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31)화 (32/124)

<31화>

“알바라고 하기엔 글쎄… 24시간 매여 있어서.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할게.”

“뭔데요? 그냥 지금 말해 주시면….”

아. 그러고 보니 사촌 누나가 운영하는 온라인 쇼핑몰 홈페이지를 봐주었다고 했었지. 그런 쪽 일인가?

“다음에 만날 때 다 말해 줄게. 지금은… 일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

너에게만 집중하고 싶어.

그렇게 말하듯 시선이 예서의 것을 정면으로 사로잡았다. 예서가 고기를 한 점 집으려다 딸꾹, 갑자기 튀어나오는 딸꾹질에 냅킨으로 입을 가렸다. 이 와중에도 서빙 직원이 직접 구워주고 간 고기가 입에서 살살 녹았다.

“괜찮아? 사레들렸어? 여기, 물.”

“아, 괜찮아요….”

“많이 먹어.”

그가 잘 익은 등심을 그녀의 개인 접시로 다 밀어주었다. 치킨을 먹을 때 닭 다리를 다 몰아줬던 때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물어보기를 미뤄뒀던 것들이 떠올랐다.

“선배. 아까 송유영한테 왜 다 말해 버렸어요? 종강했어도 소문 다 날 텐데. 내년에 개강하면 과 내에 죄다 퍼져있을 거예요.”

과뿐 아니라 학교 전체에 다 퍼져있을 것이다. 그의 사촌 누나가 본의 아니게 정체를 숨기고 한주혁을 데리러 왔던 일주일, 전 교정이 얼마나 들썩였던가. 그가 끝까지 노코멘트를 하는 동안에도 온갖 억측이 나돌았다.

“당연히 다 소문내라고 그런 건데?”

“네? 그럼 일부러….”

“최인하와 사귀는 거 아니냐고 하니까 열이 받긴 했지만. 처음부터 난 숨길 생각 없었어. 불륜도 아닌데 왜.”

예서의 심장이 다시 두근거렸다. 그가 송유영에게 스스럼없이 두 사람이 사귀고 있다 공언했을 때, 끝까지 남아 있던 의혹이 걷힌 건 사실이었다. 갑자기 말해 버려서 깜짝 놀라긴 했지만 적어도 그가 가벼운 마음으로 떠보는 건 아니라는 확신이 든 까닭이었다.

“그렇지만… 왜 선배가 먼저 사귀자고 했다고 한 거예요? 사실이 아니잖아요.”

맨 처음 고백을 한 건 그녀였다. 그뿐인가. 총 세 번 고백해서 세 번 다 차였다.

“그냥.”

그가 그녀의 잔에만 와인을 따라주며 여상하게 덧붙였다.

“그 후로 한 달 반 정도 지났잖아. 일종의 리셋 기간이라 해야 되나…. 아무튼 다시 손을 내민 건 내 쪽이니까.”

“…….”

“아까 어쩌다 보니 대답을 정확히 못 들었는데.”

그의 눈에 희미한 장난기가 스쳤다.

“들은 거라 생각해도 되겠지? 어쩔 수 없잖아. 이제 공인된 사이가 되어 버렸으니까.”

“…….”

“예서야.”

“네. 그럼 일단… 겨울방학 동안….”

목소리가 갈라져 나와 목청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서로에 대해 많이 알게 되길 바라요.”

이제 언제든 연락하고, 이렇게 단둘이 데이트를 할 기회가 무궁무진하다 생각하니 가슴이 다시 설렜다.

내가 정말 주혁 선배와 사귀게 되다니. 선배가 내 남친이 되다니.

여전히 믿기지가 않았다. 두근대는 심장과는 별도로 배가 터질 것 같았다.

저녁은 기분 좋은 포만감과 함께 훈훈하게 끝났다. 22년을 살아오며 가장 정성스럽게 대접받은, 최고로 훌륭한 식사였다.

한주혁은 사무실까지 따로 마련해 학업과 병행하는 일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지만, 제 신상에 대한 것은 선뜻 말해 주었다. 그는 조실부모하고부터 큰아버지 부부와 함께 살고 있었다.

“큰아버지, 큰어머니가 부모님이나 다름없이 많이 아껴주셔. 딸들이 다 결혼해 외국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날 막내아들처럼 대하시는 편이야.”

현역에서 은퇴한 조부모는 강원도와 판교 별장을 오가며 일종의 전원생활을 하고 계시다고도 덧붙였다. 하지만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예서도 더 알려고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그의 집도 약국을 운영한다고 들었는데 그가 학업과 병행하는 그 일은 약국과 전혀 관계없는 일인지도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때가 되면 어련히 다 말해 줄 거라 믿었다.

화기애애, 설레던 분위기는 위층의 카페로 올라가며 뜻하지 않게 돌변했다.

***

그가 가업과는 상관없이,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독자적으로 쭉 해오던 일 때문에 많이 바쁠 거라고 얘기할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괜찮았다.

“한창 바쁠 때는 며칠씩 집에 들어가지도 못해. 길 때는 일주일 이상, 연락 안 될 때도 많고. 어르신들은 이제 이골이 나셨지만 너에게도 미리 말해둬야 할 것 같아서.”

“아… 알겠어요.”

“현실적으로 일이 연애보다 우선일 때가 많을 거야. 서운할 수 있겠지만 오해는 안 했으면 좋겠어.”

“그럴게요. 항상 연애가 최우선이 될 순 없잖아요. 저도 바쁠 때가 있으면 연락 잘 못 받고, 선배가 1순위가 못 될 때도 있을 거니까….”

찻잔을 들던 그의 눈빛이 아주 잠깐 변했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넌 내가 늘 1순위였으면 좋겠는데….”

“네? 잘 못 들었어요.”

“아냐, 아무것도. 그럼 이해해 주는 걸로 알게. 내일 약속은 취소할 거지?”

아. 인하 오빠랑 만나기로 한 약속. 저녁 약속이었지만 아무래도 그 전으로 시간을 당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취소는 어렵고, 일단 만날 생각이에요.”

“만나겠다고?”

부드럽던 눈매가 다시 날카로워졌다. 기껏 내일 약속 전에 기회를 선점했는데 최인하를 왜 만나겠다는 건지 납득이 되지 않는 듯했다.

“다른 용건일 수도 있잖아요. 알바 자리도 제안을 받았고…. 만약 선배가 예상했던 그 일이면, 제가 알아서 잘 얘기할게요.”

“알바? 그건 무슨 얘기야?”

그녀가 최인하의 부친 회사 얘기를 하는 동안, 한주혁의 낯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싸늘해지고 있었다.

“그 알바는 당연히 안 할 거지? 그리고 알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아예….”

그는 말을 멈췄다. 어쩐지 고심하는 듯한 태도에 예서가 다시 입을 뗐다.

“그래도 인하 오빠 용건이 뭔지는 들어봐야 할 것 같아요. 만약 사귀자는 제안이나 그런 게 아니었다면 굳이 약속을 취소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보다 선배. 방금 아예, 다음에 무슨 얘기 하려고 했어요?”

“아냐, 아무것도.”

아예 용돈과 생활비 다 대 줄 테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공부만 하면서 그에게만 집중하란 말이 입술까지 맴돌았다. 하지만 예서가 성격상 그에 응할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그의 연애관에 의구심을 품고 싫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화제를 다시 돌렸다.

“만약 다른 용건이었대도 그 알바는 하지 말고 확실히 거절했으면 좋겠어. 내가 믿을 만한 과외 소개해 줄 테니까.”

“네? 선배가요?”

“그러니까 내일 약속도 취소하고 안 만났으면 해.”

“아까 말했듯이 일단 용건은 들어봐야죠. 이제 인하 오빠도 졸업하고 대학원 갈 거니까 너무 그렇게 염려하지 않아도….”

“네 인간관계에 간섭할 마음은 없지만 그 인하 오빠란 호칭도 그만 했으면 좋겠어. 진짜 오빠도 아니잖아.”

“집안끼리 잘 아는 사이라 옛날부터 그렇게 불러왔어요. 친오빠가 아니라도 그런 거나 다름없는 사이고요.”

“그냥 최인하나 최인하 선배라고 지칭해줘.”

“……?”

분위기가 미묘하게 뒤틀린 건 그때부터였다. 갑자기 한주혁이 벽창호가 된 것 같았다. 어째서?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왜 갑자기 억지를 부리는 것 같지.

“네, 알았어요. 그래도 내일 약속은 나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인하 선배에겐… 제가 알아서 잘 얘기하는 걸로 할게요.”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

성마른 목소리였지만 그는 결국 한 발짝 물러섰다.

“대신, 나랑 사귀게 된 건 꼭 알려줘. 만나고 와서 어떻게 됐는지 나한테 바로 연락해 주고.”

“그럴게요.”

다시 분위기가 온화해졌다. 일단 한 가지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한주혁은 질투심과 소유욕이 강한 타입이었다. 만약 최인하와의 만남을 끝까지 반대했다면, 지나친 컨트롤 성향을 느끼고 조금 무서웠을 것 같았다.

자정이 되기 전까지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둘은 한참 뒤에 카페를 나와 건물 주차장에 세운 차에 들어가 앉았다. 옆자리에 앉자마자 한주혁의 손이 그녀의 가슴 앞을 가로질러 안전벨트를 당겨왔다. 그 순간 둘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이에 있었다. 그의 숨결이 이렇듯 가까이 다가온 적은 없었다. 한주혁이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두 입술 사이에 종이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틈만 남겨졌다.

희미한 숨소리에 입술 끝이 간지러웠다. 예서는 저도 모르게 눈을 꼭 감고 단전 아래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심장이 북소리처럼 둥둥, 크게 울렸다. 본능적으로 첫 키스의 예감을 느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입술은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

눈을 살며시 뜨자 길게 뻗은 속눈썹이 보였다. 제 것보다 더 긴 것 같았다. 늘 담담하던 눈에 어두운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가 예서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을 뻗어 붉게 뜬 시동 버튼을 눌렀다. 차 안은 다시 고요한 어둠에 휩싸였다.

다음 순간, 커다란 손이 뻗어와 머리 뒤를 받쳤다. 그의 입술이 곧바로 그녀의 것 위에 닿았다. 따뜻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보드랍고 촉촉했다. 입술이 제 아랫입술을 물고 살짝 당기는 감각에 찌릿, 등골이 오싹거렸다.

그 전율을 더 음미할 여유도 없었다. 뜨겁고 말랑한 설단이 곧바로 입술 사이를 밀고 들어와 치열을 훑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 하마터면 그의 혀를 물어 버릴 뻔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순간, 그의 혀가 그녀의 것을 부드럽게 휘감으며 지그시 힘을 주었다.

눈이 감기며 의식이 아련해졌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양감이 밀려오며 전신이 허공에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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