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28)화 (29/124)

<28화>

하지만 즉각적인 부정의 답이 돌아왔다.

“그런 거 없어.”

“그럼 어떤 종교적인….”

“무교야. 아무것도 안 믿어.”

“그럼 그런 게 없는데도 나랑 사귈 순 없단 거죠? 여전히 이성으로 느끼고 좋아하는데도.”

“…….”

“선배.”

“그래. 하지만 네가 좋아. 너 외에 다른 여자는 전혀 눈에 보이지도 않아. 그것만은 명확한 사실이야.”

그가 이번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예서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머리를 흐트러뜨리지도 않고 눈을 감지도 않고, 이를 악물지도 않았다.

“너 볼 때마다 꼴려. 네 벗은 몸도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안고 싶어. 너랑 자고 싶다고.”

씨발.

하지만 욕지거리를 내뱉긴 했다. 스스로를 향한 욕설인 것 같았다. 예서는 다시 보는 그의 거친 모습에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녀에게 그토록 욕정을 느낀다는 필터 없는 고백이 더 충격적이었다. 갑자기 다리 사이에 까닭 모를 열기가 모이며, 후끈한 감각이 단전 아래를 자극하는 둔통이 일었다.

“선배가….”

동시에, 또렷한 분노 역시 의식을 채워왔다.

“선배가 제게 도대체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요.”

분노 때문인지 이제는 의식이 또렷해져 있었다.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시야는 부옇게 흐려졌다.

“정말 모르겠어.”

“…….”

“앞으로는 저, 완전히 무시해 주세요. 말도 걸지 마세요. 다가오지도 말고.”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자꾸 저 흔들지 말라고요.”

“민예서.”

예서는 더 말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똑같은 얘기, 도돌이표일 바엔 듣고 싶지 않았다. 더는 한 마디도 듣고 싶지 않다.

“선배, 그거 알아요? 선배 진짜….”

예서는 숨을 들이쉰 후 다시 내뱉었다.

“쓰레기예요.”

“…….”

“나쁜 놈이라고요.”

흐윽, 기어이 울음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의 면전에서 운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릴 적 아빠의 장례식 이후로는 철들고 처음이었다.

“이제 끝이에요. 마음 정리할게요, 깨끗이.”

눈물이 줄줄 흐르면서도 목소리는 명료하게 흘러나왔다. 북받쳐 오르는 설움과 미련으로 흉부가 쥐어짜듯 갑갑했다.

“돌아가신 우리 아빠의 안식을 걸고 맹세해요. 지금 이 시간을 끝으로, 다시는 선배에게 아무 감정 없을 거예요.”

“예서야.”

“이만 나가주세요.”

그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손을 뻗어 벨을 눌렀다.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한 공간 안에 단둘이 있는 것조차 싫었다. 호출을 받은 간호사가 노크 직후 문을 열었다.

“저, 혼자 있고 싶… 아니, 지금 퇴원하고 싶은데요….”

“민예서.”

한주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간호사를 등지고 섰다.

“시간이 너무 늦었어. 내가 갈 테니까 오전까지 있다가 가.”

“…….”

“내가 꺼져줄 테니까. 지금 당장.”

그는 돌아서서 간호사에게 뭐라 말하곤 바로 방을 나갔다. 한주혁의 존재는 눈 깜짝할 새 증발해 있었다. 다시 눈물이 솟구쳤다. 그가 눈앞에서 꺼져주면 울음이 잦아들 줄 알았건만.

이제 정말 마지막이란 생각에, 뜨거운 것이 치밀며 가슴이 먹먹했다. 예서는 간호사가 나가기 전까지 잠시 진정했다가 문이 닫히자마자 다시 울음을 토했다.

짧고 짙은 첫사랑의 종말을 고하는 눈물이었다.

***

오랜만에 돌아온 성북동 본가는 고적했다. 자정 전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는 어르신들 대신, 상주하는 김 집사가 그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큰아버지 한이석의 휴식 공간인 풍경실 겸 서재에는 최고급 시가가 상비되어 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자마자 발걸음이 저절로 2층으로 향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주인 없는 서재 소파에 몸을 안착한 뒤 시가에 불을 붙였다. 탄식처럼 연기가 새어 나왔다.

성준이 뒤늦게 연락했을 때는 박연지의 온라인 쇼핑몰 서버를 한창 손봐주고 있을 때였다. 그는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집 밖으로 뛰어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도 없어 계단으로 뛰어 내려와 로비를 나서는 순간, 대각선 방향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민예서는 문 닫힌 카페 차양 앞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머리에 피가 확 몰리며 분노가 치밀었다. 만약 박성준이 옆에 있었다면 당장 멱살을 잡고 벽에 밀어붙여 잡도리를 했을 터였다.

더 생각하지 않고 달려갔다. 하지만 민예서의 몸은 그가 채 닿기도 전에 기우뚱, 흔들리다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하던 낯이 암전된 간판 아래 하얗게 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이 들었을 때는 새벽 2시가 넘어가 있었다. 수명을 다한 시가도 테이블 위에 쌓여 있었다. 그는 어지럽게 널린 탁자 위를 단숨에 정리하고 창가로 다가섰다.

서재의 테라스 난간 너머로 어둑시니 무리처럼 우거진 숲, 이쑤시개처럼 뾰족한 남산 타워가 보였다. 카페인을 들이켠 것도 아닌데 졸음이 오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뇌리가 더 명료해지고 있었다.

***

11월도 어느덧 끝자락에 다다라 있었다. 채린과 나란히 도서관에서 나왔을 때는 밤 10시가 가까워 있었다.

후문에서 채린과 헤어져 정류장 쪽으로 가는데 골목 어귀에 낯익은 간판이 보였다. 즉석떡볶이 가게의 붉은 간판이었다. 창가 자리에 한주혁과 마주 앉았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이제 그런 날은 없겠지. 그때처럼 선배와 허물없이 얘기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때는.

지난 한 달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어느새 학기 말이 코앞에 있었다. 그동안 한주혁과의 접점은 없었다. 건물 앞, 복도, 학생 식당, 과사에서도 스치듯 지나갔을 뿐 정면으로 맞닥뜨린 적은 전무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 여겼다.

그를 의식하지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지도 않았다. 일부러 더 즐거운 척 과장해서 웃거나 떠드는 일도 없었다. 그저, 그와 처음부터 아는 사이가 아니었던 것처럼 마음을 비우고 현실에만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한주혁의 존재가 멀리서나마 감지될 때도 초연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어김없이 가슴이 쿵, 쿵 뛰고 심장이 긴장감에 조여들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냉정을 되찾고 다른 것을 생각하려 애썼다. 산적한 과제들과 시험, 그리고 짬이 날 때마다 열심히 쓰고 있는 글까지. 그럼 금세 평정을 되찾곤 했다.

괜찮아. 앞으로 한 학기만 더 지나면 돼. 4학년이 다 그렇듯, 선배도 내년 봄 학기에 남은 학점을 다 이수하고 2학기부턴 거의 오지 않을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겨울방학 동안, 선배를 먼발치에서라도 볼 일이 없는 동안에는 마음이 완전히 정리될 테니까. 더는 아무렇지 않게 잘 갈무리할 수 있다. 그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서야!”

전철역에 닿기 직전, 갑자기 등 뒤에서 낯익은 헐떡임이 들려왔다. 최인하였다.

“야, 민예서! 같이 가자고 몇 번을 불렀는데 듣지를 못하냐? 어, 뭐야. 이어폰도 없구만.”

“미안해. 오빠. 뭘 좀 생각하느라…. 오빠도 지금까지 도서관에 있었어?”

“응. 팀플하느라. 근데 무슨 고민 있어? 뒷모습만 봐도 엄청 심각해 보이더라.”

두 사람은 역 입구 앞의 벤치에 앉았다. 카페나 어디 들어가기엔 시간이 애매했고 그날 밤은 신기할 만큼 공기가 안온했다.

“아… 과외가 12월 중순에 끝나거든. 민아가 유학 준비할 예정인데 새로 과외나 다른 알바를 알아봐야 해서. 민아 어머니께서 주변에 알아봐 주신다고 했지만, 혹시 모르니까.”

예서는 멋쩍게 웃다가 과외 핑계를 댔다. 그 역시 고민거리 중 하나였기에 거짓말은 아니다.

“카페 일은? 정문 앞 카페, 이번 방학 때는 안 하려고?”

“올겨울에는 휴점하고 리모델링하실 건가 봐. 일단 겨울방학 동안 바짝 벌어둬야 하니까, 정 안되면 학원 보조강사라도 하려고.”

“그럼 그러지 말고… 우리 아버지 회사에서 기간제 알바 하는 건 어때? 안 그래도 사무직 보조 구하고 계시거든. 너 액셀, ppt 이런 거 잘하잖아. 성격도 꼼꼼하고.”

“어… 아저씨 회사에서?”

최인하의 부친과 그의 둘째 형 사무실은 종로에 있어서 집과도 그리 멀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오피스 문서 작성도 곧잘 하는 편이다.

“시급도 최저보다 더 많이 쳐 주실 거야. 식비는 당연히 따로 챙겨 주고. 과외만큼은 아니겠지만 야, 그래도 우리 꼰대들 없을 땐 널널하게 농땡이도 좀 부리고 너 좋아하는 책도 좀 읽고…. 더 편하지 않겠냐?”

“그건 아니지. 오히려 아는 분들이니까 더 열심히 해야지 무슨 소리야.”

“어휴, 그래. 너 뼛속까지 근면 성실한 거 잘 알지, 잘 알아. 아무튼 우리 집에서는 너라면 대환영일 테니까 그냥 하는 걸로 하자. 응?”

“정말 그래도 되면 나야 너무 고맙지. 고맙긴 한데….”

“고마우면 고마운 거지, 마무리가 왜 그래?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자세한 건 시험 다 끝나고 얘기하자. 어차피 알바도 15일 정도부터 시작해야 되니까.”

“응. 그래도, 혹시라도 아저씨가 안 된다고 하시면 편하게 말해 줘. 나는 정말 괜찮으니까.”

예서가 옆에 내려둔 가방을 어깨에 메고 일어나려 할 때였다. 최인하가 잠깐만, 그녀를 제지했다.

“너 기말고사 마지막 날이 9일이었나?”

“아, 8일이야. 9일은 파이널 과제 제출.”

“그래? 그럼 10일에 나랑 좀 보자. 내가 이태원 쪽으로 갈게.”

“10일? 음… 토요일이니까 괜찮긴 한데. 알겠어.”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은 전날에 정하기로 한 뒤 두 사람은 다시 전철역으로 향했다. 아르바이트에 대한 걱정을 덜어서 그런지 예서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학비는 장학금을 받는다 해도, 부대비용과 용돈은 졸업 전까지 그녀의 몫이었다.

제발 정우도 제때 졸업해줬으면 좋겠는데….

엄마 고생도 고생이었지만, 자신까지 정우의 뒷바라지에 보태고 싶지는 않았다. 학교만 졸업하면 그녀의 인생을 살고 싶었다. 오래전부터 계획한 대로, 꿈과 현실을 잘 조율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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