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43)화 (44/124)

<43화>

-응. 예서야. 몸은 괜찮아?

“네. 괜찮아요. 조금 뻐근하긴 하지만….”

여느 때처럼 온화한 저음을 들으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여전히 바쁜 모양인지, 익숙한 소음이 잡음처럼 공백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선배. 크리스마스 선물 정말 고마워요. 저도 실은 생각해 둔 게 있긴 한데…. 어젯밤 갑자기 만나게 되느라 미처 준비를 못 했어요.”

-걱정 마. 아까도 말했듯이 최고의 것으로 받은 거나 다름없어.

“근데 저… 호텔 하룻밤 더 예약했다는 거 취소해도 괜찮아요. 선배가 룸서비스 시켜준 것만 먹고 저녁 전에 집에 갈 거라서….”

-이미 체크아웃 넘기지 않았어? 지금 1시가 다 되어가는데.

“아, 정말요? 어쩌지-”

-걱정 말고 좀 더 있다 가. 저녁 전에만 들어가면 되는 거면 몇 시간 더 쉬어.

혹시 그가 오늘도 올 수 있을까. 그럼 집에는 어떻게든 다른 핑계를 대서 하루 더 머물 결심이었다. 하지만 그 기대가 무색하게, 한주혁은 담담하게 덧붙였다.

-우린 1월 3일이나 보자. 그때까지 연락 잘 안돼도 서운해 하지 말고.

“아… 알았어요, 선배.”

서운함을 애써 삼키려는 찰나, 휴대폰 너머로 문 열리는 소리와 바깥의 소음이 들렸다. 잠깐 테라스 같은 곳으로 나온 것 같았다.

-그보다, 지금 생각났는데 병원 가서 사후피임약 처방전 받아야겠지?

덤덤하면서도 염려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어제 갑자기 그렇게 돼서 콘돔은 생각도 못 했어. 사 놓긴 했지만 어제는 너와 그럴 생각이 아니었으니까. 앞으로는 꼭 철저히 상비하고 다닐게. 미안해.

“네? 아… 저 생리불순 때문에 얼마 전부터 피임약을 먹고 있어서 괜찮아요.”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예서는 아쉬움을 누르며, 많이 바쁜 것 같으니까 나중에 다시 연락하자며 황급히 작별을 고했다.

괜찮아. 이제 1월 3일 이후로는 여유가 많을 거라고 했잖아. 이 정도로 초를 다투는 프로젝트는 이번만이고, 이제 졸업 전까지는 밤새는 일도 없을 거라고 했으니까. 스타트업 동료인 선배들이 제대하고 복귀할 예정이라 더 여유가 생길 거라고….

호텔 직원이 룸서비스 식사를 세팅해두고 간 테이블 위에는 정갈한 한식이 놓여 있었다. 각종 채소가 알록달록, 가지런히 놓인 산채비빔밥과 두부구이, 성게미역국이 보기에도 맛깔스러웠다. 거짓말까지 하고 외박을 했는데 새삼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싶었다.

밥을 먹고 나자 거짓말처럼 다시 졸렸다. 예서는 창가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다시 침대에 누워 잠에 빠졌다.

오늘까지만…. 딱 오늘까지만 게으름을 피우고 내일부터는 다시 부지런한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굳게 결심하기 바빴다.

***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다. 그것도 깊이. 그 마음이 깊을수록 더 위험하고 어리석었다. 무아지경으로 통제범위를 벗어나 이성을 잃고 감정에 매몰되는 건 금물이었다.

-뭐든지 적당히 마음을 줘야 비극이 없는 법이야. 사람에겐 특히. 지나치게 깊이 빠져 버리면 반드시 불행이 뒤따르게 되어 있어. 네 부모처럼. 그리고 그 여자처럼.

서 집사는 어릴 적 그를 재우며 그렇게 속삭였다. 죽은 듯이 잠든 척하는 건 쉬웠다. 툭하면 싸워대던 아버지와 어머니, 어머니의 고함을 들으며 제 방에서 자는 척 시체처럼 꼼짝도 않았던 나날 동안 이미 인이 박여 있던 까닭이다.

서현영은 그 ‘세 사람’의 관계를 간파하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생각해 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그녀는 집안의 대소사는 물론, 고용인 가족의 모든 동향을 낱낱이 파악하고 미리 대처하는 중책을 맡은 사람이었다.

-가엾은 것. 그래서 세상은 공평하지 뭐니.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이 집에서 행복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 말이야. 너도 포함해서….

그녀는 은은한 스탠드 등을 끄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방을 떠나기 직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너도 멀쩡히는 못 살겠지. 기억이라도 잃지 않는 한.

문짝이 끼익, 울며 혀 차는 소리를 집어삼켰다.

-그런 광경을 두 눈으로 보고도 제대로 자랄 수가 있을까.

그로부터 며칠 후 서현영도 죽었다. 그녀는 휴가를 맞아 오랜만에 찾은 고향 읍내에서, 행인에게 무작정 흉기를 휘두르던 정신착란자의 칼에 찔려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숨을 거뒀다.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

이제 그 세 사람을 둘러싼 비밀을 아는 사람은 그와 그의 이모인 류혜수, 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주혁에게 아무런 위안도 되지 못했다. 서 집사가 마지막으로 이불을 덮어주고 불을 끄기 전에 남겼던 말만이 심장 깊이 각인되어 있을 뿐.

하지만 이미 빠져 버렸는데 어쩌지.

일단 빠져 버린 이상, 활로는 없었다. 출구를 찾고 싶지도 않았다. 내내 밀어내고 외면하려 애썼던 사람과 이어진 것 자체는 되돌리고 싶지 않았다. 결국 예서에게, 정확히는 예서에 대한 제 감정에 두 손 두 발 다 든 것에 후회는 없었다.

가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다른 새끼에게 줄 수는 없었으니까.

그는 테라스 난간에 등을 대고 삐딱하게 선 채 머리를 뒤로 젖혔다. 뒤통수에 피가 훅 몰리며 눈을 감아도 아찔했다. 조금만 더 힘을 빼면 그대로 추락할 것도 같았다.

그래서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가지되 최대한 거리를 두는 것.

늘 꺼내놓고, 바라보고, 만지고, 곁에 둘 순 없다. 정말 소중한 것일수록 꼭꼭 숨겨야 하는 것처럼, 서랍 속에 넣고 가끔씩 정말 견디지 못할 때만 꺼내 정성껏 손질하고 감상하는 보석을 쥔 것 같았다.

…서랍 속에 꽁꽁 숨겨놓진 못하겠지만.

주머니 속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주혁은 난간 위 아슬아슬한 곡예를 멈추고 상체를 똑바로 세웠다.

민예서면 바로 받진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제게 더 애태우고 안달하길 바라는 저열한 바람, 휘둘리는 건 어디까지나 민예서이며 주도권은 제 손에 있길 바라는 마음이 혼재해 있었다.

하지만 발신자는 예서가 아니었다. 그는 부정할 수 없는 실망감을 떨쳐내려 애쓰며 덤덤히 통화에 응했다.

“네, 한 박사님.”

-포멀한 거 보니까 통화하기 좋은 타이밍이 아닌가 보네. 방문일정만 체크하고 바로 끊을게. 언제 올 거야?

“연말은 도저히 안 되겠고 해 지나고 첫 가족 모임에서 뵙죠.”

-진료는? 그 뒤에 정하게?

“당분간 보류할게요. 전에 말했듯 잠시 쉬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예서와 첫 키스를 한 뒤로는 한 번도 악몽을 꾸지 않았다. 안정제를 먹을 필요가 없어 쭉 미뤄두다, 얼마 전 서랍 속 약병을 보고 나서야 2주 넘게 복용을 중단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한종한은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금전적인 것을 떠나, 환자가 더는 그를 찾지 않게 될 때만큼 반가울 때는 없었다.

-혹시 전에 말한 그 친구랑 잘 된 거야? 그래?

“사생활은 다음에 얘기하죠, 지금 전화가 들어와서.”

-어, 그래. 그럼 내년에 보자!

사촌 형 겸 담당의는 바로 통화를 종료했다. 다른 전화가 인입된 건 사실이지만 받을 생각은 없었다. 발신자란에는 류혜수가 떠 있었다.

주혁은 이어지는 이모의 전화를 무시하고 사무실로 되돌아갔다.

***

12월, 세밑이 가까운 날의 해는 6시도 되기 전에 수명을 다하고 있었다. 예서가 집에 들어섰을 때 외할머니가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저녁을 먹었다. 늦은 시간 모친이 귀가했고, 모녀는 거실에 마주 앉았다. 외조모는 일찌감치 안방에서 자고 있었다. 예서가 먼저 운을 뗐다.

“엄마. 먼저 확실히 할 게 있어요. 저 인하 오빠랑 아무 사이도 아니고 사귈 일도 없어요. 그러니까… 엄마도 정우랑 엮어서 그런 걸 바라진 않으셨으면 해요.”

“그건 그냥 해 본 말이야. 네 입장이어도 똑같고! 정우가 어디 좋은 데 장가가는데 네가 변변히 취직도 못 하고 있으면. 그럼 내가 똑같이 안 바랐을 것 같아?”

“저는 제 미래까지 정우랑 연관돼서 강요당하고 싶진 않아요. 아무리 형제자매라도 정우 인생은 정우 인생이고 저는 저니까요.”

새벽녘 연락을 받고 누그러졌던 마음도 잠시, 다시 모친을 마주하자 어젯밤의 설움이 복받쳤다. 예서는 한숨을 크게 들이쉬고 어조가 공격적으로 나가지 않게끔 마음을 다잡았다. 이래서야 화해가 아니라 다툼의 연장이 될지도 모른다.

모친은 그녀의 정색에 조금 놀란 듯 입술을 달싹이다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된 것, 허심탄회하게 속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그래, 솔직하게 말할게. 내가 너보다 정우에게 더 신경 써 온 건 사실이야. 그리고 엄마는 네가 그걸 좀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적어도 정우가 졸업하고 제 앞가림할 수 있을 때까지는.”

“…….”

“하지만 네가 정우보다 덜 중요하거나 덜 사랑해서는 아니야, 전에도 누누이 말했지만… 그 애는 너보다 한참 모자라잖니. 만약 너랑 정우가 바뀌었어도 똑같았을 거야. 지금 정우에게 하듯 널 유학 보내고 더 신경을 썼겠지. 안 그래?”

이 약사는 답답한 듯 팔짱을 끼며 등을 소파에 기댔다.

“너도 나중에 결혼해서 애들 낳아 키워보면, 그때는 내 마음 알 거다. 아픈 손가락은 그 손가락이 더 이뻐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더 아프기 때문이야.”

예서는 뭔가 말하려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모친의 말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갔지만, 무조건 납득하기엔 어폐와 모순이 있었다.

엄마의 편애는 아주 어릴 때부터였다. 가물가물한 기억 속, 둘이 다투거나 정우가 잘못했을 때도 그녀는 늘 그의 편에 있었다. 지나치게 감싸고 돌았기에 정우가 지금처럼 유약하고 이기적인 성정이 된 탓도 있다고 생각했다.

“정우는 어릴 적부터 너랑 너무 차이가 났어. 모든 면에서.”

그 속을 읽기라도 한 듯 이 약사가 말을 이었다.

“글도 한참 늦게 떼고 심지어 철도 덜 들어, 학업이나 사회성, 성격도 모나고 저밖에 모르고. 몸이 허약해서 그런지 까탈스럽고 예민했고.”

이 약사는 아들에 대해 독설을 늘어놓곤 이내 후회하듯 길게 한숨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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