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몇 번이나 말하려고 했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너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군 복무를 덜컥 결정하지 않았겠지만…. 이미 결정됐고 미룰 수도 없는데 어쩌겠어.”
“그래서 일주일 전에야 말을 한 거예요?”
예서가 싸늘하게 되물었다. 아무리 진정하려 해도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1월 넘어가면 여유가 생길 거라더니 그 여유가 결국….”
아. 뒤늦은 깨달음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스타트업 동료들이 제대하고 오면 회사를 맡길 수 있으니까 여유가 있을 거란 말이었네요.”
헛웃음이 났다. 자신은 애당초 그 여유가 적용될 대상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다.
“선배,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아무리 연애보다 다른 것이 우선이 되는 상황을 이해하겠다고 했지만, 이런 건….”
“예서야. 민예서.”
그가 날 선 얼굴로 그녀와 테이블 사이에 섰다. 감정을 억누르며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기는 몸짓은, 흡사 말귀 못 알아듣는 어린애를 상대하는 듯했다.
“오해야. 넘겨짚지 마, 피곤하게.”
“네…?”
불길한 기시감이 밀려왔다.
-피곤하게.
언제였지. 전에도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알았어요. 그럼 내일 연락해서 못 하겠다, 죄송하다고 말씀드릴게요.
기억이 반짝 떠올랐다. 최인하의 부친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는 걸 그가 반대하며 제가 소개하는 과외를 하라고 종용했을 때였다.
-그래. 그렇게 해.
바짝 날을 세웠던 목소리가 한껏 누그러졌었다.
-이런 무의미한 일로 감정 소모할 필요 없잖아. 피곤하게.
어쩌다 보니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한주혁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단 한 단어의 덧붙임에서 느꼈던 미묘함이 지금, 훨씬 명료한 파장으로 다가왔다.
“선배를… 피곤하게 해서 미안하네요.”
“예서야.”
한순간 그가 낯설게 보였다. 근 1년 전 처음 학교 앞 카페에서 만났을 때 같았다. 차갑고 일방적이며, 숨길 수 없는 오만함으로 점철됐었던 그날로 되돌아간 착각마저 들었다.
“실례할게요. 이만 집에 가봐야겠어요.”
예서는 그를 지나쳐 건조기에서 옷을 꺼내온 뒤 욕실로 향했다. 다 마르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알몸 위에 그의 셔츠만 달랑 걸친 것부터 당장 어떻게 하고 싶었다. 욕실 문을 잠그고 무릎 위까지 내려오는 그의 셔츠를 벗는 동안에도 목이 메었다.
침착해, 민예서.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감정 앞세우지 말고….
옷을 갈아입고 문을 열자마자 흠칫 놀라 한 발짝 물러섰다. 한주혁이 문 앞에 기대 서 있었다. 예서는 그를 무시하고 지나쳐 거실 소파 위의 가방을 집어 들었다.
“예서야, 잠깐만.”
“나중에 얘기해요.”
“데려다줄게.”
“아뇨. 알아서 갈게요.”
“지금 새벽 1시야. 위험하잖아.”
“택시 타면 돼요.”
예서는 폭발 직전의 감정을 한껏 억누르고 계단 아래로 향했다. 이 상태로 더 같이 있어봤자 언성만 높아질 것 같았다.
컴퓨터와 복잡한 기기들이 빼곡한 1층 작업공간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하는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예서의 뒤를 그림자처럼 바짝 쫓다가 현관문을 열려는 몸짓을 제지할 따름이었다.
“잠깐만. 그럼 하나만 물어볼게.”
커다란 손바닥이 손잡이 위를 짚고 예서를 돌려세웠다. 거칠진 않았지만 부드럽지도 않은 손이었다. 예서는 그 다급한 손길을 느리게 쳐내며 거리를 벌렸다. 온기가 닿으면 마음이 약해지거나 눈물이 터지거나, 혹은 둘 중 하나가 될 것 같았다.
“뭔데요.”
제 귀에도 생경할 만큼 단호한 목소리였다. 울음을 참으려다 보니 눈에도 바짝 힘이 들어갔다.
한주혁이 낮게 한숨을 뱉으며 한 팔을 문에 비스듬히 기댔다. 비딱하게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평소의 온화함은 없었다.
“헤어지고 싶어?”
한순간 말을 잃었다. 예서가 대답 없이 입술만 벌리고 있자 그가 재차 물었다. 너무도 여상한 음색이었다.
“그러고 싶어?”
“뭐라고요…?”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는 전율에 몸이 떨렸다.
“여기서 멈추고 싶은지 네 의향을 묻는 거야.”
그는 담담하게 이어 말했다.
“군대 가기 전에 여자 쪽에서 결별하길 원하는 거, 드문 일도 아니니까.”
“선배는 어떤데요? …헤어지고 싶어요?”
예서가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을 것 같았다.
“여자만 그런 거 아니잖아요. 남자들이 먼저 입영 전에 정리하고 싶어 하는 경우도 많대요.”
“난 아냐.”
억양 없는 음색이 이어졌다.
“난 내 예정된 미래를 말한 것뿐이지, 너랑 끝내고 싶다고 한 적 없어.”
“…….”
“어차피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을 좀 늦게 알았대도 그게 뭐가 중요해? 네가 미리 알았더라도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는데.”
참 이상했다. 단 한 번을 언성 높이지 않는데도, 그가 입을 열면 열수록 가슴이 더 빠르게 가라앉았다. 침몰하는 속도가 너무 확연해 위가 역류하듯 속이 울렁거렸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겠다는 듯 한주혁이 재차 물었다.
“그래서 넌. 그만하고 싶어?”
당혹감에 말이 나오질 않았다. 당연히 원할 리가 없다. 이제 막 시작했는데. 1년 내내, 그 조용한 소란과 가슴앓이 끝에 결국 커플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만한다고? 그건 1년 6개월 동안 그를 만날 수 없게 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로 다가왔다.
“만약 끝내고 싶다면, 네 의향에 따를게.”
하지만 그는 아닌 모양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한주혁은 지금, 그녀가 이별을 논하는 즉시 둘의 관계를 무로 돌리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어 보였다. 빈말이라도 그러자고 말하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한 치의 거리낌도 없이 그럴 것처럼.
“뭐가 됐든 네가 원하는 방향대로 할 테니까 좀 진정하고. 데려다줄 테니까 차 타고 가.”
“선배야말로….”
주먹을 말아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실내가 훈훈하다 못해 더운데도 손끝이 경련처럼 바들바들 떨려왔다.
“선배가 원하는 대로 해요.”
이명처럼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끝없이 추락하던 심장이 결국 바닥 어딘가에 닿은 것 같았다.
“선배는… 나한테 정말 진심이긴 했어요?”
결국 그 정도의 마음이었다면 진지했을 리가 없다. 적어도 그를 향해 있는 제 마음의 절반만이라도 진심이었다면.
“내가 말했지. 난 끝내는 거 원하지 않는다고.”
두 눈처럼 날이 바짝 선 목소리였다. 핏발 선 눈은 어느 때보다 더 차가워 보였다.
“그따위 말은 하지 마. 난 처음부터 끝까지 네게 진심이었어. 진심이라서 거부하느라 죽을 만큼 힘들었고, 지금도 그래.”
“진심인데 내가 원하면 헤어지겠다고요…?”
예서가 목을 가다듬었다. 반쯤 얼이 빠져 현실 감각이 없었다. 너무 충격을 받으면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뼈저리게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더는 얘기… 못할 것 같아요.”
예서는 그의 팔 아래로 손을 뻗어 문손잡이를 당겼다.
“데려다 줄 테니까 타고 가.”
“아뇨.”
예서는 힘주어 문을 열었다.
“뭐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 주겠다면서요. 내가 지금 원하는 건 선배와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나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갖는 거예요.”
한주혁의 시선이 일순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평소의 차분함을 되찾고는 문을 여전히 가로막고 섰다.
“그럼 1층 경비실에 택시 호출 부탁할 테니까 그거 타고 가. 거기까지만 해 줘. 부탁이야.”
부탁한다기보다 명령하는 투였다. 예서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그는 선선히 문을 열어주었다.
“충분히 생각해 보고 연락해 줘.”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뒤통수로 낮게 깔린 음색이 재차 날아왔다.
“기다릴게.”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서서 문이 닫힐 때까지 현관문 닫히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1층 로비에 내려가자마자 야간 경비원이 호출해 준 모범택시가 도착했다.
예서는 결국 차에 올라 뒷좌석에 몸을 묻었다. 타지 않고 무시하기엔 몸이 너무 힘들었다. 그가 사준 코트에 머플러까지 했는데도 몸이 덜덜 떨려서 앞자리의 운전사가 히터를 더 높여줬지만 한기는 가실 줄을 몰랐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방문을 꼭 닫고 이불까지 뒤집어쓰고 나서야 마음껏 울 수가 있었다.
한주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문가에 서 있던 그는 지금껏 알아 왔던 그가 아닌 듯 낯설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한 몸처럼 녹아들며 제 몸속에서 다정하게, 때로는 거칠게 움직였던 사람과 완전히 다른 인격체 같았다.
원한다면 끝내겠다니,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녀가 원하지 않을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
며칠 전에야 입영을 말해준 것만도 충격적이었건만, 마지막에 한 말이 훨씬 더 경악스러웠다.
-그래서 넌. 그만하고 싶어? 만약 끝내고 싶다면, 네 의향에 따를게.
한주혁은 저를 향한 그녀의 감정을 확실히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만약 끝내기를 원하면 그렇게 해 주겠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그가 대체 뭘 원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고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지, 그 감정의 진위조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