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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32)화 (33/124)

<32화>

보들보들한 혀가 그녀의 것을 옭아맨 채 천천히 빨았다. 넓고 단단한 어깨를 짚고 있던 예서의 두 손이 어느새 그의 목을 감고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어지며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깃털만 가득 찬 듯 사고회로가 정지된 기분이 이럴까.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이물감이 입 안에 가득 들어찬 위기감도, 다른 사람의 타액과 제 것이 얽히는 끈적한 감촉도 싫지 않았다.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불쾌하긴커녕 쾌감으로 아찔해져만 갔다.

아, 이래서 다들 키스를….

각종 영화와 드라마, 문학 작품에서 봐왔던 묘사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다들, 그래서 키스를 하는 것이었구나. 상대방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를 때 입술을 맞추고, 혀를 얽고, 그 황홀한 감각을 함께 맛보며 애정을 확인하는 거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조금씩 숨이 차며 어깨가 들썩일 때야, 한주혁은 그녀의 혀를 놓아주었다. 예서가 입술 새 가쁜 호흡을 고르며 그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사랑스럽고 애틋했다. 눈앞의 남자가 어찌나 매혹적이었던지, 예서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들어 그의 뺨을 감쌌다. 손가락이 저절로 광대와 뺨을 더듬다 입술 가장자리까지 내려왔다.

“…예서야.”

하지만 정작 그의 눈에는 자신이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다. 한주혁이 설핏 웃으며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미치겠다. 정말.”

낮은 욕설마저 달콤하게 들릴 지경이었다. 밭은 숨결 사이로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왜 이렇게 예뻐, 너.”

“…….”

“한 번만 더 할게.”

대답할 틈도 없이 입술이 재차 다가왔다. 따스한 혀가 다시 그녀의 것 위로 겹쳐지며 진득한 체취가 전신에 스며들어왔다. 예서가 다시 두 팔을 들어 올려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한주혁 역시 지지 않고, 한 팔을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에 두르며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다른 쪽 손이 목덜미를 단단히 받치는 동안, 예서는 마음 놓고 그의 입술과 혀가 일으키는 쾌감을 즐겼다. 딥 키스 내내, 온몸의 피가 머리로 몰리며 현기증이 일었다. 촉, 촉, 차 안은 오롯이 내밀한 살점과 혀가 스치고 혀와 혀끼리 비벼지는 소리로만 가득 찼다.

“아, 잠, 잠깐…!”

넋이 나가 있던 예서가 소스라치게 놀라 황급히 입술을 뗐다. 허리 쪽이 허전해지며, 갑자기 차디찬 손가락이 니트 안쪽을 파고드는 감촉 때문이었다. 목덜미를 두른 손힘이 워낙 세서 고개를 더 뒤로 뺄 수는 없었다.

“선배, 방금….”

그가 니트 안쪽 맨살을 더듬던 손을 밖으로 빼냈다. 그러고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젖은 혀로 제 입술을 핥았다. 그러고 보니 그는 온통 젖어 있었다. 바닥 모를 호수처럼 촉촉해진 눈빛은 어두웠고, 위아래 입술도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미안.”

“…….”

“…싫어?”

담담했지만 숨결이 거칠었다. 억눌린 열기가 깃든 그 물음에, 예서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정작 나오는 대답은 좀 달랐다.

“살, 살은 다음에…. 아니, 그러니까… 방금 저녁을 너무 많이 먹어서 뱃살이…. 배가 많이 나와서….”

푸훗, 웃음이 터졌다. 한주혁은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받친 채 고개를 바짝 수그렸다. 어깨며 머리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박장대소를 억누르는 모습에 예서가 미간을 찡그렸다.

“선배.”

“아, 미안. 네가 너무 귀여워서….”

그는 이 악물고 고개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욕망으로 어둡게 가라앉았던 호수가 다시금 눈 부신 햇살 아래 반짝이는 듯한 눈이었다.

“배가 나온 건 전혀 못 느꼈지만…. 그래. 살은 다음에 만질게. 꼭 허락해 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장난기 가득한 어조로 덧붙였다.

“넌 언제든 허락 없이 만져도 돼. 내 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든.”

“선배, 그런 말은….”

예서의 양 볼이 후끈 달아올랐다. 갑자기 차 안이 너무 더웠다. 한주혁은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져 흐트러진 머리칼이며 옷매무새를 똑바로 정돈해 주었다.

그리고 나서도 시동을 걸지 않고 그녀의 한 손을 꼭 마주 잡았다. 그렇게 손가락을 깊숙이 깍지 끼고 마주 보고 있는 것 자체가, 그로서는 무척이나 행복하고 흐뭇한 것 같았다.

“오늘은 키스만으로 만족하고 그 이상은 네가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릴게.”

“…….”

“혹시 키스, 처음이었어?”

예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황급히 덧붙였다.

“스킨십도, 그… 이상의 것도 해 본 적 없어요.”

미친 것 같았다. 한주혁은 운전을 한다고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와인을, 혼자 꿀떡꿀떡 마셨더니 그 부작용인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선배하고 처음이 될 거예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말을 스스로 지껄일 수 있을까. 예서는 혀를 깨물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울 것처럼 인상을 다시 썼다. 한주혁이 다시 실소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웃지 않았다.

“고마워.”

그가 엄숙하게 정색하는 바람에 이번엔 그녀 쪽에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방금 해 준 말, 한 음절 한 음절이 다 소중하고 특별하고… 너무 기뻐.”

“서… 선배는 겨, 경험 있어요?”

이번에도 혀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하지만 궁금했다.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궁금한 게 당연하지 않을까?

“괜찮아요. 경험이 있어도. 나보다 세 살이나 많으니까. 스물넷이면 당연히….”

예서는 뒷말을 흐렸다. 호기롭게 물어본 게 무색하게, 갑자기 호기심은 사라지고 질투심이 치솟았다. 바보. 과거에 왜 질투하고 그래. 날 만나기도 전인데.

“처음은 열여섯 살 때였어. 여름에 하버드 세컨더리 서머스쿨을 다닐 동안, 같은 반 여자애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게 됐는데….”

“그럼 미국 여자애랑…?”

“아니.”

그가 조금 망설이다 결국 털어놓았다.

“그 여자애 어머니랑.”

“네에?”

“남편과 이혼한 상태라서 불륜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광란의 생일파티였는데… 얼떨결에 그렇게 된 거야. 다음날 귀국 전 서부여행을 가게 돼서 더는 얼굴 볼 일도 없었고.”

“며, 몇 살이었는데요? 그 친구 엄마란 분.”

“잘 모르겠지만 서른 초반인가 그랬을걸? 그 딸과는 애당초 아무 사이도 아니었고.”

“…….”

“미안해. 이렇게까지 자세히 얘기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녀의 침묵을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그가 머리를 쓸어올리며 혀를 찼다. 예서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시 이어 묻는 목소리는 어딘가 굳어 있었다.

“그럼 그 뒤로는요?”

당연히 또 있었을 것이다. 열여섯부터 스물넷까지,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 호르몬이 왕성하고 신체 건강한 남자가 그 후로도 아무런 경험이 없었을 리가.

“연애, 몇 번이나… 아.”

몇 번이나 했는지 물으려던 예서가 입을 다물었다. 누구와도 사귈 마음이 없고, 그래서 그녀에게 감정이 있는데도 힘들다던 고백이 떠올랐다. 그래서 질문을 다시 바꿨다.

“선배. 과거는 더 묻지 않을게요. 몇 번 했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어차피 다 절 만나기 전의 과거인데.”

한주혁의 눈빛에 다시 미소가 어렸다. 그렇게 말해줘서 안도하는 것인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그저 귀여워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왜 그렇게 연애를 기피했는지… 그건 이제 말해 줄 수 있을까요?”

그는 감정 소모 자체가 싫었고 타인의 감정에 휘둘리는 것 자체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말했다. 하지만 그게 정말 다인지, 혹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닌지 알고 싶었다.

“내 내면의 어딘가가 고장 난 것 같아서. 그래서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을 잘 하지 못해. 학교생활은 그럭저럭하고 있지만 모두에게 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어서 가능한 거겠지.”

그는 잠시 틈을 두고 덧붙였다.

“정신과 전문의인 친척에게 상담도 받고 있어. 3년 정도 된 것 같아.”

“네? 상담을….”

“10대가 지나고 대학에 들어간 후로 자꾸 떠올랐어. 어릴 적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기억이….”

아아. 예서는 긴장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꼭 맞잡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더 말하지 않고 운전석으로 몸을 돌려 똑바로 앉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미안.”

“선배.”

예서가 그의 오른팔 언저리에 제 손을 얹었다.

“제가 묻긴 했지만, 그래도 억지로 말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뭐든.”

진심이었다. 그가 상담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는 했다. 아무리 정신과 상담이 흔해진 요즘이라 해도, 늘 제 삶을 차분하게 잘 통제하는 듯 보였던 한주혁이 카운슬링을 받고 있었다니.

그만큼 트라우마가 심각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부모님의 사망에 어떤 사연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가 스스로 말해 줄 마음이 들 때 듣고 싶었다.

“선배가 말하고 싶을 때 해요. 언제든.”

그가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다 답했다.

“그럴게.”

한주혁이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그러고는 다시 안전벨트를 손수 매주려고 몸을 기울였을 때였다. 벨트를 당기려던 손이 예서의 오른쪽 손목 안쪽을 매만졌다. 흉터가 은은한 어둠 아래서 보일 듯 말 듯 희미했다.

“왜요, 선배?”

“그때….”

한주혁은 뭔가 말하려는 듯 운을 뗐다가 다시 거뒀다.

“아냐. 아무것도. 많이 아팠겠다 싶어서.”

“괜찮아요. 오래전 일이라서 기억도 잘 안 나고….”

한주혁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것처럼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차가 출발하고 대로를 달려 아파트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 다 이렇다 할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어색하거나 무거운 정적은 아니었다. 여전히 설레고 들뜨면서도 온화한 분위기였다. 음악조차 필요치 않았다. 두 사람은 신호등 앞에서 멈출 때만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나란히 미소 지었다. 굳이 말이 필요치 않았다.

갓 연인이 된 밤은 영하의 추위에도 따뜻하고 안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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