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37)화 (38/124)

<37화>

-어, 예서야. 약국은 별일 없지? 힘들진 않고?

모친의 음성은 무뚝뚝한 평소와는 달리 꽤 부드러웠다. 동창들과 오랜만에 바람을 쐬며 여유를 누리니 기분이 매우 좋은 듯했다.

“네, 엄마. 거긴 안 추워요?”

-온천인데 추우면 물 들어가면 되지. 별일 없으면 됐어. 이따 문단속 잘하고, 저녁때 다시 전화하겠다고 수민이에게 전하고. 가만,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정우는 어떻게 지내는지 전화 한번 해봐야겠다. 감기는 안 걸렸는지 모르겠네.

예서는 수화기를 제자리로 내려놓았다. 역시 마지막은 민정우로 끝났지만 그래도 예전만큼 서운하진 않았다.

얼마 전 최인하와 잘 되길 바란다며, 그녀를 향한 속마음을 드러냈기 때문일까. 모친이 자신에게도 나름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 뒤로는 훨씬 마음이 가볍고 든든했다.

“엄마예요. 별일 없냐고….”

“잘 도착하셨대? 그건 그렇고, 그 선배 얘기나 빨리 좀 해봐. 응? 약사님께는 절대 말 안 해. 혹시 나중에 들키더라도 내 입에서 나오는 건 절대 아니라고 장담해!”

“맞아요. 그 선배와 사귀기로 했어요. 2주쯤 됐고… 내일 오전에 연락주기로 했어요. 아직 대학생이긴 한데 따로 하는 일이 있어서 엄청 바쁘거든요.”

“따로 하는 일? 그건 뭔데?”

“컴퓨터 보안 코딩 쪽인데 저도 그쪽은 문외한이라 잘은 몰라요. 아무튼… 그렇게 됐는데 아직은 딱히 말할 게 없어요. 알게 된 지는 1년 가까이 됐지만 지금까지 두 번밖에 데이트를 못 해봐서….”

“잘생겼어? 집은? 같은 대학 선배면 머리는 당연히 좋겠고…. 아, 너무 궁금하다. 하긴 누구든, 별로면 네가 사귀기로 마음까지 먹었겠어? 똑 부러지는 민예서가 어련히 알아서 잘 판단했겠냐고- 무려 인생 첫 남자친구인데 말이야!”

조수민은 제 일인 것처럼 신나서 펄펄 뛰었다. 하지만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다음 말에는 움찔, 제 발이 저렸다.

“전에 네가 말한 그 어장관리 개차반, 그런 인간만 아니면 되지. 왜, 우리 둘이 약국 문 닫고 저 앞 편의점에서 맥주 하나씩 깠을 때 네가 그랬잖아. 어떤 선배가 네가 좋긴 한데 모종의 이유로 사귈 순 없다고 해놓고, 네가 다른 남 선배랑 친하게 지내니까 눈이 뒤집혀서 질투하고 아무도 안 사귀면 안 되냐고 했던 웬 역병 같은 자식.”

“…….”

“그런 치만 아니면 돼. 아, 어서 오세요!”

손님이 들어서고 나서야 수민의 수다는 멈췄다. 예서는 뒤이어 손님에게 인사해 보이며 표정 관리를 하려고 애썼다. 그 역병 같은 자식이 바로 그 만년필의 주인이자, 이제는 그녀의 첫 남친이 된 선배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언니, 이런 남자 심리는 대체 뭘까요? 분명히 저에게 호감이 있단 게 느껴지긴 하는데 사귈 수는 없대요. 하지만 제가 다른 선배랑 친하게 지내는 건 싫으니까, 둘 다 졸업 때까지 각자 솔로로 있자는 식으로 말하는데… 너무 웃기지 않아요?

-뭐? 뭐 그따위 어장관리 싸이코 새끼가 다 있어? 너, 그런 놈이랑 엮이지 마. 아주 질 나쁜 자식이야, 그거! 설마 너도 호감이 있는 건 아니겠지? 좋아하는 거 아니지? 응?

-아니에요, 언니. 전 아무 감정… 없어요. 정말 없어요.

그나마 제 감정을 속여서 다행이었다. 만약 솔직히 말했다면 눈치 빠른 수민은 그 선배가 그 어장관리 싸이코 새끼인 걸 단번에 눈치챌 터였다.

그녀의 말대로, 좋은 건 절대 숨기지 못하고 다 티를 내 버린다면 더더욱. 세 번 고백해서 세 번 다 거절했단 것까지 알면 수민이 어떤 얼굴을 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한주혁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고, 더는 버티지 못하겠다고 항복해왔으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만에 하나 이브를 함께 못 보내도… 일 때문이니까 어쩔 수 없지.

이제는 명실공히 커플이 되었다. 한주혁은 이제 그녀의 연인이었다. 지금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영원히 잡을 수 없던, 찬란한 빛을 비로소 손안에 쥐고 자신만의 소유로 새긴 느낌이 이럴까.

***

이브는 이제 바라지도 않았다. 25일에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비록 이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니까. 하지만 24일 오전에 걸려 온 전화는 절망적이었다.

-어쩌지? 아무래도 내년에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네? 내년이요?”

-프로젝트 최종기한이 1월 2일로 다시 잡혔어. 지금으로선 그 전에 끝날 가망이 없어 보이네.

“…….”

-통화는 짬짬이 할 수 있지만 만나는 건 어려울 것 같아.

“그럼 31일에도 어렵겠네요…. 1월 2일까지면.”

-응.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아.

통화 중에도 키보드 소리와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로 열띤 대화를 주고받는 이야기 소리가 배경음처럼 간간이 들렸다. 정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모양이었다. 이렇게 정신없는 와중에도 꼬박꼬박 전화는 약속한 시간에 해 주다니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럼 혹시 제가 작업실 쪽으로 잠깐 가면… 아무리 바빠도 선배, 밥은 먹어야 되니까 그 근처에서 30분 정도만 밥이라도 먹는 건 어때요?”

-어쩌지. 오늘은 담당자가 중간 체크하러 올 거고 내일은 하루 종일 브리핑을 해야 돼서. 의뢰받은 업체가 미국에 본사가 있는 글로벌 기업이라 시차 맞춰 화상회의를 길게 할 것 같아.

“아… 네. 알겠어요. 어쩔 수 없죠.”

음색이 자꾸만 바닥으로 가라앉으려 했다. 예서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징징대면 안 돼. 일이 우선일 때가 많을 거라고 진작 말했었잖아. 그러니까 서운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1월 3일부터는 한숨 돌릴 수 있으니까 그때까지만 기다려 줘.

“네, 그럴게요. 일단 지금은 일이 중요하니까 그것만 신경 쓰고…. 1월 3일 이후에 보는 걸로 해요.”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가 안도한 듯 얕게 한숨지었다.

-다른 여자 같았으면 화내고 투정 부렸을 텐데. 일 때문인데도 이성보다 감정을 앞세워 피곤하게 구는 거… 그런 감정 소모도 내가 연애를 기피해 왔던 이유 중 하나였거든. 하지만 예서 넌 역시 다른 것 같아.

“…….”

-통화는 가끔씩 이렇게 할 수 있으니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알았지?

“네, 그럴게요.”

-아, 가봐야겠다. 미안.

“네, 선배. 바빠도 밥은 꼭 챙겨먹….”

통화가 뚝 끊겼다. 예서는 휴대폰을 주방 식탁 위에 힘없이 내려놓았다. 시선이 벽에 걸린 달력으로 향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크리스마스가 아니면, 백번 양보해 31일 마지막 날이라도 보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없었다. 일 때문인데 거기 대고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의 말마따나, 이성보다 감정을 앞세워 피곤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화내고 투정 부리는 여자친구는 되고 싶지 않다. 정말로.

그런데도 속상한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보고 싶은 마음 역시도.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것처럼,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차피 그가 없었더라도 혼자 보냈을 크리스마스고 연말이었다. 세밑에 채린이와 미주, 새은이와 만날 약속이 있긴 했지만 오늘과 내일, 섣달그믐날은 아니었으니까.

“그만. 그만 해, 민예서. 이럴 때 소설이나 실컷 써두자. 선배도 죽어라 열심히 일하고 있잖아.”

예서는 자꾸만 눈물이 핑 도는 눈가를 벅벅 문지르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크리스마스가 별 건가. 심기일전해 열심히 글을 쓰고, 그동안 못 봤던 드라마나 예능도 보고, 성탄 특집 영화도 보고, 아 참, 상가 제과점에서 크리스마스 케이크도 한 조각 사서 디저트로 먹고, 그러면 되지.

그러다 보면 이틀이 훅 지나갈 것이다. 잠깐이라도 선배를 눈앞에서 직접 보고, 대화를 나누고, 온기를 느끼고 싶은 그리움도 소강될 터였다.

***

섣달그믐날을 사흘 남겨두기까지 더 이상의 통화는 없었다. 최종기한인 1월 2일이 가까워질수록 더 정신이 없는지, 문자도 점점 더 뜸해지고 있었다.

그나마 외할머니가 와 있어서 허전함이 조금은 덜했다. 활달한 성정의 외조모 윤미실은 1월 초까지 머물다 시골집으로 내려갈 예정이었다.

“할머니, 저 왔어요.”

“엄마, 우리 왔어.”

“오냐, 고생들 했다 마! 뭐, 야식이라도 좀 해 주까? 쑥버무리 했는데.”

외조모는 약국 일을 끝내고 나란히 귀가하는 딸과 손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녀도 하루 종일 쓸고 닦고 집안일에다 이런저런 밑반찬을 만드느라 바빴던 눈치였다. 한쪽에는 어디 택배를 보낼 예정인지 스티로폼 박스며 노끈이 널려 있었다.

“엄마. 이건 다 뭐유? 혹시 정우 보내주려고?”

“하모. 외국에서 혼자 고생하는데 할미가 이런 거라도 해 줘야 안되겄나. 가자미식해랑 명태식해, 오징어젓갈도 했는데 비행기에 실어 보낼 수 있재? 우리 정우가 그것들 좋아한다 아이가. 봐라, 여 진미채랑 멸치볶음도 쌔빠지게 했다. 고추장, 간장 양념 두 개로.”

“아유, 많이도 하셨네. 요즘은 포장만 잘하면 뭐든 보낼 수 있어요.”

음식을 이것저것 살피는 모친의 안색이 환했다. 정우에게 보낸다니 그저 흐뭇한 모양이었다.

“하기사 세상이 좋아졌다 카이. 예서 니 어디 가노? 쑥버무리 안 먹고.”

“전 저녁 많이 먹어서 괜찮아요, 할머니. 씻고 들어갈게요.”

익숙한 풍경이었다. 어쩌다 시골에서 올라오실 때마다 두 손 걷어붙이고 타향살이 중인 외손자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을 잔뜩 하시는 게 외조모의 기쁨이자 낙이었다. 그렇다고 외손녀에게 불퉁하진 않았다. 용돈도 곧잘 주고 늘 웃는 낯으로 그녀를 대했다.

하지만 외손녀가 좋아하는 반찬이 뭔지는 잘 몰랐다. 쑥버무리만 해도 그녀는 잘 먹지 못하는 음식이었다. 쑥떡이나 쑥국은 잘 먹는 편이었지만 쑥버무리는 특유의 식감 때문인지 입에 잘 맞지가 않았다.

하지만 외조모가 야속하거나, 서운하지는 않았다. 그런 마음을 갖지 말자,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아 왔기 때문이리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