렇게 돌아온 날 밤, 고모 가족과 상봉한 얘기를 뒤늦게 모친에게 하려고 꺼낸 얘기였다. 모친은 잠자리에 들기 전 주방에서 차를 끓이다 홱 돌아섰다.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양 얼굴빛이 달라져 있었다.

-그쪽에서 혹시 연락 왔어? 요즘은 전화번호 몰라도 SNS니 뭐니, 연락하기 쉽잖아.

-아, 아니에요. 그냥 생각나서 물어본 거예요.

-아휴, 민 씨라면 아주 징글징글하다. 미국 이민 갔다니 거기서 어련히 잘 먹고 잘살겠니. 앞으론 말도 꺼내지 마, 듣기도 싫으니까.

모친은 찻잔을 들고 방으로 횅하니 들어가 버렸다. 역시 말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모와 만나 연락처를 주고받고 가끔 안부를 묻기로 했다는 사실을 털어놨다면 야밤에 큰 소동이 벌어졌을 것 같았다.

한번 수틀리면 마구 몰아붙이는 성격대로 그녀를 붙잡고 고모 번호를 내놓아라, 당장 연락해서 따지겠다, 들들 볶았을 게 뻔했다. 그랬다면 그녀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해 버렸을 터였다. 한주혁과의 일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예서는 이틀 전, 모친과의 아슬아슬했던 대화를 떨쳐내고 제조실에서 나왔다.

“수민 언니, 저 저녁 먹고 아까 얘기했던 드럭스토어에 다녀올게요. 뭐 필요하신 거 있으면 같이 사 올게요.”

“앗, 오픈 세일 크게 한다던 역 앞 거기? 여기 만 원. 혹시 이 핸드크림 1+1 하면 사다 주라. 하나는 너 줄게. 손님도 없는데 저녁도 느긋하게 먹고, 천천히 갔다 와.”

모친이 약사회 모임에 간 저녁, 약국은 수민과 그녀밖에 없었다. 한파가 부쩍 심해져 손님은 뜸했고 거리의 행인도 많지 않았다.

예서는 수민이 찾던 것과 여성용품 몇 개를 사서 가게를 나왔다. 분식집에서 김밥이라도 먹을까 하다가 결국 돌아섰다. 먹어봤자 얹힐 것 같았다.

약국을 향해 걷는 다리에 힘이 없었다. 머리는 멍했고, 누가 한 움큼 떼어 낸 것처럼 가슴은 늘 시큰거렸다.

컴퓨터 앞에 앉아 소설에 집중하려 했지만 30분을 넘기지 못했고, 약국에 나와서도 반쯤은 얼이 빠져 있었다. 가끔 멍때리고 힘 다 빼고 있는 게 건강에 좋다고 주장하던 조수민도 아까는 보다 못해 한마디 건넸다.

-예서야. 너 요즘 왜 그래? 매가리도 하나 없고 하루 종일 멍하니. 며칠 새 왜 이렇게 말랐어? 봄 타고 가을 탄다는 말만 들어봤지 겨울 탄다는 소린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 예서 아냐?”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박성준이 친구들과 카페로 들어가던 중인지 문 앞에 멈춰서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 성준 선배.”

예서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가 특유의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그녀 앞에 멈춰 섰다.

“이렇게 마주쳐서 너무 반갑다. 그런데….”

박성준이 누군가를 찾는 듯 그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혁이는? 금요일인데 만나는 거 아니었어?”

“네? …아뇨. 오늘 약속 없어요. 집이 근처인데 잠깐 뭐 사러 나온 거예요.”

“아, 미안. 내가 너무 아는 척했나.”

예서가 당황한 듯 시선을 피하자 그가 머쓱한 듯 웃었다.

“나도 주혁이 얼굴 본 지 한참 돼서. 무슨 프로젝트 얼마 전에 끝났대서 이제 좀 연락이 되려나 했더니 며칠째 계속 잠수 타더라고. 문자도 확인 안 하고. 뭐, 어차피 2월 설 연휴 때 할아버지 댁에서 보겠지만….”

“2월요? 하지만 주혁 선배는 다음 주에….”

예서가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혹시 성준 선배도 모르는 건가? 설마. 제일 가까운 사촌인데. 하지만 박성준의 눈빛은 의아함에 차 있었다.

“다음 주에 왜? 어디 멀리 간대? 여행이라도 가나?”

“…….”

“어디로 간대? 에이, 어차피 알게 될 텐데 그냥 말해줘. 그 녀석이라면 어디 듣도 보도 못한 오지로 훌쩍 떠난대도 이상할 거 없지만.”

“다음 주 월요일에 입대한다고 했어요. 전 그저께 들었고요.”

예서는 입술을 다물고 있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박성준의 말대로 어차피 주변인은 다 알게 될 일이었다. 담담하게 전하는 소식에 그는 아연실색한 모습이었다.

“뭐? 다음 주에 주혁이가 이, 입대한다고? 군에?”

“선배도 처음 듣는….”

처음 듣는 얘기냐고 물으려던 말끝이 흐려졌다. 박성준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했다.

“와, 이 새끼 미친놈이네. 진짜! 내가 모른다는 건 집안 어르신들도 모르고 계신다는 뜻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아니, 잠깐만. 너한테도 그저께 얘기했다고? 하, 이 새끼 진짜…!”

박성준은 카페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친구들도 잊은 채 그 자리에서 펄펄 뛰었다. 당혹감을 넘어서서 뒤통수를 거세게 얻어맞은 듯한 반응에 예서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성준 선배에겐 미안했지만, 한주혁이 제 가족 친지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원래 그런 인간인 것이다.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만은 마음이 누그러지긴 했다.

-그러고 싶어? 여기서 멈추고 싶은지 네 의향을 묻는 거야.

-군대 가기 전에 여자 쪽에서 결별을 원하는 거, 드문 일도 아니니까.

-만약 끝내고 싶다면, 네 의향에 따를게.

하지만 그 이후의 상황은 여전히 부표처럼 떠 있었다. 대체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정작 자신은 결별을 원하지 않고 여전히 그녀를 좋아하지만, 만약 그녀가 헤어지길 원한다면 그렇게 하겠다니.

-그러니까 선배 말은… 내가 갖기는 싫지만 다른 사람 주기도 싫다- 이런 마음인 건가요?

예전의 다툼이 생각났다. 한주혁은 그녀가 최인하와 가깝게 지내는 것에 시비를 걸다시피 신경을 곤두세우고 관여했었다. 그가 평범한 사고방식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익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더 미궁에 빠진 기분이었다.

그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선을 넘고 몸 구석구석 내보이지 않은 곳이 없는 지금도 그랬다.

사흘 내내 연락 한번 없는 지금 이 순간조차.

***

주혁은 액정 화면을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어둠이 내려앉은 겨울 밤하늘은 고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웠다.

끝낼 생각은 아닐 것이다. 설마 헤어지자고 할 리가.

점점 깊어지는 불안과 의혹에 잠식될 것 같았다. 민예서가 그렇게 가 버릴 때만 해도 그런 가능성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민예서가 결별을 원할 리가 없으니까. 기껏해야 하루 정도 화가 나 있다가 결국은 연락이 올 거라 믿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민예서는 그에게 푹 빠져 있었다. 세 번 거절을 당하고도 그를 놓지 못했던 여자다.

그런데 왜 이렇게 초조한지 알 수가 없었다. 예상했던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째 이르렀을 때 초조함은 불쾌감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민예서는 사흘 내내 연락이 없었다. 평소처럼 지내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방학인데도 새벽같이 일어나 모친의 약국을 열고, 열심히 자료를 준비해 칼같이 시간을 엄수해 과외를 가고, 이달부터 온라인 수업으로 바꿨다는 영어 강의도 규칙적인 루틴에 맞춰 부지런히 듣고 있을 것이다.

민예서는 늘 그랬다. 어떤 속상한 일이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 꿋꿋하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모범생이니까. 억지로 웃어야 할 일이 있으면 심장을 비틀어 짜서라도 미소 짓고 속으로 울음을 삼키는 게 그녀의 주특기였다.

-네, 저 선배 좋아해요.

-선배 이젠 안 좋아한다는 말, 거짓말이에요. 지금도 좋아해요.

-제가 원하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아요. 선배랑 사귀고 싶어요.

하지만 그에게는 달랐다. 어쩌면, 민예서가 깊은 속을 털어놓고 솔직하게 제 얼굴을 보였던 유일한 상대는 그 하나뿐이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그날 밤은 더더욱.

-선배. 나 어떡해요…. 너무 속상한데… 힘든데….

메시지를 듣는 순간 열 일 다 제치고 차 키를 집어 들었다. 머리에 피가 몰려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자제해야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벨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설마, 화면을 확인하는 즉시 기대감은 실망감으로 변했다. 벨 소리는 이내 문자 알림음으로 변했다. 집안 어르신과 사업상의 연락을 무수히 흘려보내는 동안, 박성준의 톡에서 손가락이 멎었다.

[이 새끼 너 끝까지 전화 씹을 거야? 방금 예서 만났는데 너 다음 주 군대 간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 싸가지란 개념 자체를 밥 말아 먹은 놈아!]

손이 저절로 통화 버튼으로 향했다. 박성준은 신호음이 두 번 넘어가기도 전에, 야!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주혁은 그러거나 말거나 담담하게 물었다.

“예서를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데. 지금 같이 있어?”

-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어딨어, 예서.”

-아까 갔어! 역 앞에서 마주쳤는데 뭐 사러 잠깐 나왔다더라. 근데 너 그거 정말이야? 너 원래 그런 새낀 거 가족들은 다 아니까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쳐도, 예서도 며칠 전에 들었다던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둘이 사귀기로 한 거 12월 아니었어? 여친한테는 사귀기로 한 날에 바로 말했어야지!

주혁은 묵묵부답, 성준의 비난을 조용히 듣고만 있다가 그가 말을 멈추자 툭 내뱉었다.

“어디 찔러서 입대 미루는 것도 생각해봤는데… 결국 가기로 했어. 어차피 다녀올 거 빨리 마무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나마 예서가 캠퍼스 안에 갇혀 있는 동안 떨어져 있는 게 나을 터였다. 그동안 그녀에게도 몇 번이나 알리려고 했지만 번번이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뭐? 설마 자해라도 하려고 했다는 거야?

미친놈. 휴대폰 너머에서 욕지거리가 이어졌다. 아무리 입대를 미룰 방법이 어디 하나 부러지거나 다치는 거라 해도 그렇지.

“예서 만난 게 몇 시쯤이야?”

주혁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뻔뻔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니, 됐어. 일단 끊자.”

-와, 씨발. 존나 기가 막힌다! 넌 평생 그렇게 주변 사람들한테 빅 서프라이즈 빅엿이나 날리며 살아라, 새꺄! 이 개….

그는 더 듣지 않고 통화를 종료했다. 민예서가 전화라도 했다가 통화 중인 상황은 원치 않았다.

차 키를 집어 들고 나가던 그는 다시 돌아와 의자 위에 널브러져 있던 코트와 머플러를 집어 들었다. 제 추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잘 챙겨 입지 않는 누군가를 위한 준비물이었다.

더 이상은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 없었다. 초조함은 불쾌감으로, 이제는 분노로 바뀌어 있었다.

민예서,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주차장으로 향하는 내내 헛웃음이 흘렀다. 그를 이렇게 사흘 내내 기다리게 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좋아한다고, 간도 쓸개도 다 빼주고 뭐든 감내할 것처럼 매달리더니. 겨우 이 정도였나.

그 역시 그녀에게 미쳐 있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 쪽에서 더 미쳐 있어야 했다. 늘, 언제나, 더 안달하고 애타하는 건 그가 아니라 민예서가 되어야만 했다. 좆같은 이기심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야만 이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다. 적어도 민예서는 그렇다고 믿기를 바랐다. 자신이 늘 을이고 한주혁이 갑인, 그 감정적인 서열에 한 치 의심도 없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담은 하지 않아야 했다.

그나마 내가 선배에겐, 선배 자신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그 사실만으로도 감사하고 내가 다 이해하고 포용해야 돼-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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