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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33)화 (34/124)

<33화>

다음 날 밤, 예서는 생각에 잠긴 채로 전철역을 나와 집까지 느릿느릿 걸었다.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복잡한 심경이었다.

어제 한주혁과의 전격적인 교제 시작과 키스, 설레는 가슴을 가라앉히지 못해 새벽 2시가 되도록 눈이 말똥말똥했던 밤에 이어, 최인하와 나눴던 한 시간 전 대화까지 모든 게 꿈 같았다. 하루 만에 너무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다.

-예서야. 나 사실… 너 좋아해. 동생 이상으로.

놀랍게도 한주혁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가 잘못 넘겨짚었다고 믿었던 그녀로서는 다소 충격이었다.

-인하 오빠. 하지만 한 번도 그런 감정… 내비친 적 없잖아.

-알아. 너무 갑작스럽단 거. 사실 복학하고 계속 기회를 엿보다가 이제 마지막 학기니까 더는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 거절당하더라도 일단 고백은 해 보자 싶었지.

-오빠. 실은 나… 사귀는 사람 있어. 정말 미안해.

망설인 끝에 상대는 밝히지 않았다. 송유영의 귀에 들어갔다면 그에게도 전해지겠지만, 적어도 방학 동안에는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최인하는 적잖이 놀란 반응을 보이며 낙심했지만 결국 잘 갈무리하려 애썼다.

-얼마 전부터 교제 시작했어.

-하, 역시 진작 질러 버렸어야 했는데. 늦은 내가 잘못이지.

-미안해. 상대는… 나중에 기회 되면 말할게. 지금은 좀….

-내 감정인데 네가 왜 미안하냐. 누군지는 그럼 다음에 꼭 얘기해줘. 아무튼 축하한다…!

-고마워, 오빠. 오빠도….

오빠도 꼭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랄게. 하지만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도 내년에 대학원에 진학하고 인턴을 병행하는 등 더 넓은 사회로 나가면 자신은 금세 잊으리라 믿었다. 그녀보다 더 좋은 인연과 닿으리란 것 또한.

-참, 그래도 우리 아버지 회사에서는 알바 할 거지? 어제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시급은 1.5배로 주겠다고 엄청 좋아하셨어.

-고마워, 오빠. 하지만 역시 그건 어려울….

-혹시 너 어색할까 봐 말해두는데, 난 그쪽엔 갈 일 전혀 없으니까 안심해도 돼.

-마음은 정말 고마워. 그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아.

-우리, 어머니들끼리 친하니까 어쨌든 앞으로도 가끔은 봐야 할 수 있잖아. 내 감정은 내가 뒤끝 없이 알아서 정리할 테니까 걱정 말고 그냥 해. 아버지는 당연히 너 오는 줄 알고 광고 다 내렸다는데 어떡해.

-버, 벌써?

-그래. 방학 동안 난 아무래도 서울에 없을 것 같으니까 마주칠 일 정말 없어. 그러니까 안심해.

-어디 가는데?

-모르겠어. 베트남에 주재원으로 계신 이모 댁에 가거나, 훌쩍 무전여행을 떠나거나….

왠지 방금 그렇게 하기로 정한 것 같았다. 그녀를 향한 고백이 불발되는 동시에,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든 게 아닐까. 아파트 앞 작은 놀이터를 지나치는데 문자음이 울렸다. 한주혁이었다.

[아직도 대화 중이야?]

한 시간 전에 이어 두 번째였다. 예서는 복잡미묘한 얼굴로 놀이터 벤치에 앉아 곧장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 두 번 만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얘기 끝났어?

차분한 저음이 곧장 단말기를 넘어왔다. 초조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네, 선배. 잘 끝났어요. 지금 집 앞이고요.”

-역시 내 예상이 맞았지?

한창 일하던 중이었는지 그의 음성 너머로 시끄러운 외국어와 기계음 같은 소음이 들려왔다.

“네…. 그래서, 만나는 사람 있다고 잘 얘기했어요. 선배란 건 말 안 했지만.”

-그것까지 말하지 그랬어. 확실히 쐐기를 박았어야지.

“저도 얘기할까 망설였지만 인하 오… 인하 선배가 잘 수긍해줘서 거기서 그냥 끝냈어요.”

-그래, 잘했어.

기계음이 좀 더 시끄러워졌다. 한주혁이 혀를 낮게 찼다.

-안 되겠다. 이만 가봐야겠어. 그럼 집에 들어가 쉬어. 오늘 10일이니까…. 잠시만. 아무래도 이번 주는 시간이 안 날 것 같아. 17일 저녁 괜찮아?

“아… 네, 어쩔 수 없죠.”

일주일이나 기다려야 한다니 맥이 빠졌다. 학기도 끝나고 연말이라 더 자주 볼 수 있을 줄 알았건만.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일 때문이라니 이해하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

“대신 다음에 만나면 무슨 일 하는지 대강이라도 꼭 알려줘요.”

-그럴게. 틈날 때마다 연락할 테니까 그동안 푹 쉬어.

“알았어요. 선배도 잘 자요.”

과외는 차주부터 알아봐 주겠다고 했으니 일주일 뒤 만났을 때 얘기해도 될 터였다. 만에 하나, 정말로 과외를 소개받게 되면 인하 오빠 회사 사무직과 병행할 생각이었다. 방학 때 최대한 저축을 해둬야 개강 때 여유를 부릴 수 있기도 하니까.

통화는 화기애애 마무리되었다. 일주일 후 집 근처 공영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해 조금 긴장이 되었지만, 그래도 공영주차장은 약국 상가나 아파트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아직은. 그와의 연애 자체를 은닉하고 싶다기보다, 혼자만의 소중한 비밀로 품고 싶은 마음이었다.

“예서야!”

놀이터를 벗어나 아파트 동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어디 갔다 이제 와?”

모친 이 약사가 저만치서 걸어오고 있었다. 약국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 뒷정리는 수민에게 맡기고 귀가하는 모양이었다. 예서는 지레 놀라 긴장했다가 이내 침착을 되찾았다.

“친구 좀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누구. 인하?”

“어… 네.”

그녀는 모친과 나란히 집에 들어섰다.

“안 그래도 아까 인하 엄마랑 통화하는데 그 얘기하더라. 인하 아버지 회사에 겨울방학 동안 일할 알바 구하는 거, 인하가 너 추천했다며? 할 거지?”

“사실 안 하려고 했는데 오빠가 이미 다 말씀을 드려서….”

“왜? 그 좋은 기회를 왜 안 하려고 했어? 이럴 게 아니라, 너 잠깐 앉아봐. 그렇지 않아도 할 말 있어.”

모친은 식탁 의자를 빼서 먼저 앉았다. 예서는 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맞은편에 자리했다. 무슨 얘기를 할지 덜컥 긴장부터 되었다. 혹시 정우나 돈 관련된 얘기는 아니시겠지, 불안한 마음을 추스르는데 이 약사가 불쑥 말을 꺼냈다.

“너 혹시 인하랑 사귀니?”

“네?”

“뭘 그렇게 정색해. 사귀면 뭐 어때서. 둘이 연락도 자주 하고 옛날부터 친했잖니. 낯 가리는 우리 정우도 인하라면 잘 어울렸고.”

“아니에요, 엄마. 좋은 오빠긴 하지만 그런 사이는… 아니에요.”

예서는 두루뭉술 말끝을 흐렸다. 어제를 기점으로 한주혁과 교제를 시작한 사실, 오늘 최인하와의 만남, 그중 어떤 것도 말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엄마와 허물없이 대화하는 사이라면 다 털어놓을 수도 있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도 아직은 딱히 그렇지 않단 거지 앞으로 그럴 가능성은 있잖아. 안 그래?”

“엄마는… 내가 인하 오빠랑 사귀었으면 좋겠어요?”

좀 얼떨떨했다. 모친이 정우 아닌 그녀의 사생활에 이렇듯 관심을 표한 적이 있던가. 철들고 나서는 처음인 듯도 했다.

“인하라면 적극 찬성이지. 그만한 애 어디 가도 없어. 집안도 괜찮지, 싹싹하니 성격도 좋은 데다 내년 여름엔 대기업 인턴도 한다며? 대기업이 안된다 해도 제 아버지 회사 들어가서 작은형이랑 물려받으면 되지. 그 집 애들이 워낙 우애가 좋아서 그런 갈등은 없을 거야.”

“…….”

“그럴 수만 있다면 인하랑 너 결혼까지 가는 것도 엄마는 찬성이야. 아직 한참 이른 얘기 같지만, 내년엔 너도 3학년이고, 금방 졸업반 되고, 시간 엄청 빨리 간다? 어차피 결혼할 거면 하루라도 빨리 가는 게 좋아.”

“엄마, 사실은….”

“나는 너, 빨리 결혼했으면 좋겠어. 그럼 엄마도 한시름 놓을 것 같아. 인하네면 집안끼리 워낙 잘 아니까 체면이고 뭐고 가릴 것도 없고.”

“혹시 정우 때문에요?”

갑자기 설움이 복받쳤다. 가뜩이나 저까지 짐이 되지 않으려고 학비는 장학금, 용돈은 죄다 아르바이트로 충당하며 애쓰고 있는데. 그래도 모친에게는 여전히 짐이란 걸까.

“엄마, 솔직히 지금도 정우에게만 집중하고 계시잖아요. 제가 여기서 더 어떻게 해야….”

“그런 말이 아니야!”

예서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처럼 감정이 격앙되자 이 약사가 중간에서 자르고 들어왔다.

“넌 예전부터 내가 늘 정우 편만 든다고 하지만, 생각해 보렴. 자식이 많지도 않고 둘인데 하나는 똑 부러지게 앞가림 다 해. 하나는 그에 비해 모지리라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고 손이 너무 많이 가. 그럼 자연히 그 모자란 자식에게 더 신경이 가고 더 짠해서 뭐라도 더 챙겨주고 싶고… 그럴 수밖에 없어. 그게 부모 마음이야.”

“…….”

“하지만 절대 너를 덜 생각해서는 아니야. 둘 다 똑같이 자식인데 어떻게 그러겠니.”

“…….”

“어쩌겠어. 네가 정우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알아서 척척 잘하니 그나마 엄마가 숨통이 트이는 건데. 너까지 정우 같았으면 아이고…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진작 말라 죽었을 거야, 아주. 아무튼 그런 오해는 하지 말고.”

이 약사가 한숨을 폭 내쉬곤 말을 이었다.

“정우랑 상관없이, 너만이라도 엄마처럼 고생 안 하길 바란다는 거니까 오해하지 말란 거야. 나는 그저 네가 결핍 없고 사랑 많은 남편이랑 시댁 만나 사랑받으면서 편하게 살았으면 싶거든.”

“…….”

“그 집 어른들, 배울 만큼 배운 분들이고 정 많은 거 너도 잘 알잖아. 자존심은 좀 상하지만 인하 엄마 약국도 우리 것보다 훨씬 크고, 아버지 회사도 건실하니 잘 운영되고. 집안일은 늘 사람 불러 맡기니까 새 며느리 들어왔다고 부려 먹고 그럴 집안 문화도 아니야. 너 예전부터 쭉 예뻐해 주기도 했잖니.”

예서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묵묵히 있었다. 모친이 갑자기 이렇게 생각해 주는 척 말하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솔직히 기쁜 마음이 더 컸다. 늘 정우만 챙기는 줄 알았건만, 그녀도 내심 신경을 쓰고 있었다니.

“그래. 뭐, 아무리 내가 원한대도 당사자들 마음이니.”

이 약사는 피로로 기미가 낀 눈가를 문지르며 말을 맺었다.

“아무튼 앞으로도 인하랑 사이좋게 잘 지내렴. 2월에 정우 오면 셋이서 밥도 먹고, 놀러도 가고. 응?”

“네, 그럴게요.”

그러긴 어려울 테지만 일단은 모친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잠시 후 씻고 방에 들어갈 때까지도 얼떨떨한 기분은 그대로였다.

지금까지 엄마를 오해한 걸까. 적어도 정우를 편애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짐처럼 여기고 못마땅했던 건 아닐지도 몰랐다.

예서는 책상에 앉아서도 한참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선은 책장 위, 돌아가신 아빠의 사진에 고정된 채였다.

잠시 밀렸던 글을 쓰고 잠자리에 드는 마음이 가벼웠다. 어쩌면 앞으로는 모친과 좀 더 잘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안도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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