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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30)화 (31/124)

<30화>

“솔직히 인정할게. 네가 최인하와 내일 만나 그의 고백을 받아줄까 봐 불안했어. 아니….”

불안이란 표현만으론 충분치 않았다.

“미칠 것 같았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이 만남을 거부했다면,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최인하와의 약속 장소를 알아내 들이닥쳤을 것이다. 어떻게든 그 고백의 자리를 파투 내고 온갖 추태를 부렸을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

“미안해. 그동안 너 많이 힘들게 해서.”

민예서는 시선을 들어 올려 그를 마주 보았다. 안개가 걷히듯 경계심이 조금씩 스러지는 눈이었다. 하지만 불신의 빛은 잔존해 있었다. 그가 정말 진심인지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때 누군가 그들의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어? 안녕하세요, 주혁 선배. 그리고… 예서?”

낯익은 얼굴이었다. 지난 봄 학기, 조별 과제를 같이 했던 경제학과 송유영이 서 있었다. 짙은 향수 냄새와 불온한 호기심을 나란히 풍기는 분위기는 예전과 똑같았다.

“어… 안녕, 유영아.”

팀 과제 말미에는 예서 님, 유영 씨 등등 호칭하던 것도 유야무야되고 서로 말을 놓게 되긴 했었다. 그렇다고 가까워지거나 과제가 종료된 후에도 연락을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친구로 지내기엔 서로 잘 맞을 타입이 아니었다.

“근데 둘이 여기서 뭐 하세요? 시험 기간도 끝나고 다 종강했는데…. 우연히 만난 거야?”

송유영은 부담스러운 시선을 번갈아 보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좀처럼 물러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게….”

“첫눈 오는데? 이런 특별한 날에 오다가다 우연히 마주친 사이끼리 보는 건 좀 아깝잖아. 남친, 여친을 만나야지.”

송유영은 혼자 깔깔 웃다가 말꼬리를 슬며시 끌었다. 음험한 눈초리가 예서에게로 다시 고정되었다.

“근데 선배는 싱글인 거 다 알구, 예서 너 최인하 선배랑 사귀지 않아?”

“뭐? 아니야.”

“아냐? 둘이 자주 붙어 있던데 사귀는 거 아니었어? 난 당연히 그 선배가 네 남친….”

“나야.”

주혁이 두 여자의 대화를 비집고 끼어들었다.

“예서 남자친구는 나라고.”

그는 팔짱을 낀 채 송유영을 올려다보았다. 팀 과제 할 때와는 달리, 어미가 완전히 짧아져 있었다. 성가신 기색을 숨기지도 않았다.

“네…?”

“나와 예서, 진지하게 사귀는 사이니까 그런 오해는 안 해 주길 바라.”

송유영이 눈을 깜빡거렸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낯이었다.

“그러니까… 주혁 선배가 예서와 사귄다고요? 어, 언제부터요? 둘이 CC란 말, 전혀 못 들었는데.”

“얼마 안 됐지만 그 전부터 쭉 좋아했어.”

이번에는 송유영뿐 아니라 예서도 깜짝 놀란 눈치였다.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봄 학기 개강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그럼 선배가 먼저 사귀자고 한 거예요? 예서한테?”

“그건 아니….”

송유영의 물음에, 예서가 본능적으로 부정하려 나설 때였다.

“맞아.”

주혁은 천연덕스럽게 수긍했다.

“내가 먼저 사귀자고 했어.”

대답은 송유영에게 하면서도 시선은 시종일관 맞은편의 예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눈빛이 허공에서 얽히며, 민예서의 목울대가 희미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주혁이 크리스마스트리 너머를 눈짓해 보였다. 송유영의 일행으로 보이는 여자 둘이 트리 너머에 앉아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 네. 이만… 이만 가봐야겠네요. 그럼 좋은 시간 되세요. 이만 가볼게, 안녕!”

송유영은 웃는 둥 마는 둥, 얼떨떨한 얼굴로 돌아섰다. 그녀가 제 동행에게 돌아간 이후로도 트리 너머 따가운 시선은 계속되었다. 주혁이 의자를 뒤로 밀었다.

“나가자. 저녁 먹으러.”

“네? 아… 네.”

예서는 퍼뜩 놀랐다가 이내 수긍하곤, 옆자리에 벗어둔 패딩점퍼와 가방을 챙겼다. 한주혁은 검은색 롱코트를 입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목가에 느슨하게 늘어진 체크 패턴 머플러를 풀어냈다. 그러고는 예서에게 곧장 다가와 그녀의 목에 둘러주었다.

“밖에 추워.”

“…….”

“따뜻한 데 계속 있었으니까 나가면 추울 거야. 눈도 오고. 아, 지금은 그쳤네.”

“전 괜찮아요, 선배. 선배가 하세….”

“난 추위 별로 안 타. 나가자.”

그가 그녀에게서 빈 잔이 놓인 트레이를 받아 가 리턴 선반에 올려두고 앞장서서 출구로 향했다. 예서가 뒤따라가는 내내, 송유영과 일행이 앉은 테이블로부터 시선이 계속 따라붙었다. 와, 키도 진짜 크다. 완전 모델 같다. 너무 멋있네. 들릴 듯 말 듯 수군거리는 목소리도 문을 닫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

바깥은 어느새 해가 져 있었다. 아직 6시도 되지 않은 겨울 초입의 저녁은 어둑어둑했지만 스산하진 않았다.

“공영주차장까지 10분 정도 걸어야 되는데 괜찮겠어? 차 가져왔거든.”

아, 차가 있었구나. 한주혁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플러가 입가를 덮고 있어 다행이었다. 혹 귓불까지 빨개진 뺨이 드러난다 해도, 추위 때문으로 보이길 바랐다.

“다행이네. 그럼 가자.”

그리고 그녀의 장갑 낀 한 손을 가져가 제 맨손 안에 깍지 끼었다. 심장이 철렁, 요동쳤다. 예서는 몇 걸음 걷다 저도 모르게 그를 돌아보았다.

“어, 저. 선배….”

“아, 미안. 내가 너무 빨리 걸었지.”

한주혁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것과 마주 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는 평소의 너른 보폭을 의식적으로 좁히며 걸었다. 평소처럼 여유롭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하지만 예서는 그렇지 못했다. 심장이 빨리 뛰다 못해 이젠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장갑을 끼고 있어서 다행인 동시에, 끼지 말 걸 후회감이 일기도 했다. 그의 살갗에서 전해오는 온기와 직접 맞닿고 싶었다.

주차장을 향해 걷는 내내, 은밀히 숨을 들이쉬었다 멈추길 반복했다. 그렇게 하면 한주혁의 체취가 더 확연히 느껴졌다. 보드랍기 짝이 없는 캐시미어 머플러에는 그의 냄새가 물씬 흘렀다. 젖은 풀잎, 비 온 뒤 숲처럼 싱그럽고 알싸한 내음이 너무도 좋았다.

이윽고 그의 차 앞까지 왔을 땐 조금 놀랐다. 차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제 눈에도 평범한 차는 아니었다. 예서는 얼떨떨하니 그의 운전석 옆자리에 올라탔다. 외관처럼 내부도 꽤 값비싼 슈퍼카처럼 보였지만 무슨 차인지 묻지는 않았다. 들어도 모를 게 뻔했다.

“선배. 이 차, 선배 거예요?”

하지만 그의 자차인지는 궁금했다. 그가 여상하게 응, 대꾸하며 시동을 걸었다.

“평소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한 거였군요.”

“가끔 가지고 올 때도 있어. 주민센터 공영주차장에 세워두고 걸어왔지.”

“아아….”

대화는 거기서 잠시 멈췄다. 그가 차를 소유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남들이 모르는 선배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대로변을 미끄럽게 활주하는 차 안은 무척 아늑했다. 푹신푹신한 가죽시트와 히터에서 나오는 온기, 머플러에 스며든 그의 체취와 한데 뒤섞인 방향제 냄새까지 모든 게 현실 같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현실 같지 않은 것은 역시….

“선배,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가까우니까 G 494에 간다고 아까 얘기했는데. 흘려들었구나.”

“아, 깜빡했나 봐요.”

예서의 얼굴이 다시 붉게 상기되었다.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오디오를 켜며 다시 물었다.

“고기 좋아해?”

“네? 그야 당연히….”

“너 고기 좀 먹이려고. 요즘 좀 야윈 것 같아서.”

“제가요?”

예서가 저도 모르게 머플러 아래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기말고사 기간이라 얼굴이 좀 핼쓱해 보일지는 몰라도, 눈에 띄게 마르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여름 이후 옷이 전체적으로 조금 헐렁해지긴 했다.

“응. 옷이 한 치수씩 늘어났잖아. 봄 학기에 비해서.”

그는 여상하게 대꾸하곤 G 쇼핑몰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예서가 혀로 마른 입술을 살짝 축였다. 원래 관찰력이 좋은 건지, 그만큼 그녀에게 늘 관심이 있었던 탓인지 알 수가 없었다.

***

한우 오마카세는 난생처음이었다. 푸드코트에서 숯불 직화구이 정식, 이런 걸 먹을 줄 알았는데 인당 9만 9천 원짜리 디너 코스라니.

예서는 전채요리 3종에 특안심, 채끝등심, 추리살과 육전 비빔국수, 등심과 불고기, 한우 스키야키와 된장찌개로 구성된 메뉴판을 눈이 빠져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다음 주에 받을 과외비 나머지와 계좌 잔액, 엄마가 약국 일을 도와주는 대가로 가끔 쥐여주는 쥐꼬리만 한 용돈을 빠르게 합쳐보았다.

미쳤네. 십만 원이면 한 달 치 식비인데. 어쩌다 채린이랑 다 같이 뭉쳐도 인당 만 원 이상 넘는 데는 안 가는 그녀였다.

“선배.”

한주혁이 제 몫의 메뉴판을 서빙 직원에게 돌려준 뒤 차를 다기에 따라줄 때였다. 예서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두 손에 감싸 쥐고 운을 뗐다.

“이미 주문까지 해 버렸으니 뒷북이겠지만, 전 이런 곳은 부담스러워요. 아니, 감당이 안 돼요. 선배는 제가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여유가 있는 것 같지만….”

“알아. 학생에겐 너무 과하지. 한우 오마카세 치고 꽤 저렴하긴 하지만. 나도 어르신들과 동행하지 않으면 오지 않을 곳이야.”

왠지 그럴 것 같았다. 그가 일부러 차를 학교에 주차하지 않는 것도 주차비와 무관하게, 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하지만 이제 우린 연인이잖아. 내가 번 내 돈으로 여자친구에게 이 정도 사줄 수는 있으니까 부담 갖지 마.”

“선배가 번 돈이요? 선배도 알바하고 있었어요?”

전혀 몰랐다. 뭔가 학업 외에 바쁘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설마 그 역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을 줄이야. 역시 과외 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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