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38)화 (39/124)

<38화>

예서는 욕실에서 나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친구들로부터 안부 톡과 문자가 여럿 와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선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망설이다 한주혁의 번호를 화면에 띄웠다. 용기 내어 전화하려다 결국 문자창으로 바꿨다.

[선배. 지금도 많이 바빠요?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요.]

답문은 오지 않았다. 읽은 표시도 없었다. 문서를 열어 소설을 쓰면서도 신경은 휴대폰으로 내내 가 있었다. 차라리 읽기라도 했다면 마음이 편했을 것 같은데 확인도 하지 않는다는 게 못내 서운했다.

바보. 선배가 서운해하지 말라고 했잖아. 확인도 못 할 만큼 바쁜 거란 뜻이고.

이성적으로는 충분히 납득이 되었다. 문제는 감정이 조금씩 더 이성을 앞지른다는 데 있었다.

이러지 않을 거라 믿었는데. 아니, 이러면 안 돼. 이제 막 사귀기 시작했는데 벌써부터 지치게 하면…. 투정 부리거나 우는소리 해서 선배를 실망시키면….

속이 답답하고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갈증이 나서 방을 나와 주방으로 소리 없이 향할 때였다.

“아직도 네 시댁하곤 연락 뚝 끊고 사나. 애들 고모야는 일본인가 미국인가 이민 갔다캤지만 니 시모는 아직 남부 거기 있재.”

“요양원에 있는 모양인데 내 알 바 아니죠. 애들 아빠 죽었으면 더 이상 내 식구도 아니고, 인연 확실히 끊어 버렸으니까.”

“하긴 사돈 양반이 민 서방 4대 독자라고 오죽 유난을 떨었노. 오만 유난 다 떨다 못해 니 시집살이도 억수로 호되게 했재. 쯧….”

할머니가 요양원에 계시는구나. 많이 안 좋으신가….

결혼 초부터 분가해 사는 동안에도 친조모가 모친에게 시집살이가 심했다는 얘기는 어릴 적부터 늘 어깨너머로 접해왔다. 아빠가 살아 있을 때 고모가 몇 번 중재하러 왔다가 되려 엄마와 크게 싸운 적도 몇 번 있었고, 부모님은 평소 사이가 좋다가도 조모와 관련된 이슈가 생기기만 하면 며칠간 싸늘한 냉기가 돌았었다.

그럴 때마다 모친은 정우만 데리고 외갓집으로 며칠 가 있곤 했다. 저도 데려가라고 울면서 매달렸지만 한 번도 같이 데려가지 않았다.

-너라도 아빠랑 있어야지. 정우는 몸이 약하니까 엄마가 돌봐야 되잖니. 다음 주에 올 테니까 착하게 있어.

예서가 주방으로 몸을 돌리려다 다시 멈춰 섰다. 조곤조곤 이어지던 할머니의 목소리에 갑자기 제 이름이 실려서였다.

“아까 길에서 마주친 그 아가 김 약사 아들이가. 니가 예서랑 잘됐으면 좋겠다던 그 막내? 잠깐 봐도 인물 훤칠하고 성격도 싹싹하니 억수로 좋아 보이긴 하드만.”

“네. 그 집이 은근히 알부자예요. 그런 집에 시집가면 예서도 편하고 좋죠, 뭐. 봐서 우리 정우, 졸업하고 들어오면 그 집 회사에 자리 하나 만들어달라 할 수도 있고. 대기업은 아니지만 수출도 꽤 잘 되고 아주 건실한 업체거든요. 사실 그것 때문이지, 뭐.”

예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그녀는 숨소리도 못 내고 그 자리에 굳은 채 미동도 하지 못했다.

“아야, 그 먼 데까지 유학 보냈으면 그쪽에서 자리 잡는 게 안 낫나. 한국에 와서 취업해도 큰 회사에 가야재, 아무리 김 약사네 회사가 탄탄해도 중소기업 아인가 말이다.”

“아유, 엄마가 잘 모르셔서 그렇지 요즘은 유학 다녀온다고 다 대기업 들어가고 현지에 자리 잡고, 그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정우 가뜩이나 몸도 약하고 마음도 약한 앤데 타향살이를 어떻게 더 시켜. 심신 허약해서 군대도 면제받은 애를…. 유학 보낸 건 남자 학벌, 평생 따라다니니까 그런 거죠.”

“그래, 그건 맞다. 그래도 예서 결혼은 니 맘대로만 기대하진 마라…. 요즘 다 지들이 알아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그런 거고, 이제는 여자들도 전문직으로 잘되면 결혼도 늦게 하거나 아예 안 하드라. 시골에 과수원집 큰 딸내미 있다 아이가. 그 아가 변호사 되더니 마흔이 되도록 시집갈 생각을 안 한다카이.”

“나 같아도 그 집 딸이면 보고 들은 게 있어서 안 하죠, 뭐. 아버지란 작자가 툭하면 바람 나서 첩들이 수시로 들락거려, 재산 탕진에 마누라는 허구한 날 개 패듯 두들겨 패고…. 그런 꼴을 애기 때부터 봤으니 결혼해봤자 좋은 꼴 하나 볼 거 없다 생각 안 하겠냐고요.”

“아이고, 말이 나왔으니 지난주에 뭔 일 있었는지 아나! 그 집 세 번째 첩년이….”

대화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꺾이고 나서야 예서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방문이 벌컥 열린 게 더 빨랐다. 엄마가 화장실 불을 켜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머, 깜짝 놀랐네. 어두운 데서 귀신처럼 뭐 하고 있어?”

“엄마.”

만약 모친과 맞닥뜨리지 않고 바로 방에 들어갔더라면. 그랬다면 늘 그랬듯 혼자 울면서 속상함을 달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한주혁과 연락이 안 되는 상황에다, 평소 가졌던 모친에 대한 서운함과 설움까지 밀려와 감정이 한계에 달해 있었다.

“엄마. 내가 인하 오빠랑 잘되길 바랐던 게… 결국은 정우 때문이었어요?”

“뭐? 너… 할머니랑 하는 얘기 들은 거야?”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우를 위한 거였네요, 결국. 정우 취업 안 되면 인하 오빠 아버지 회사에 부탁하게.”

“아니 얘가 오밤중에 왜 이래, 갑자기? 당연히 널 위해서인 것도 있지! 네가 어딜 가서 그만한 신랑감을 만날 수 있겠어? 인하도 너무 괜찮은 애고, 집안, 재력, 어르신들 인품, 뭐 빠지는 게 없잖아.”

“내 결혼인데 날 위해서인 것도 있다고요…?”

-봐서 우리 정우, 졸업하고 들어오면 그 집 회사에 자리 하나 만들어달라 할 수도 있고. 대기업은 아니지만 수출도 꽤 잘 되고 아주 건실한 업체거든요. 사실 그것 때문이지, 뭐.

사실 그것 때문이지, 뭐- 그 마지막 한마디가 아직도 생생했다. 뒤통수를 거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엄마. 나랑 정우, 쌍둥이 맞아요?”

“뭐…?”

“엄마가 이럴 때마다… 나만 밖에서 데려온 자식 같아요.”

뺨에 뜨뜻한 눈물이 흘렀다. 사무치는 배신감에 머리가 띵했다. 둘 다 똑같이 애정하지만 정우가 좀 더 손이 많이 가는 것뿐이다, 그렇게 단언했던 모친의 말을 믿었던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멍청한 민예서. 뭘 기대했던 거야. 결국 엄마는 늘 정우가 최우선이고, 정우가 가장 애틋하고, 정우를 위해서만 사는 사람인데.

그녀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아마도 평생.

“저도 이젠 지겨워요! 지쳤다고요!”

“아이고, 한밤중에 왜들 큰 소리를 내고 그래? 응?”

할머니가 깜짝 놀라 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평소에 늘 얌전하고 차분한 손녀가 이렇듯 언성을 높이니 꽤나 당황한 눈치였다. 모친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딸에게 삿대질을 해 보였다.

“얘가 어디서 소리를 빽 지르고 대들어? 할머니도 계신데!”

“야야, 네 소리가 더 크다. 조용히 해라, 이웃집에서 신고 들어오겠다!”

예서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그대로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설움이 복받친 나머지 옷과 지갑을 챙길 여유도 없었다. 아이고, 야야 이 밤중에 어디 가니! 냅둬요, 애도 아니고 나가든지 말든지, 할머니의 고함과 모친의 투덜거림이 등 뒤로 나란히 들려왔다.

아파트 동을 나서자마자 싸늘한 한기가 전신을 엄습해왔다. 도망치듯 아파트 부지를 빠져나와 놀이터 벤치에 앉자마자 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방에서 입고 있던 기모 후드티, 트레이닝 바지가 다였다. 얼결에 꿰어신은 어그부츠 외에는 도저히 외출로 볼 수 없는 차림새였다. 다행히 휴대폰은 바지 주머니 속에 있었다.

예서는 을씨년스러운 놀이터 한가운데 앉아 한참을 울었다. 인기척이 없다 못해 너무 고요해서 정말로 세상에 혼자 버려진 느낌마저 들었다. 시간은 자정이 가까워 있었다. 추워서 온몸이 달달 떨렸지만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손이 저절로 휴대폰을 들어 올려 한주혁의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신호가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흐르다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갔다. 가까스로 잦아든 울음이 다시 왈칵 터졌다.

“선배. 잠깐만…. 딱 5분만. 아니, 1분 만이라도…. 통화 좀 해 주면 안 돼요…? 흐윽….”

며칠 동안 연락이 안 될 만큼 바빠도, 최종기한이 임박한 나머지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이번만은 제발 받아주길 바랐다. 이렇게 가슴이 무너지고 뼛속 깊이 외로움이 사무칠 때만이라도. 아주 잠깐이라도.

한 번 더 시도해봤지만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세 번째 통화에서 음성 사서함이 나왔을 때 저도 모르게 젖은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선배. 나 어떡해요…. 너무 속상한데… 힘든데….”

흑, 울먹이는 소리를 삼키며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그가 들을 거란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다. 통화도 어려운 판에 음성 사서함을 확인할 리는 없다.

그만해. 선배를 질리게 하지 마. 선배까지 너한테 등 돌리고 멀어지길 바라…?

더는 추워서 놀이터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24시간 카페식 편의점이라도 들어가려고 대로로 나가는데 전화가 울렸다. 모친이나 할머니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예서의 젖은 눈이 커졌다.

“선배…?”

액정 화면에는 ‘한주혁’이라고 떠 있었다. 더 생각할 겨를 없이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귀에 익숙한 저음이 영하의 밤공기를 타고 흘러들었다.

-어디야, 지금.

“선배.”

-무슨 일이야. 아니… 지금 갈게. 어딘지 말해.

이 시간에도 직원들의 말소리와 요란한 타건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혹시 음성 메시지 들었어요?”

-응.

부스럭거리는 마찰음, 의자가 거칠게 끼익, 끌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괜찮아요, 선배. 별일 아니에요. 지금도 많이 바쁠 텐데….”

-정말 괜찮아?

“네, 울컥해서 메시지 남기긴 했지만 정말 괜찮….”

-정말 별일 아니야?

“네. 별일 아니….”

-너, 그런 성격 아니잖아. 정말 별일 아니고 금방 괜찮아질 일인데 전화하고 메시지 남길 리가 없어.

예서가 입술을 멍하니 벌렸다. 뭔가가 심장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지나간 듯, 가슴이 뭉클했다.

-지금 갈게. 어디야?

“아, 저, 집 앞에… 편의점으로 막 들어가려던 참이었어요.”

-주민센터 사거리 거기? 바로 갈게.

“서, 선배!”

목이 메었지만 통화가 끝나기 전에 황급히 그를 불렀다.

“하지만 바쁜 거 아니에요? 1월 2일까지 잠잘 시간도 없다고….”

-괜찮아.

내내 건조하던 음색에 처음으로 희미한 웃음기가 묻어났다.

-아직 닷새 남았잖아. 닥치면 어떻게든 되더라고. 늘 그래왔어.

그는 시간도 늦고 추우니까 빨리 들어가 있으란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예서는 눈물을 간신히 억누르고 건너편 편의점으로 향했다.

한주혁이 오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 혼자만의 일방적인 감정이 아님을, 새삼 다시 확인한 느낌이었다. 심장이 벅차서 터질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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