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예서는 쭈그리고 앉은 채 고개를 돌렸다. 오피스텔 입구에서 한주혁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선배…?”
간신히 일어섰지만 시야가 흐렸다. 굵은 빗줄기 때문이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한주혁이 차양 앞까지 다가섰을 때 그게 비 때문이 아님을 알았다.
갑자기 전신에서 기운이 쭉 빠지며 균형을 잃었다. 몸이 옆으로 기울어지며, 차디찬 벽에 머리가 닿았다.
이상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겨우 한 끼 굶었다고. 요즘 잠을 못 자긴 했지만.
눈을 감기 직전, 그녀를 부르는 외침이 이명처럼 들렸다. 커다란 손이 다가와 어깨를 감싸 쥐는 손길이 따뜻했다. 그 온기를 좀 더 느끼고 싶었지만 의식이 버텨내질 못했다.
혼미해진 정신은 고장 난 전등불처럼 수초간 깜빡이다 완전히 꺼져 버렸다.
***
박성준은 11시가 가까워서야 병원으로 들어섰다. 입원실이 있는 대형 개인 클리닉은 늦은 시간에도 불빛이 환했다.
“어떡하냐, 진짜. 으이그, 등신! 갈 때 가더라도 전화 한 통만 했으면 됐을걸.”
예서가 아래 카페에서 기다린다고 한마디만 했으면 됐을걸. 어떻게 그걸 까맣게 잊어서 이 사달을 만들었는지 죄책감이 들었다.
“근데 예서 걔도 왜 그렇게 미련하게 기다린 거야? 번호도 아는데 그냥 연락을 하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어느새 병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노크를 하자 주혁이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나왔다. 처음 보는 험상궂은 얼굴에 간담이 서늘했다. 그는 성준을 라운지로 이끌고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야, 예서는 괜찮아? 어쩌다 쓰러진 거야. 어휴…. 내가 그 사기꾼 새끼 잡으러 가서 그 누나가 싹싹 빌고 하소연하는 바람에 너무 늦게 생각이 났어.”
“그러게. 갈 때 가더라도 연락 한 번만 해 주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야, 너….”
성준은 침을 꼴깍 삼켰다. 반나절 만에 보는 사촌의 얼굴이 무척 낯설었다. 20년 넘게 그를 봐 왔지만 지금처럼 화가 나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정확히는 폭발 직전 같았다. 한 시간 전 통화할 때 냉랭했던 음성은 역시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화 많이 났구나. 예서는 괜찮은 거야?”
“피로가 많이 쌓여서 탈진했대. 오늘은 여기서 재우고 내일 데려다 줄 생각이야.”
주혁은 그를 더 보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성준은 눈을 깜빡였다. 분노를 꾹꾹 눌러 삼키는 걸 보고 있자니, 도대체 예서와 그 사이에 뭐가 있었던 건지 궁금증이 더 치밀었다.
“주혁아, 너….”
“돈은. 다 돌려받았어?”
“어?”
“사기꾼 잡았다며.”
“아, 그래. 자기 친누나까지 불러와 싹싹 빌더니 결국 돌려주더라. 그 자리에서 계좌이체 확인했어.”
“그래. 다행이네.”
주혁은 피곤한 듯 머리를 쓸어올렸다.
“늦었는데 들어가. 여기까지 안 와도 됐는데.”
“뭐? 아까 전화했을 때 너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한 시간 전 통화할 때 전신이 오들오들 떨렸던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어, 주혁아. 너 아직도 우리 집에서 누나 홈페이지 봐주고 있어? 내가 사기꾼한테 연락이 오는 바람에 깜빡 못 말했는데 예서가 오피스텔 1층에서 기다리고 있었거든. 혹시 둘이 만났어?
-뭐? 언제.
-7시 반쯤? 못 만났구나? 근데 이 시간이면 벌써 집에 가고 없….
-씨발.
갑자기 휴대폰을 뚫고 튀어나오는 욕설에, 성준은 제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겁을 먹었었다.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
뚝, 통화는 가차 없이 끊겼다. 다시 전화했을 땐 그가 예서를 인근 병원으로 옮긴 뒤였다. 성준이 회상을 마치고 뭐라 답하기도 전에 주혁이 몸을 돌렸다.
“박 대표에겐 홈페이지 복구됐다 전해줘. 이제 내 선에서 하는 컨설팅은 끝났다고도 알려주고.”
“넌 집에 안 가고?”
“내가 알아서 할게.”
“주혁아.”
그가 돌아서려는 주혁의 등에 대고 다시 운을 뗐다.
“너….”
너, 예서 좋아하는구나. 그것도 아주 많이.
“아냐, 아무것도.”
하지만 차마 묻지는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아직도 날이 선 주혁의 낯을 보니 일분일초라도 빨리 여기서 나가주는 게 최선일 듯했다.
“갈게. 예서한테도 미안하다고 전해 줘. 학교에서 정식으로 다시 사과하겠지만….”
“그럴게.”
두 사람은 나란히 라운지를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주혁은 그가 승강기 버튼을 누르는 것까지 확인하곤 돌아섰다.
착각일까. 병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워 보이지는 않았다.
***
예서는 상체를 일으켜 앉은 채 입술만 달싹였다. 간호사가 가져다준 죽을 먹고, 모친에게 친구 집에서 잔다고 대강 둘러대는 통화를 끝내자마자 한주혁이 병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녀를 차분하게 코너로 몰기 시작했다.
“제정신이야? 번호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확인 전화 한 번 할 수도 있었잖아. 누가 그렇게 쓰러지기 전까지 미련하게 기다리고 있으래?”
물론 그가 오피스텔까지 와서 기다리라 시키지는 않았다. 순전히 그녀가 제 의지로 한 일이었다. 기다리던 중 전화나 문자 한번 하지 않았던 것 또한, 오롯이 제 과오였다.
“제때 끼니도 안 챙기고, 비까지 와서 오한이 나는 줄도 모르고. 네가 애야? 자기 몸 관리 하나 못 하게.”
그렇다고 이렇게 냉정하게 독설을 할 필요까지 있을까. 예서가 뭐라고 말대꾸를 하려다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어찌 됐든 쓰러진 그녀를 여기까지 옮겨와 입원까지 시키고, 자정이 가깝도록 곁을 지킨 사람에게 화를 낼 순 없었다.
“폐를 끼쳐 정말 죄송해요, 선배. 병원비는 지금 바로 송금해 드릴… 아, 내일 퇴원할 때 제가 알아서 수납할게요.”
“이미 완납됐으니까 신경 쓰지 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가 답답한 듯 한숨을 쉬다가 다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리고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냉랭했지만 팔짱을 끼고 앉은 몸짓에는 경청할 의지가 충만했다.
“이제 말해 봐. 찾아온 용건이 뭐였는지.”
“…….”
“민예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어요. 선배가 정말 그 여자와 동거 중인지. 사귀는지.”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했던 말도 다시 캐묻고 싶었다. 누구와도 사귈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녀를 좋아하면서도 만날 수 없다고 해놓고 그 여자와 만나는 이유가 뭔지. 이제 완전히 그 여자에게 감정이 돌아선 건지. 그럼 이 상황에서 문제 되는 것은 오롯이 그녀 혼자만의 감정뿐인지.
“박연지는 온라인 홈쇼핑 대표야. 그동안 학교로 날 데리러 온 건 홈페이지 보안 체크해 달란 요청 때문이었고.”
그는 절반의 진실에 약간의 거짓을 섞어 들려주었다. 그녀가 신경 쓰니까 일부러 사귀는 척 모호하게 연출했다는 사실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사람, 곧 결혼해. 내년 1월 초로 날도 받아놨어.”
“네…?”
“박성준 누나야. 성준이는 내 사촌이고.”
그가 한숨처럼 덧붙였다.
“박연지도 내 사촌 누나란 소리지.”
“그 여자분이… 성준 선배 누님이셨다고요?”
박성준과 친척이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박연지라는 그 여자가 그의 사촌이었다니! 이성 관계가 아니었다니.
“맞아.”
그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서는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다 시선을 천천히 내렸다. 깊은 안도감이 심장 가득 퍼지며 전율마저 자아냈다. 바보 같았다. 안도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을 텐데.
“그게 네가 확인하려던 다야?”
한주혁이 오랜 정적을 깨고 물었다. 속을 전혀 읽을 수 없는 눈이었다. 그 눈빛이 예서를 미치게 했다. 정확히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시선, 호감과 무관심의 경계를 오가면서도 그 너머 또 다른 뭔가가 박혀 있는 듯한 눈은 늘 그녀에게 희망 고문을 가하는 천국이자 지옥이었다.
“아뇨. 더 있어요.”
예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 말이 술술 나왔다.
“선배가 저를 아직도 신경 쓰거나… 좋아하는데도 다른 여자와 사귀거나 동거를 하는지…. 만약 그렇다면 어떤 마음인지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온 거예요. 마지막으로.”
수초간의 침묵 끝에 한주혁이 입을 열었다. 꼿꼿하게 앉아 다리 꼬고 팔짱을 끼고 있었지만, 그 오만함과 유리된 뭔가가 극렬하게 느껴졌다.
“너에 대한 내 마음은 똑같아.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
“…….”
“그래서…. 아니.”
그가 머리를 아무렇게나 헝클어뜨리며 눈을 감았다. 격심하게 고뇌하는 그 모습이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에게 감정이 있다는 걸 보면 성소수자도 아니고, 달리 저울질 중인 상대가 있지도 않다. 그럼 대체 왜 누구와도 연애를 할 수 없다는 걸까.
“선배. 혹시 어디 아픈가요?”
“…….”
“병이 있는지 묻는 거예요. 심신의 어떤… 특별한….”
설마 시한부나 그 비슷한 상황은 아니겠지?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