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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45)화 (46/124)

<45화>

“근데 참 희한하더라. 7년 동안 그 수모를 겪었으면서 네 엄마도 니 할머니에게 옮기라도 했는지, 니들 크면서 정우만 점점 편애하더라 말이지. 그저 우리 아들, 우리 정우….”

예서의 심장이 서늘해졌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제삼자의 눈에도 그게 명백했다는 사실에 가슴 어딘가에 쩍, 실금이 생기는 것 같았다.

“이젠 컸으니까 안 그러겠지만…. 아무튼 나까지 덩달아 절연을 당했지만 말이야,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끼리라도 가끔 연락은 하고 지내자. 이제 3학년 된다고 했지? 괜찮으면 방학 때 LA에 놀러 와. 우리 경현이도 졸업하면 군대 때문에 한국 들어와 있긴 해야 되는데….”

졸업 후 한국에서 자리 잡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자진해서 군 복무를 하겠다고 나선 모양이었다. 그때 시선이 느껴져 문 쪽을 돌아보았다. 한주혁이 안으로 들어서다 잠시 멈춰 서 있었다. 고모가 누군지 몰라 잠시 관망하고 있던 듯했다.

“선배.”

“아, 만나기로 한 친구야? 고모도 빨리 식당에 가봐야겠다. 세상에, 아직도 믿기지가 않네. 정말… 이게 몇 년 만인지!”

민자영은 예서를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이렇게 헤어지기 못내 아쉬운 듯 눈시울이 여전히 붉었다.

아쉬운 건 예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모에 대해서는 따뜻한 기억밖에 없었다. 정우만 챙기던 엄마보다 고모를 더 좋아한 나머지 고모 집에서 계속 살고 싶다, 그렇게 바랐던 적도 있었다.

“꼭 연락하고 살자. 응? 너희 엄마는 싫어할지 모르겠다만, 이제 너도 다 컸으니까. 봐서 여름에 다시 올 것 같지만 그때 가봐야 알아.”

“네, 연락드릴게요. 나중에 할머니 요양원도 같이 가요.”

고모는 한주혁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눈가를 훔치며 다른 쪽 문으로 향했다. 예서가 문밖에서 그녀를 배웅하고 돌아왔을 때, 그는 맞은편 민자영이 앉아 있던 자리에 있었다. 한주혁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대뜸 물었다.

“고모님? 어디 멀리 가시는 거야?”

“아, 그건 아니고….”

남은 이야기는 건물 2층의 레스토랑에서 계속되었다. 예서는 식사 틈틈이 고모와의 재회, 어른들이 절연하게 된 사연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그 사연까지는 말할 생각이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고 말았다. 지난번 속상함을 토로하며 그녀의 집안 사정을 털어놓았기에, 굳이 숨길 이유도 없었다.

“그랬구나. 정말 반가웠겠다.”

한주혁은 잠자코 경청하다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짚었다. 그 모습에 예서의 심장이 새삼 두근거렸다. 일주일 만에 보는데도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처럼 반갑고 기뻤다. 동시에, 둘의 첫 순간이 떠올라 혼자 얼굴이 붉어졌다.

“나중에 미국에 같이 갈까? 나도 그쪽에 친척이 계시거든.”

“네? 선배랑 같이요?”

“응. 우리 둘 다 졸업하고, 기회 봐서.”

그가 싱긋 웃었다. 예서의 심장 박동이 더 빨라졌다. 아무리 봐도 빈말은 아닌 것 같았다. 선배와 미국에 같이 여행을 가다니. 상상만 해도 꿈만 같았다.

“너는 몸만 오면 돼. 비행기 티켓이나 다른 건 일절 신경 쓸 필요 없어.”

“아… 그래도 그건 아니죠. 지금부터 더 열심히 모을 거예요. 선배가 소개해 준 과외도 있으니까!”

아직 먼 미래라도 같이 가자고 제안한 것만으로도 날아갈 것 같았다. 더 정확히는, 그가 앞으로도 그녀와 당연히 커플일 거라 여기는 것 자체가 너무 기뻤다. 고모와의 재회로 먹먹했던 가슴이 순식간에 행복한 감정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선배, 앞으로 한 학기만 남았네요. 선배도 학점 얼마 안 남았으니까.”

“응. 남은 건 온라인 수강도 가능한 거라서 주말마다 몰아서 하려고.”

“네? 그럼 1학기에 학교 안 와요, 선배?”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아.”

“그럼 회사 일에만 집중하는 거예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말, 없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급박한 프로젝트가 없을 거라고도 했고 제대한 선배들도 돌아왔다고 하니 여유가 생기리라 믿었다. 오히려 그녀 쪽에서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더 바쁘진 않을까 걱정이 됐다.

“디저트 먹으면서 더 얘기할까?”

“그래요. 어디 갈까요? 건너편에 카페 있던데.”

“뭐 하러 다른 델 가. 다 퇴근하고 오피스텔 비어 있는데.”

“그럼….”

어쩐지 은근한 어조에 가슴이 조금 떨렸다.

“테이크 아웃해서 갈까요…?”

“그럴까.”

“그럼 디저트는 제가 살 테니까 여기서 앱으로 오더해놓고 가요. 선배는 뭐 먹고 싶은데요? 음… 신메뉴 이거 맛있겠어요. 생딸기 라떼랑 몽블랑 아이스크림.”

그때 한주혁이 깨끗이 비운 접시를 밀어놓고 상체를 기울여왔다. 그들이 앉은 창가 쪽 자리는 옆 테이블 여자들과 좀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간간이 한주혁을 훑어보는 시선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도 그 시선을 느꼈는지 메뉴판을 똑바로 세워 예서와 제 얼굴 모두 가렸다. 그리고 들릴 듯 말듯 속삭였다.

“너.”

“네?”

예서가 휴대폰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순진무구한 눈이 동그랗게 반짝거렸다. 그의 스니커즈가 그녀의 어그부츠 옆에 밀착해 왔다.

“너 먹고 싶다고.”

발 쪽을 내려다보던 예서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너랑 끝까지 닿고 싶어.”

예서의 입술이 달싹였다. 무슨 의미인지 바로 이해해 버린 스스로가, 한주혁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날 것의 표현보다 더 민망했다.

“예서야.”

그윽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보고 싶었어.”

그가 혀로 입술을 핥더니 다시 강조했다.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잖아.”

맞닿은 신발에 힘이 실렸다. 긴 속눈썹 아래 두 눈은 일견 차분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공이 열점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과녁처럼 조준한 눈빛에 심장까지 사로잡혀 버린 기분이었다.

“저, 저도 선배랑 같은 마음이었어요. 선배가 보고 싶….”

“아니. 같은 마음일 수가 없어.”

눈에 희미한 날이 서 있었다.

“넌 모르니까.”

예서가 순간 긴장해서 침을 꼴깍 넘겼다. 찌를 듯 날카로운 눈, 차디찬 저음에 오한이 들었다. 내가 뭔가 잘못 말한 걸까.

“넌 내 마음… 반의반도 몰라.”

“……?”

“나가자.”

알 수 없는 말끝에 그가 메뉴판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움직임에, 수다를 떨던 옆 테이블의 여자들이 일제히 한주혁을 바라보았다. 예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뒤따르다 그중 가장 화려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짧은 찰나, 여자는 예서의 위아래를 품평하듯 훑었다. 아니꼬운 눈빛이었다. 예서는 죄인처럼 움찔,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주혁이 카운터에서 돌아서서 제 어깨를 감싸 안는 순간 위축됐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 선배. 근데 아직 오더를 못 했어요.”

“그냥 가자. 디저트도 내가 사줄게.”

“아니, 디저트는 제가….”

그는 못 들은 척 예서의 손에 제 것을 깍지 끼고 카페를 나섰다. 맞닿은 손바닥과 손가락에서 흘러드는 열기로 추운 줄도 몰랐다. 장갑을 꼈을 때보다 더 따뜻했다.

***

예서는 포장해 온 생딸기 라떼를 한 모금도 목으로 넘기지 못했다. 아이스크림을 맛볼 틈도 없었다. 처음 와보는 그의 오피스텔을 구경할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아, 흣… 흐….”

가슴이 공기 중에 노출되는 서늘함도 잠시, 유두를 덥석 베어 무는 열기에 전신이 더웠다. 등줄기에 찌릿, 전율이 흘러 고개를 젖혔지만 딱딱한 벽이 퇴로를 막고 있었다. 둘은 복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앞에 기대 선 채 엉켜 있었다.

“선배, 녹… 녹아요….”

“알아.”

한쪽 돌기를 입 안으로 삼킨 채 그가 답했다. 그 상태로 혀를 움직이자 허리가 경련하듯 펄쩍 튀어 올랐다. 저릿한 쾌락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질척한 혀가 가슴에서 올라와 입 속으로 쑥 들어왔다. 허리를 받쳤던 손이 어느새 다리 사 사이, 속옷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검지와 중지가 잔뜩 젖어 쿨쩍대는 틈새를 단번에 찔러 들고 있었다.

“위아래로 다 녹아내리고 있네. 음란하게.”

“아!”

손가락 두 개가 한 번에 음부에 짓쳐들자 예서의 입에서 교성이 터져 나왔다.

“선배, 그, 게 아니라 아이스크림이… 냉동실에 넣… 하악!”

“지금 먹어도 돼.”

그가 싱긋 웃으며 비부에서 손을 빼고 예서를 한쪽 어깨에 번쩍 안아 들었다.

“지금 먹자.”

“네? 하지만….”

나중에 먹고 그냥… 계속하지.

예서는 색색, 숨을 몰아쉬면서도 실망감을 드러내지 않으려 입술을 꼭 물었다. 손가락이 들어왔다가 이내 빠져나가는 것에 허탈함을 느끼자 어이가 없었다.

미친 것 같았다. 이번이 고작 두 번째일 뿐인데, 섹스에 미쳐서 정신이 나간 여자 같아서 한심했다.

“먹으면서 하면 되지.”

예서의 눈이 어리둥절 커졌다. 정신이 들었을 땐 그가 그녀를 무릎에 앉힌 채 소파 팔걸이에 라떼와 아이스크림 둘 다 올려놓고 있었다.

“여기.”

한주혁이 생딸기가 올려진 라떼를 들어 스트로를 그녀의 입으로 가져갔다. 예서는 본능적으로 스트로를 쭉 빨아들이면서도 그의 허벅지에서 내려오려고 바르작거렸다.

“선배, 내려줘요. 이대로는 좀… 흣.”

그가 제 다리를 가윗날처럼 쫙 벌리고 뒤에서 안는 바람에, 불룩하게 솟은 바지 앞섶이 자꾸 꼬리뼈를 찔러왔다. 단단하고 뭉근한 열기에, 달콤한 딸기 맛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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