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그래도 어쩌겠니, 내 자식인데. 엄마인 나만이라도 따뜻하게 품고 사람 노릇 하면서 살게끔 끝까지 지원은 해줘야지. 안 그러니? 너도 매번 장학금 압박에 용돈 네가 버느라 힘든 거 알아. 약국 일 돕는 것도, 그동안 정우한테 많이 양보한 것도 고맙게 생각하고. 하지만 네가 정우보다 훨씬 나은 입장에 있으니까 좀 억울하고, 희생한다 생각되더라도 조금만 참아줬으면 좋겠어.”
“네. 알겠어요, 엄마. 무슨 말씀이신지도 알겠고 이해도 해요. 하지만 졸업 후에도 이 이상의 것은 제게 바라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돈 벌게 되면… 엄마 혼자 고생하시지 않게 저도 생활비도 보태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거예요.”
예서가 입술을 감쳐물었다가 결론으로 치달았다.
“하지만 아까 말씀드렸듯 정우에 대해서는 그 이상은… 무리예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아무래도 모친은 그녀의 선언 아닌 선언에 온전히 동조하기 어려운 듯했다. 예서는 말없이 시선을 내려뜨린 이 약사의 목 언저리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정말 원하시는 건 뭘까.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사랑하는 아들을, 딸인 자신도 같은 마음으로 대하길 바라는 걸까. 안타깝게도 그 소망에는 부응할 수가 없었다.
“먼 미래의 일은 그때 가서 얘기하자. 뭘 벌써부터 네 발목이라도 잡을 것처럼 말하고 그래. 나 없으면 너희 둘이 유일한 가족이니 그렇게까지 매정하게 선 긋지도 말고. 응?”
예서가 뭐라 대꾸하기 전에 그녀가 테이블 아래서 봉투를 하나 꺼내 앞으로 밀었다.
“용돈이야. 적금 하나 만기 돼서 이자 받은 거, 몽땅 넣었어.”
“…….”
“뭐 하니? 어른이 주는데 열어 보지 않고.”
예서가 멀뚱멀뚱 내려다보기만 하던 봉투를 집어 들고 안을 열어 보았다. 오만 원짜리 지폐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적어도 백만 원은 되어 보였다.
“어… 엄마.”
“5년짜리인데, 옛날에 든 거라서 이자가 좀 높았어. 방학 동안 알바하느라 힘들 텐데 겨울 동안만이라도 좀 여유 있게 지내라고. 엄마가 약국에 붙어 있느라 밥도 못 챙겨주니까 밖에서라도 먹고 싶은 거 좀 먹고.”
“…….”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왜. 적어서?”
“아니에요! …감사해요, 엄마.”
“그래. 그러니까 아무리 서운해도 너는 너, 정우는 정우, 너무 그러지 말라고, 이것아. 다 똑같은 자식인데 어쩌겠어. 잘난 쪽이 못난 쪽 더 품어줘야지. 응?”
이 약사는 혀를 차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아, 고단해. 이만 씻고 자야겠다. 너도 일찌감치 자고.”
“네. 감사히 잘 쓸게요, 엄마.”
잠시 후 돈 봉투를 서랍에 넣고 책상에 앉았을 때는 기분이 묘했다. 어쩐지 뇌물 같다고 생각하면 나쁜 심보일까.
그러지 말자. 매사에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문제야.
이유야 어쨌든, 모친의 마음은 쌍둥이 중 하나에게 더 기울어져 있었다. 모친 스스로도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한쪽을 향한 애정이 전무한 것은 아닐 테니까. 결국 그녀도 엄마의 자식이었다. 엄마는 그녀도 나름대로 사랑하고, 진심으로 잘 되기를 바라고 있다. 좀 더 아프고 애틋한 자식은 있어도, 자식 중 누가 못 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세상에 없으리라.
지금으로선 그것만이 위안이었다.
***
해가 바뀌고, 일주일이 훌쩍 흘렀다. 약속했던 1월 3일이 되어도 한주혁을 만나지는 못했다. 연락도 거의 주고받지 못했다. 프로젝트가 끝났어도 클라이언트사와 이런저런 협의를 마무리 짓느라 바쁜 듯했다.
그녀도 정신없는 며칠을 보냈다. 한주혁의 소개를 받은 과외 학생의 집을 방문해 인사를 나누고, 모친이 준 돈으로 영어 학원을 등록하고, 밀린 소설을 쓰는 등 나름 바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늘 휴대폰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언제든 그가 연락하면 바로 갈 수 있도록 대기 상태에 있었다. 심지어 잠자리에 누울 때도 행여나 못 들을까 싶어 휴대폰을 바로 귓전에 대고 잠들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만나게 되었다. 한주혁은 약속 날짜보다 닷새 늦게 연락을 해왔고, 그녀는 오전 학원 수업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그의 오피스텔이 있는 강남역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만나 밥을 먹고 그의 작업실 겸 사무실로 갈 예정이었다.
처음으로 그의 공간을 보게 된다는 생각에, 한 시간 전부터 인근 카페에서 기다리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직원들이 퇴근하는 6시를 20분 남겨놨을 때였다. 자꾸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또래 남자가 그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드문 일도 아니었다. 예서는 바로 고개를 돌리고 좀 더 먼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는데 기척이 느껴졌다. 그 남자가 어느새 제 옆까지 다가와 있었다.
“혹시, 민예서 아니에요?”
“네? 누구세요…?”
대뜸 시인하기 전에 그의 정체부터 물었다. 혹시 우리 학교 학생인가?
“예서 누나 맞구나! 와, 어릴 때랑 완전 똑같네. 누나, 나 모르겠어? 나, 경현이잖아!”
“경현이…?”
예서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두 눈 가득 서려 있던 경계심이 빠르게 사라져갔다.
“설마 남경현?”
“그렇다니까! 우와, 이게 몇 년 만이야. 15년만인가?”
예서와 한 살 터울인 경현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여동생, 민자영의 외동아들이었다. 아버지의 휴가 때마다 남부 소도시에 있는 할머니 댁과 고모 집에서 여름과 겨울을 지냈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떠올랐다. 그때 어딘가 낯익은 중년 여성이 카페로 들어서서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남경현! 늦겠다, 여기서 뭐 하….”
단정하게 차려입은 50대 여자가 예서를 보더니 어머나!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자영 고모…?”
“어머나, 이게 누구야! 너 예서 맞지?”
고모는 경악을 감추지 못하더니 그녀를 냅다 꼭 끌어안았다. 뒤이어 고모부까지 합세해 카페 한쪽은 15년 만에 맞는 상봉의 현장이 되어 버렸다.
고모 가족은 예서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전부터 준비했던 이민 승인이 떨어져 미국으로 떠났다. 그 후로는 한 번도 연락이 닿은 적이 없었다. 비단 이민을 갔기 때문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로 모친이 시댁과 절연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정우가 버지니아주에 유학 가 있었구나. 너희 엄마도 정말 지독하다. 애를 미국에 보내면서, 아무리 멀어도 그렇지 우리에게 연락 한 번을 안 하고….”
고모의 집은 버지니아주와 완전히 정반대인 LA에 있었다. 작은 일식집으로 시작한 식당이 무척 잘 돼서 지금은 그 건물까지 인수하고 완전히 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거리상 정우와 연락이 가능했다 한들 만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모는 못내 아쉬운 듯했다. 세 사람은 고모의 시댁 어르신의 부고로, 몇 년 만에 한국에 들어왔고 마침 내일 출국하는 날이라 시댁 식구들과 다 같이 식사하러 건너편 한정식집에 왔다고 했다.
“경현아, 너 아빠랑 먼저 식당에 가서 어르신들 오시는지 챙기고 주문해 놔. 다 도착하시면 전화하고.”
“어… 알았어요. 대신, 누나 연락처 좀. 미국 가서도 연락하게. 내일도 공항에서 연락할게.”
경현이 그녀의 번호를 저장한 뒤 고모부와 식당으로 향했다. 고모는 단둘이 남겨지자 더 편해진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그녀와 단둘이 할 얘기가 있었던 것 같았다.
“내가 너랑 정우 보려고 중학교 때 여러 번 집에 찾아가고 연락한 거 넌 모르지? 미국 가서 자리 잡고 한국 들어왔을 때 너희가 너무 보고 싶고 궁금하더라고. 역시 피가 땡기는 법인지…. 니들 할머니도 너희가 가끔 꿈에 나타난다 하시고 그러셨거든.”
“아… 전혀 몰랐어요.”
“당연히 몰랐겠지. 집은 다른 데로 이사 가 버리고, 약국에 찾아갔더니 니들 엄마가 경찰 부른다고 난리를 쳤으니까. 다신 나타나지 말라고. 몇 년 뒤에 다시 찾아가 보니 약국이 있던 건물도 재건축되고 너희 엄마는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하더라고.”
“…….”
“아무튼 셋 다 잘 지낸다니 정말 다행이야.”
“고모. 궁금한 게 있어요.”
예서가 망설임 끝에 운을 뗐다. 15년 만에 만난 그녀와 할 얘기가 무척 많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엄마가 왜 할머니와 고모에게 그렇게… 절연까지 결심하게 된 거예요?”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렀고 그녀도 성인이니 물어봐도 될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고부갈등으로 친할머니와 모친 사이가 나빴다 해도, 아빠의 죽음이 할머니나 고모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할머니가… 그래, 우리 어머니지만 네 할머니가 잘못하신 것도 있지.”
고모는 무거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할머니가 네 엄마를 심하게 몰아붙였어. 그렇게 결혼을 결사반대했는데도 기어이 결혼해서 아들을 죽게 했다고…. 평소에 자주 다니던 점집에서 그랬대. 둘이 악연이라 부부가 되면 하나는 제 명이 못살고 일찍 죽는다고. 뭐, 미신이고 우연이지. 아무튼….”
예서는 경악한 얼굴로 고모의 이어지는 얘기를 들었다. 그대로 있다간 하나 남은 장손까지 잘못될 수 있다며, 정우를 데려가서 직접 키울 테니 애를 내놓으라고 난리를 쳤다는 거였다. 정작 엄마는 아빠가 그렇게 길에서 비명횡사한 건 순전히 할머니 탓이라며 비난한 모양이었다.
“아빠가 그날 할머니 보러 마산에 내려갔다가 그 사고를 당한 거였잖아. 너희 엄마가 비 오니까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도 아빠가 기어이…. 할머니가 무릎 아프시다고 전화로 울고 그러시니까 걱정된다고. 서로 죽였다고 장례식장이 떠나가라 악을 쓰고… 아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어.”
“…….”
“내 모친이지만 정말 아들 사랑이 지독하셨지. 요양원에 계시는 지금도, 우리 아무도 기억 못하는데 민도훈, 이 석 자만 용케 기억하시더라. 우리 도훈이 왜 안 오냐, 어디 갔냐, 학교 갔냐 그러시는데 참….”
도훈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고모는 갑자기 울컥, 속에서 치미는지 냅킨으로 눈가를 찍었다.
“지나고 나니 이런 말도 한다만, 네 엄마 입장에선 시모를 모시고 사는 거나 매한가지였을 거야.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해 쥐잡듯 잡고 아들과 이간질 시키시고. 휴우….”
예서는 고개를 떨군 채 묵묵히 있었다. 어릴 적 장례식장에서 고성이 오가던 기억은 하나의 트라우마처럼 아직 기억에 남아 있었다. 당시에는 어른들이 그녀와 정우만 다른 방으로 데려가 놓는 바람에 무슨 일인지까진 몰랐건만, 그런 내막이 있었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