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12월도 아흐레가 흐른 날, 비전공과목의 마지막 과제를 제출하고 몇 시간 만에 휴대폰의 문자와 톡을 확인할 때였다.
예서는 누군가의 문자를 훑으며 두 눈을 의심했다. 이제 다 끝났구나, 후련함을 느끼던 얼굴이 어느새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안녕. 아직 학교?]
반가움이나 기쁨 대신 경계심이 불쑥 튀어 올랐다.
[할 얘기가 있어. 집 근처에서 잠깐 보고 싶은데.]
무슨 수작이지? 이제 와서 대체 무슨 얘기를….
[달갑지 않을 거란 건 알아.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야.]
예서는 초조함에 애꿎은 입술만 짓씹었다. 이미 읽어 버렸으니 못 봤다고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답은 나와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문자를 전송하기 직전 예서의 손가락이 멈췄다. 화면 위 글자가 한 자씩 천천히 사라졌다. 예서는 한참을 고민하다 단말기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가뜩이나 과제로 뻑뻑한 눈이 침침하며 현기증이 일었다.
[네. 집 근처까지 가서 다시 연락드릴게요.]
결국 답문을 보냈을 때는 20분이 지난 후였다.
***
늦은 오후, 그 해의 첫눈이 사락사락 내리기 시작했다.
길 가던 보행자들이 저마다 발길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가리켜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은 대체로 밝았지만, 교통대란을 걱정해서인지 살짝 찌푸리는 얼굴도 보였다.
주혁도 고개를 들고 위를 잠시 보다가 약속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20분이나 지났는데도 느릿느릿,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카페로 향하는 몸짓이 느긋해 보였다.
[미안해. 차가 많이 막혀서 10분쯤 늦을 것 같아. 조금만 기다려줘.]
10분이 아니라 그 이상 늦는대도 상대방은 진득하게 기다릴 터였다. 일부러 늦은 건 아니었지만, 민예서는 반드시 그럴 거란 확신이 있었다.
아직도 민예서가 그를 좋아하고 있다고 믿었다. 아무리 겉으로는 무관심을 표방하고 있어도 여전히 그렇지 않을까. 사람의 감정이란 게 그리 쉽게 식을 순 없는 법이니까. 민예서처럼 진지한 타입은 더더욱.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카페에 들어서자, 카운터 너머 직원과 그 옆 테이블의 여자들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하나같이 눈길을 그에게 고정한 채 뗄 줄을 몰랐다.
주혁은 누구와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카페 안쪽으로 향했다. 이마 위 흘러내린 머리칼 아래, 길게 뻗은 속눈썹과 입체적인 콧날이 두드러져 보였다. 여자들의 눈길은 190cm 가까운 장신이 홀 한가운데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를 지나 구석 자리에 앉을 때까지 계속 따라붙었다. 호기심의 시선은 남자의 맞은편 상대에게로 즉각 향했다.
찬탄과 선망의 눈빛은 호기심과 질투, 부러움과 납득으로 점차 변해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맞이하는 여자도 남자 못잖게 눈에 띄었다. 하나로 묶어 틀어 올린 머리 아래, 매끄럽고 새하얀 얼굴은 흠잡을 데 없이 예뻤다. 뺨에 젖살이 남아 있어 무척 앳되게도 보였다.
“선배.”
“오래 기다렸어? 미안.”
주혁이 엷게 웃었다. 예전의 부드러운 미소였다.
“아뇨. 선배, 밖에 첫눈 오던데 안 젖으셨네요. 아, 음료는….”
“별로 생각 없어.”
그가 민예서의 앞에 놓인 머그컵을 바라보았다. 반쯤 남은 핫 초콜릿이 미지근해 보였다.
“그거, 다 마신 거야?”
“네? 네….”
“그럼 내가 마저 마실게.”
주혁은 컵을 제 쪽으로 당겨서 입가로 가져갔다. 민예서가 다소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 것에 손을 대서가 아니라 자신이 먹던 것에 스스럼없이 입을 대기 때문이리라.
그는 컵을 비우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차분하게 운을 뗐다.
“내가 오늘 보자고 한 이유는….”
민예서가 긴장한 듯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불안으로 흔들리는 눈이 사냥꾼과 맞닥뜨린 사슴의 것 같았다.
“혹시 내일 최인하가 보자고 했어?”
“네? 그걸 어떻게….”
“그 약속 취소했으면 좋겠어.”
주혁은 의자에 등을 깊숙이 묻었다. 갑자기 눈이 뻐근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간밤에 금융팀 보안을 전체적으로 업데이트하고 꼼꼼히 체크하는 바람에 잠을 두 시간 이상 자지 못했다. 물론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게 무슨….”
“최인하, 너 좋아해. 설마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아니에요, 그런 거.”
예서가 단호하게 눈을 치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오지 말 걸, 벌써부터 후회감이 들었다.
“엄마 친구분 아들이고 예전부터 집안끼리 잘 알아서 친오빠처럼 편하게 지내온 사이예요. 인하 오빠도 날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고요.”
“그건 네 생각이야. 당사자는 몰라도 제삼자 입장에서 확연히 보이는 것들이 분명 있어.”
주혁이 머그컵을 옆으로 밀어두고 낮게 한숨지었다. 그리고 담담하게 사과했다.
“미안해. 네 기분을 상하게 할 의도는 없었어.”
“…….”
“기껏 어렵게 만났는데 분위기를 망치고 싶진 않아.”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그가 맞잡고 관절을 꺾던 움직임을 멈췄다. 피로에서 나온 무의식적인 몸짓이었던 듯했다. 혹은 평소답지 않은 긴장과 초조함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인하 오빠가 절 어떻게 생각하든, 그걸 선배가 왜 다시 관여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미 그 얘기는 전에 마무리된 걸로 아는데요.”
더구나 약속을 취소하라는 건 명백히 선을 넘은 요구였다. 선후배 사이에서 하기에는 월권행위가 아닐 수 없다.
“사귀자, 우리.”
주혁은 더 이상 끌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직진했다. 그가 말을 잇는 순간, 민예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아닌 척 회피하고 다투는 건… 더 이상 의미 없는 것 같아. 너나 나나.”
예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제 마음에 아직 여지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었다.
이제 와 무슨 소리예요? 이미 늦었어요. 저는 더 이상 선배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아요.
지금이라도 그렇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뇌리에서 맴돌 뿐,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나올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선배는….”
예서는 뜨악한 얼굴을 하며 눈치 보듯 주위를 둘러보다 목소리를 낮췄다. 다행히 트리를 장식하는 카페 직원 덕분에 그들의 자리는 잠시나마 사각지대가 되어 있었다.
“선배는 저랑 그러고 싶지 않다고 완강하게 버텨왔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
“지금까지 세 번 고백했어요. 세 번 다 퇴짜 맞았고요.”
“그래. 그래서… 오늘은 내가 다시 고백하려고.”
한주혁은 턱을 문지르던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것에 정면으로 부딪쳐오는 눈빛이 명징했다.
“민예서, 너 좋아해.”
“…….”
“말했듯이, 더는 못 버티겠고 부정하지 못하겠어. 널 볼 때마다 견딜 수가 없어서.”
예서는 말을 잊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일까. 의혹과는 별개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동안 멀리서나마 본 한주혁은 늘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지난 두 달 내내 경영관 건물과 도서관, 구내식당과 카페 등지에서 일별할 때마다 언제나처럼 무감하고 차분하며 한 점의 동요도 없어 보였는데.
어쩌면 선배도 나처럼… 그렇게 보이기 위해 애썼던 것은 아닐까. 수면 아래, 깊숙한 내면은 언제가 들끓고 있었으면서. 그 들썩임을 어떻게든 억누르고 바닥 아래 묻으면서.
주혁은 긴 속눈썹 아래 시선을 내리깔았다. 흡사 고백을 한쪽이 아니라 들은 사람처럼 정적인 태도였다. 민예서는 여전히 제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무리도 아니다. 병원에서의 마지막 대치 이후로는 일부러 눈길도 주지 않으려 해 왔었다. 신경이 쓰인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부정하기 위한 발악의 몸짓이었다.
민예서는 그런 존재였다. 내가 갖기엔 너무도 성가시지만 다른 새끼에게 넘길 수도 없는 여자. 정확히는 그가 종속되기 싫은, 세상 모든 여자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믿었다.
성가시고 귀찮았다. 자꾸 머릿속에 떠오를 때는 차라리 다른 놈이 덥석 채가길 바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녀가 저를 보듯 다른 새끼에게 눈길을 주는 상상만으로도 피가 들끓고 분노가 치밀었으니.
이제 전전긍긍하는 건 그 쪽이 되어 있었다. 결국 그 새끼 때문이었다. 가을 학기부터 등장한 복학생, 최인하.
석 달 가까이 강아지처럼 민예서의 곁을 맴도는 그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대하는 민예서와 꽤 닮아 있었다. 물론 둘의 양상은 지극히 달랐다. 민예서는 세 번의 고백과 거절 이후로도 멀리서 눈길로만 그를 좇았고, 최인하는 처음부터 제 감정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면서도 당사자가 느끼게는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주 달랐다.
결국 최인하의 예고된 고백이 트리거가 된 셈이었다. 그의 속셈은 불 보듯 뻔했다. 학부 졸업과 대학원 진학을 앞둔 마지막 학기 말미, 그것도 크리스마스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이 시점이야말로 완벽한 타이밍일 터였다.
그래서 이제는 더 버틸 수가 없었다. 미처 깨닫지 못했던 위기감은 어느새 시간의 흐름과 어깨를 나란히 해오고 있었다.
최인하와 민예서가 만날 내일이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그의 예감도 나날이 확실해져 갔다. 최인하는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직진할 터였다.
최소한 절반의 확답은 받아내지 않을까. 시간이 좀 필요하다거나, 아직은 연애 자체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거나. 그러면 그 새끼는 그 미세한 가능성을 빌미 삼아 물심양면 천천히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것이다. 집안끼리의 친목도 큰 이점으로 작용하겠지.
개새끼.
상상만 해도 이가 악물렸다. 이제 와서 다른 놈에게 주다니. 말이 되는 소린가. 아무리 그 자신이 가지긴 싫었어도 딴 새끼에게 넘기기는 더 싫었다.
예기치 못한 복병의 존재가 불거지며, 민예서의 가치는 이제 도저히 놓칠 수 없는 선까지 부상해 있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선배가 이러는 게 당황스럽기도 하고….”
마침내 예서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당혹감에 깜빡이는 눈에 짙은 의혹과 불신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