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36)화 (37/124)

<36화>

“호, 호텔요?”

“오해는 하지 마. 차에 타자마자 키스한 건 그래서 일부러 한 게 아니니까. 사실은, 일주일 전 만났을 때도 호텔 예약해뒀었어.”

“…….”

“혹시 몰라서. 만약 네가 내 고백을 받아주면… 그래서 사귀게 되면 분위기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하지만 그날은 키스만으로 끝났다. 그 이상을 강제하는 압박감은 전혀 없었다. 심지어 그녀가 키스 이상을 자진해서 원하게 될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리겠다고도 했었다.

호텔을 예약해둔 것처럼 뭔가 기대하고 조급해하는 태도는 아니었는데. 물론 꽤 달아오른 데다 흥분해 있긴 했지만.

“그럼 어떡해요, 호텔….”

말하면서도 얼굴이 발갛게 다시 물들었다. 한 손이 저절로 묵직한 아랫배로 가 있었다. 생리 중일 때는 출혈도 출혈이지만 며칠간 간헐적인 복통도 있었다.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는 섹스는 꿈도 꿀 수 없다.

“괜찮아. 알아서 취소하면 돼. 내가 멋대로 예약해 둔 거니까.”

“선배, 일이 바쁠 때는 오피스텔에서 먹고 자기도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복층이라 위층은 주거용으로 쓴다고….”

“그렇긴 한데 처음은 최대한 로맨틱한 곳에서 하고 싶었거든. 첫 기억은 소중하잖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는 무심히 휴대폰 앱으로 호텔 예약을 취소하며 말을 이었다.

“내 작업실은 연말에 급한 거 마무리 짓고 좀 정리한 뒤 부를게. 작업공간이니까 자주 부를 순 없겠지만.”

“그렇게 해요. 근데 선배, 장소는 어디든 괜찮지만 다음에는 언제 볼….”

예서의 혀가 절로 멈췄다. 히터를 높이는 그의 앞섶이 불거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핸들을 잡고 도로를 질주할 수 있을 만큼 똑바로, 가지런히 앉은 상체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 간극에, 예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렸다.

“미안. 너 때문에 서 버렸어.”

한주혁은 그녀의 소리 없는 경악을 알아챈 듯 담담하게 말했다.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다른 사람처럼 낯선 모습이었다.

“괜찮… 괜찮아요.”

“어쩐지 불공평한 것 같은데… 너만 다 보여줬잖아.”

조금 전의 적나라한 순간이 떠오르자 예서의 얼굴이 다시 화끈거렸다. 그의 말이 싫지는 않았지만, 그 화제는 이쯤에서 그만하길 바랐다.

“다음번에는 너도 날 속속들이 봤으면 좋겠다.”

예서가 히끅, 딸꾹질을 할 뻔했다.

“물론 네가 그럴 마음의 준비가 됐을 때.”

“그럴… 준비가 될 거예요. 아마도.”

예서는 모호하게 얼버무렸다. 다음번이 될지, 그 다음번이 될지, 언제라고 정확히 말할 순 없지만 그러길 바랐다.

그럴 만큼 한주혁이 좋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돌아보면 그를 처음 만난 날부터 그랬던 것 같다. 봄 학기 개강 전, 학교 앞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그가 첫 손님으로 주문했던 그날.

“예서야, 그거 알아?”

그가 시동을 걸기 전, 그녀의 한쪽 손을 잡아 깍지 꼈다. 크고 따뜻한 손이 무척이나 기분 좋았다.

“너 일하는 카페에서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해? 2월 중순쯤.”

예서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도 마침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다.

“그때부터 네가 좋았던 것 같아.”

“선배….”

“첫눈에 반했던 거지. 그것도 모르고 계속 내 감정을 회피하려고만 했었어.”

그는 다시금 사과하듯 고백했다. 북처럼 격렬하게 울리던 예서의 심장은 마침내 그와 헤어지고 집에 들어서고 나서야 조금씩 가라앉았다.

날아갈 듯 기뻤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침대에 누워 그날의 데이트를 곱씹어 보는데 아차, 탄식이 흘렀다. 다음엔 언제 만날지 물어보려다 흐지부지됐던 게 그제야 떠올랐다.

예서는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더듬어 쥐었다. 문자를 보내려고 했지만 결국 다시 누워 버렸다. 연말까지 바쁘다고 했으니 공연히 재촉해서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다.

-현실적으로 일이 연애보다 우선일 때가 많을 거야. 서운할 수 있겠지만 오해는 안 했으면 좋겠어.

그는 교제에 앞서 미리 양해를 구한 바 있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이해한다고 선선히 답한 바 있었다.

한주혁은 초등학생 때부터 주식과 컴퓨터에 대해 배웠고 그것에만 몰두한 10대 시절을 거쳐, 지금은 작은 스타트업 보안회사를 직접 운영하고 있었다. IT 쪽은 문외한이라 잘 몰랐지만, 내로라하는 대기업으로부터 스카우트가 들어오기도 했다니 그 방면으론 상당히 실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학교에서도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고 사촌인 박성준을 제외하곤 아무도 모르는 눈치였다.

잠이 솔솔 오면서 눈꺼풀이 무거웠다. 제가 했던 답변도 아련하게 떠올랐다.

-그럴게요. 항상 연애가 최우선이 될 순 없잖아요. 저도 바쁠 때가 있으면 연락 잘 못 받고, 선배가 1순위가 못 될 때도 있을 거니까….

그때 선배의 눈빛이 살짝 변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뭐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는데…. 뭐라고 했더라?

-그래도 넌 내가 늘 …였으면 좋겠는데….

예서의 눈이 완전히 감겼다. 베개에 똑바로 놓였던 머리가 스르르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만날 수 있겠지? 사귀고 첫 크리스마스인데.

***

며칠이 흘러 12월의 23일째 되는 날, 오전에 그로부터 문자가 날아와 있었다.

[미안. 연말 프로젝트 진행이 자꾸 지지부진해서, 지금으로선 내일 볼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밤에 다시 연락할게.]

조금 낙심이 되었지만 예서는 마음을 다잡고 답문을 보냈다.

[네, 선배. 괜찮아요.]

그리고 자정쯤 문자가 다시 날아왔다.

[지금 야근 중인데 내일 오전에 다시 연락할게. 정말 미안.]

[알았어요, 선배. 많이 힘들 텐데 전 신경 쓰지 마시고 일에 집중하세요.]

씩씩하게 웃는 이모티콘을 덧붙여 전송한 뒤, 예서는 털썩 침대에 주저앉았다. 문자는 그렇게 보냈지만 낙심은 오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이러다 내일 크리스마스이브에도 못 만나면 어떡하나 불안이 앞섰다.

선배가 보고 싶었다. 아르바이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1월 전까지, 약국 일을 돕는 틈틈이 소설도 바짝 써두고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간간이 생각나는 한주혁 때문에 오롯이 집중할 수만은 없었다.

“예서야. 김밥 사 왔어! 손님 없을 때 빨리 먹자.”

그때 뒷문이 벌컥 열리며 수민이 비닐봉지를 들어 보였다. 송년회와 모임이 많은 시기라 그런지 다행히 숙취해소제나 피로 회복 음료를 찾는 손님들만 주로 있었다.

“네, 언니. 탕비실에 차 끓여놓을게요.”

예서는 좁디좁은 탕비실의 커피포트에 물을 부으며 잡념을 떨치려 애썼다.

정신 차리자. 내일은 잠깐이라도 볼 수 있겠지. 분명히 만날 수 있을 거야.

모친은 약사회 겸 동창 여행으로 지방에 내려가 25일 밤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원래는 처방전이 없는 약이라도 팔아야 되지 않겠냐고, 그녀와 수민에게 삼 일 내내 약국을 맡기려 했지만 수민이 펄쩍 뛰는 바람에 내일과 모레는 아예 문을 닫을 예정이었다.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약사님! 저 24일, 25일 휴가잖아요. 그럼 이틀 내리 예서 혼자 약국을 봐야 되는데 밤에 위험한 거 아시잖아요. 며칠 전에 취객이 난입해서 경찰 부를 뻔한 거 기억 안 나세요?

동시에 예서에겐 눈을 몰래 찡긋해 보이곤 둘만 남겨졌을 때 너스레를 떨었다.

-아무리 남친이 없어도 명색이 크리스마스잖아. 혼자 여기 있는 건 진짜 아니지.

“아까부터 휴대폰 수시로 보던데, 누구… 연락 기다리는 사람 있어?”

수민이 와앙 입을 벌려 김밥을 넣기 직전 물었다. 예서의 가슴이 뜨끔, 내려앉았다. 그렇게 티가 났나. 이제 보지 말아야겠다.

“아뇨, 없어요. 하하. 그냥 심심해서.”

“이틀 동안 뭐 할 거야? 친구들도 남친 만나고, 가족 여행에 스키장- 다 바쁘다며.”

“어, 사실은….”

예서가 김밥을 집어 들려다 머뭇거렸다. 파트타임 직원인 수민은 늘 활달한 하이 텐션이긴 했지만 입은 무거웠다.

-수민이 걔는 참 희한해. 말 많은 사람치고 입 무거운 사람 없는데 그 부분은 또 믿을 만하다니까. 하긴 그러니 이렇게 오래 데리고 있는 거지.

언젠가 모친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도 했었다. 그녀는 수민이 호들갑에 수다쟁이라고 험담을 하면서도 사람됨은 인정하고 있었다.

“언니. 저 사실은…. 엄마에겐 비밀로 해 주실 수 있어요?”

“너 누구 만나는구나.”

수민의 눈빛이 번쩍거렸다.

“혹시 그 에르메스 만년필? 뭐였지? 티발디? 티볼디? 그 선배 아냐?”

“네? 그걸 어떻게….”

“네가 걱정 많이 했잖아. 선배 돌려줘야 되는데 그렇게 돼서 어떡하냐고. 남자 선배라고. 그때 음… 뭐랄까, 아주 미묘한 뭔가가 느껴졌거든. 다음 주에 내가 만년필 어떻게 됐냐고 했더니 다행히 뭐라 하지도 않고, 오히려 밥 사줘서 잘 먹고 왔다며. 그때도 흠… 얘가 그 선배란 애 좋아하나? 싶었거든.”

“그, 그렇게 티가 났어요?”

“응. 넌 다른 건 몰라도 좋은 건 티가 확 나잖아. 연애할 때 밀당도 못하고 포커페이스는 더더욱 안 될 타입? 힘들고 속상하고 그런 건 잘 안 드러내는데 좋은 건 완전 못 속여.”

그녀가 마지막 김밥을 씹어 삼키곤 바짝 기울여왔다.

“그래서 결론은? 그 선배랑 사귀는 거야?”

“네, 그렇게… 됐어요.”

“어떤 사람인데? 너무 궁금하다! 그럼 이브 때 만나는 거지? 응?”

그때 카운터 옆의 유선 전화기에서 벨이 울렸다. 모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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