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 1시, 다시 2시를 가뿐히 넘기고 있었다. 예서는 편의점 맨 구석에 캔 커피 하나를 놓고 앉아 초조하게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설마 사고가 나거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아직 가본 적은 없었지만 그의 작업실은 박성준의 오피스텔 근처라고 했었다. 차가 막힐 시간도 아니니 벌써 몇 번은 오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그녀가 참다못해 전화를 걸어 보려던 찰나, 편의점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서야.”
한주혁이 긴 코트 차림으로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피로감이 짙은 눈, 한층 야윈 턱선에도 불구하고 생각했던 것만큼 초췌하진 않았다.
“선배….”
“미안해, 너무 늦었지. 오는 도중에 코딩 뭐가 잘못됐다고 해서 다시 사무실에 갔다가 처리하고 오는 바람에. 너, 옷이 왜 그래? 그러고 나왔어?”
예서는 입술을 꾹 감쳐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더 이상 입을 열었다간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였다. 황량한 겨울 추위를 뚫고 텅 빈 편의점에 나타난 그가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가자. 차에 가서 얘기해.”
그가 제 코트를 벗어 예서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건물 뒤에 세워둔 차에 들어가 앉고 나서야, 눈물이 와락 터졌다. 히터를 틀던 한주혁이 그녀를 돌아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봇물 터지듯 터져 버린 울음은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가 콘솔박스 너머 몸을 기울여 그녀를 비스듬히 안았다. 다정한 토닥임은 있었지만 울지 말라는 말은 없었다.
한주혁은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마침내 진정이 되었을 때 티슈로 눈두덩이며 뺨을 닦아주긴 했지만, 이번에도 무슨 일인지 독촉하진 않았다. 그녀가 먼저 털어놓을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리기로 한 것 같았다.
“엄마랑… 좀 다퉜어요.”
예서는 코를 훌쩍이고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대강의 상황을 들려주었다. 얘기를 마쳤을 때 계기판의 시간은 3시가 가까워 있었다.
“어머니께 인사드리러 갈까?”
한주혁은 그녀의 한 손에 제 손을 깍지 끼며 진중하게 물었다.
“일단 순서상, 내가 네 남자친구란 걸 확실히 인지시켜 드려서 최인하를 다시는 언급하실 일 자체가 없게 하고. 그다음으로는.”
그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독립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네? 그건….”
“네 가족에 대한 일이니까 말하기 상당히 조심스럽지만… 어머니께서 근본적으로 가치관을 바꾸시거나 생각을 달리하셔서 변하지 않는 한,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아서.”
“…….”
“타인은 절대 네가 원하는 식으로 바뀌지 않아.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이고 가족이라도. 그러니까 달라지는 건 네 쪽이 되는 수밖에 없어. 아니면 어머니 사고방식에 온전히 순응하거나. 그럴 수 없다면 거리를 둬야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제삼자 입장에서 지극히 냉철하고 이성적인 조언이긴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실행하긴 어려웠다.
“선배 말에는 동의하지만 자취할 자금도 없….”
그때 휴대폰에서 희미하게 벨이 울렸다. 모친이었다. 그녀가 어쩔까 망설이는 사이에 전화가 끊겼다. 곧이어 문자가 전송되어 왔다.
[지금 새벽 3시가 다 돼가는데 어디니? 계속 안 들어올 거야?]
톡 쏘는 어투긴 했지만 그래도 걱정은 되었던 모양이다.
“누구? 혹시 어머니셔?”
“네. 잠시만요….”
예서는 잠시 망설이다 문자를 보냈다.
[친구 집이예요. 내일 알아서 들어갈게요.]
“친구 집이라고… 내일 들어가겠다고 답문 보냈어요. 계속 안 들어갈 순 없지만… 지금은 엄마랑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시금 약해지는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상황을 대강 눈치챈 듯 한주혁이 시동을 걸었다.
“일단 호텔로 갈게. 거기서 자고 내일 들어가.”
“네? 호텔요?”
“여기서 적당히 떨어진 곳으로 갈게. 다른 생각 없으니까 안심해도 돼.”
“괜찮아요, 선배. 저 그냥 찜질방이나 24시간 만화카페 같은 데 갔다가 오전에 들어가면….”
“내가 불안해서 안 돼. ”
그가 차를 출발시키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떤 미친놈이 자기 여친이 그런 데서 혼자 밤샌다는데 좋아하겠어. 위험하잖아.”
담담한 어조였지만 심기가 꽤 불편해 보였다.
“그럼 독립이나 자취 얘기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남이었으면 절대 가만 안 있었을 텐데 가족이니까.”
그는 답답한 듯 말끝을 흐렸다. 무거운 한숨도 뒤를 따랐다. 예서가 운전석의 그를 다시 돌아보았다. 갑자기 든든한 보호자가 생긴 것 같아서 기뻤다. 엄마와의 불화로 속상한 것과는 별개의 감정이었다.
“처음으로 내 편이 생긴 것 같아요.”
“…….”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아빠밖에 없었는데….”
“앞으로는 참지 말고 나한테 바로 연락해. 무슨 일이든.”
“고마워요, 선배. 하지만 선배, 바쁠 때도 많으니까…. 선배에게 성가신 짐이 될까 봐….”
“그런 생각은 하지 마. 성격상 네가 못 참을 정도면 심각한 일이잖아. 단순히 못 만나서 오라고 조르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건 중요한 문제니까 망설일 필요 없어.”
“네… 알았어요.”
예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렇게 말해줘서 너무 기뻤다. 하지만 속으로는 자제할 결심이었다. 오늘만 해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걸 뻔히 알면서도 결국 경솔하게 연락을 해 버리고 말았다. 그에게 미안했지만, 역시 연락하길 잘했다는 이기심이 더 컸다.
차가 호텔 부지로 들어서는 순간 예서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드라마나 예능에도 가끔 나오는, 서울 도심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5성급 호텔이었다.
“선배? 여긴….”
“저번에 예약했다 연기한 룸이라서 오늘 쓸 수 있어. 너 자는 거만 보고 갈게. 내리자.”
예서는 얼떨떨하니 차에서 내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로 들어설 때까지, 그의 코트를 걸친 채 후드티로 머리를 훅 뒤집어썼다. 10대 때 수학여행 이후로는 아주 오랜만에 와보는 호텔이라 낯설었다. 사실 상상도 못 했던 최고급 호텔이란 것보다는 남자와 단둘이 호텔에 왔다는 것 자체가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왜 그래? 얼굴 좀 들어.”
“그게….”
“우리 둘 다 성인인데 못 올 데 온 것도 아니잖아. 불륜도 아니고.”
그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한술 더 떠 예서를 품에 포옥 당겨 안아 얼굴이 더 가려지게 해 주었다. 복도 맨 끝 객실로 그러고 걷는데 한주혁이 그녀의 볼을 살짝 잡아당겼다.
“근데 좀 놀랐어. 너 맨얼굴.”
“네?”
예서가 화들짝 놀라며 그로부터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완전히 민낯인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 어떡하지? 학교에서 볼 때는 그래도 쿠션이나 팩트는 바르고 있었는데.
“아, 어떡하지. 좀 칙칙하고… 그렇죠?”
“전혀. 아기 토끼 같아. 너무 하얗고 보들보들해서.”
예서가 고개를 더 숙이려 하자 그가 다시 뺨을 꼬집듯 매만지며 객실 문에 카드키를 가져다 댔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객실은 한 폭의 그림처럼 깔끔하고 아름다웠다. 한쪽 통유리창 너머 반짝이는 야경이, 별관 후원의 눈 조각 장식과 어우러져 눈이 부셨다.
“와, 너무 예쁘다…!”
“핫초코 마실 거지? 씻고 와서 그거 마시고 자. 나도 다시 가보게.”
한주혁은 홈바처럼 보이는 작은 공간으로 사라졌다. 예서는 잠시 머뭇거리다 욕실로 향했다. 자쿠지 욕조와 스탠딩 샤워기 모두 구비된 욕실은 제 방보다 더 컸다. 대체 하룻밤에 얼마짜리 방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이 객실을 그날… 사귀기로 했던 날에 예약해뒀다는 거지?
새삼 가슴이 뭉클했다. 이렇게 훌륭한 객실에서 그녀와의 처음을 보낼 계획이었다니.
예서는 서둘러 양치하고 스탠딩 샤워기 탭을 열었다. 자쿠지 욕조에서 씻어 보고 싶긴 했지만 방에서 기다릴 선배가 마음에 걸렸다. 집에서처럼 5분 만에 후다닥 몸을 씻고, 머리를 대강 말린 뒤 행어의 하얀 배스가운까지 걸치고 나왔을 때였다.
한주혁이 보이지 않았다. 환하게 불이 켜진 거실에는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반대쪽의 컴컴한 베드룸으로 가보았다.
“선배…?”
그는 킹사이즈 침대 구석에 누워 미동도 않고 있었다. 스웨터 위 너른 가슴이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 규칙적인 숨결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아팠다. 얼마나 피곤하면 이렇게 시체처럼 죽은 듯 자는 걸까. 하지만 짠한 것도 잠시, 예서는 그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 더 자게 해 주고 싶었지만 작업실로 빨리 가봐야 하는 상황일 수도 있었다. 그때 거실 쪽에서 위잉,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홈바 협탁 위에 머그잔과 그의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 예서가 손을 뻗으려는 찰나, 문자 창이 화면 위로 다시 떠 올랐다.
[한 대표. 우리끼리 대강 마무리하고 지금 퇴근하는 중.]
문자가 연이어 떠올랐다.
[이따 오후 화상회의에 맞춰서 다시 올게.]
아, 그럼 당장 안 가봐도 되겠구나. 다행이다.
안도감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예서는 그가 만들어둔 핫 초콜릿을 입으로 가져갔다. 미지근하니 식어 있었지만 달콤했다. 흔한 인스턴트일 텐데도 지금까지 먹어본 핫 초콜릿 중 제일 맛있는 것 같았다.
예서는 거실 불을 끄고 야경을 잠시 바라보다 침실로 들어갔다. 혹시 그를 깨울까 싶어 소파에서 잘까 했지만, 앉을 때와는 달리 눕는 건 그리 편하지가 않았다.
한주혁은 여전히 죽은 듯 자고 있었다. 예서는 곧은 콧대 아래 손가락을 살짝 대보았다. 다행히 숨결이 느껴졌다.
그의 건장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침대는 무척 넓었다. 시간은 벌써 새벽 4시가 다 되어 있었다. 불을 끄고 그의 옆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정신이 어느 때보다 더 맑았다. 바로 옆에 다른 사람도 아닌, 한주혁이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살며시 고개 돌려 그의 옆선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리고 있어 긴 속눈썹과 입체적인 콧대, 깎은 듯 날렵해 보이는 턱선과 목울대가 암순응된 시야에 들어왔다.
예서는 그의 옆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꿈같은 현실이 밀려나며, 모친과 대치했던 몇 시간 전 상황이 떠올랐다. 끝까지 정우밖에 모르는 엄마에 대한 실망, 설움으로 가슴이 다시 북받쳤다.
선배 말대로 정말 독립이라도 해 버릴까. 열심히 알바해서 학교 앞 셰어 하우스라도 구하면 어떻게든 될 것도 같은데. 하지만….
[지금 새벽 3시가 다 돼가는데 어디니? 계속 안 들어올 거야?]
모친이 새벽에 귀가 문제로 전화해 온 적은 처음이었다. 시험 기간 동안 도서관에서 밤을 새울 때도, 심지어 고등학생 때도 한 번을 연락하지 않았었는데.
그래도 엄마잖아. 당장 독립해 버리면 약국이나 집안 살림은 혼자 어떻게 하시라고….
결국 약해지는 속내가 가물거리는 의식 너머로 침잠해 들어갔다. 머리가 스르르 기울어지며 몸이 어느새 한주혁에게 바짝 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