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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26)화 (27/124)

<26화>

토요일 저녁 과외를 마치고 아파트촌을 나서던 예서는 신호등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며칠 전 최인하가 가리켰던 주거용 오피스텔이 건너편에 보였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신호등을 건너 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유리 출입문 안쪽으로 경비원이 앉아 있는 널따란 데스크가 보였다. 예서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건물 앞 작은 광장을 서성였다. 시간은 7시가 좀 넘어 있었다.

미친 짓이었다. 전에 로즈몬드 호텔 로비에서 맛봤던 자괴감, 그 참담함이 아직도 생생한데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예서는 1분 정도 더 서 있다가 다시 돌아섰다.

집에 가자. 평소처럼 근처 김밥집에서 대강 저녁을 때우고 귀갓길에 다 소화시킨 뒤 맑은 정신으로 책상 앞에 앉아 다음 전개를 쓰는 거야. 다음 퀘스트를 위해 마물도 다 설정해뒀잖아. 이제 쓰기만 하면 되는데 대체 왜 엉뚱한 짓거리만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때였다. 길 건너편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박성준이 씩씩거리며 누군가와 한창 통화 중에 있었다. 최인하의 말대로 여기 살고 있는 듯했다.

“아, 씨. 진짜 잡히기만 해 봐! 야, 온라인 판매 사기란 거 남들이 당할 때는 남 일인 줄만 알았지 내가 직접 당할 줄은 몰랐다. 몰라, 일단 내일 진정서 접수할 거라고 경고 문자 보내놨으니까 그때까지 연락이 없으면 진짜로 경찰서 직행해야지. 돈이 한두 푼도 아닌데 꼭 잡아야지 그럼!”

고가의 물건을 거래하다 판매자와의 연락이 끊긴 모양이었다. 그는 통화를 끊는 동시에 광장 벤치 앞에 선 그녀를 홱 돌아보았다. 예서가 깜짝 놀라 움찔 떨었다.

“어, 예서야! 네가 여기 웬일이야?”

조금 전까지 으르렁거리던 표정은 사라지고 평소의 온화한 얼굴이었다.

“여기 아는 사람 살아? 친구? 난 누나랑 같이 자취하거든.”

“어… 아뇨. 사실은.”

예서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에라 모르겠다, 말해 버렸다.

“이 근처에 과외하는 집이 있어서 지나가다가… 혹시 주혁 선배를 만날 수 있을까 해서 잠깐 와봤어요. 선배가 여기 산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아서…. 마침 할 얘기가 있어서요….”

더듬더듬, 약간의 거짓말과 진실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박성준은 평소 유들유들하긴 해도 말을 함부로 옮기거나 이상한 가십을 만들어낼 유형은 아니었다. 한주혁과 가장 친하니, 그 묘령의 여자와 정말로 동거하는 건지 여부도 알지 모르지만.

“주혁이? 어, 주혁이 여기 살지는 않아. 살지는 않지만 지금 여기 있긴 한데…. 저번에 팀 과제도 같이 하고 했으니 연락처 서로 알지 않아?”

살지는 않지만 여기 있다니. 역시 그 여자와 동거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는 건가.

“네, 그렇긴 한데….”

박성준은 알고 있을까? 안다고 해도 모른 척할 것 같았다. 학교에서도 그렇게 대놓고 데리러 올 정도면 분명 모를 리가 없는데. 예서가 침을 꼴깍 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얘기는 다음에 하면 되니까 전 이만 가보….”

“어, 그럼 내가 불러서 내려오라 할게. 잠깐만 기다려.”

“네?”

뜻밖의 제안에 예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혹시 주혁 선배가… 성준 선배 집에 있나요?”

“어? 아니, 우리 집은 아니지만….”

결혼식까지만 같이 살고 그 후에는 혼자 살겠지만, 엄연히 예비 매형이 제집처럼 자주 들락날락하는 누나 명의의 집이었다.

“사실은 우리 누….”

박성준이 누나 집이라고 말하려던 순간 똑, 똑, 빗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엇, 비 온다. 너 우산 있어? 없지? 바로 못 내려올 수도 있으니까 저기서 기다리는 게 어때?”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오피스텔 1층 상가 카페가 보였다. 예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그럼 기다릴게요. 감사합니다, 선배.”

“어, 조금만 기다려. 있는 건 확실하니까 금방 내려올 수 있을 거야.”

박성준은 후다닥 유리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보안카드를 중문에 가져다 대는 모습이 불투명한 문 너머로 보였다.

예서는 그 자리에 수초간 서 있다가 박성준이 말해준 카페로 들어섰다. 마침 오피스텔 출구 건물이 보이는 창가가 비어 있어서 거기 앉아 음료를 주문했다.

뜻밖의 조력자를 만난 기분에 얼떨떨했다. 동시에 가슴은 여전히 무거웠다. 박성준은 주혁이 그의 집에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역시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걸까. 정말 사귀는 건가.

아무래도 좋았다. 마지막으로 담판을 내고 싶었다. 그의 입으로, 더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고 신경도 쓰이지 않으며 결국 다른 여자와 사귀기로 했다는 결론을 듣고 싶었다. 아니, 반드시 들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이 지리멸렬한 짝사랑을 마침내 종결짓고, 미련을 훌훌 벗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성준이 엘리베이터 앞에 막 섰을 때였다. 휴대폰이 울려서 휴대폰을 들어 올린 순간 그가 헉, 숨을 들이켰다. 시가 5백 5십만 원짜리 오디오 액티브 스피커를 4백만 원에 중고로 내놓고는, 돈만 홀랑 받아 처먹고 택배는 차일피일 미루더니 급기야 연락 두절까지 되었던 사기꾼의 번호였다.

“여보세요! 하, 웃기네, 씹. 깜빵에 처넣는다니까 이제야 연락을 하시네? 내가 뼈 빠지게 알바해서 모은 피 같은 돈을 어떻게 감히!”

-아니, 그게요. 오해예요. 보내주려고 했는데 제가 좀 아파서….

“오해 좋아하시네! 이봐, 당신 거기 어디야! ”

-저 뱅뱅사거리에 있는데요, 돈 돌려드릴 테니까 경찰서엔 찌르지 말아주세요, 예? 죄송합니다, 진짜 죄송해요! 우리 집에서 알면….

남자의 앳된 목소리 너머, 귀에 익은 손님 환영 로고송이 울렸다. 어딘지 알 것 같았다.

“너, 미성년자구나? 하, 이 어린 게 감히 사기를 쳐? 너 지금 D 아이스크림 가게에 있지? 거기서 딱 기다려, 바로 갈 테니까!”

그는 전화를 끊자마자 입주자 전용 후문으로 달려 나갔다. 좀 더 약은 사람이었다면,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 어디 부모에게 뒈져보라고 공권력 압박을 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박성준은 그러기엔 단순 무대포인 성격이었다.

“하, 씨팔. 세상이 진짜 말세구나. 이제 하다 하다 급식 새끼가 사기를 치고. 내가 일주일 동안 맘고생 한 거 생각하면 그냥 확….

성준은 후문으로 빠져나가 곧바로 아파트 사이 지름길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가능하다면 그 자리에서 4백만 원을 되돌려 받는 게 그로서도 마음이 편하긴 했다. 어차피 경찰서 신고든 고소든 궁극적인 목적은 돈을 되찾는 게 아니겠는가.

“내 피 같은 4백만 원… 헉, 헉….”

어찌나 마음이 급했는지 예서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채였다.

***

빗줄기가 거세어졌다. 시간은 9시가 다 되어 있었다. 한 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한주혁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선배. 혹시 못 내려오세요?]

메시지를 여러 번 썼다가 지우길 반복했다. 혹시나 놓칠까 싶어 창가 너머 출구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지만, 한주혁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어둡고 비까지 내린대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예서는 한숨을 푹 내쉬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다시 정색하길 반복했다. 어떻게 된 건지 박성준에게 슬쩍 연락을 해 보고 싶었지만 그의 번호가 없었다.

가게가 10시에 닫으니까 그때까지만 기다려보자. 시간을 허투루 쓸 순 없으니까 영어 강의라도 들으면서.

노트북을 꺼내 소설을 좀 끄적이고 싶었지만 두 눈은 창가에 고정하고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대신 블루투스 이어폰을 꺼내 원서 채널에 맞춰두곤 다시 출구 쪽을 돌아보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자괴감이 조금씩 밀려왔다. 귓전에 흐르는 원서 TTS도 꿈결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정말 마지막이야. 이번 한 번만. 그 뒤로는 정말로….

“저, 손님. 5분 뒤 폐점해야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그때 카운터 뒤에 있던 카페 주인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오늘은 내부 사정으로 매장을 한 시간 일찍 닫아야 하거든요. 정말 죄송합니다.”

예서가 황망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손님들도 제각기 옷이며 가방을 챙겨 일어나고 있었다.

“아… 네. 지금 나갈게요.”

예서는 밖으로 나가 카페 차양 아래 섰다. 비가 꽤 많이 내리고 있었지만 우산이 없었다. 집에 갈 거라면 전철역까지 눈 딱 감고 달리면 되지만, 문제는 이대로 집에 갈 생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섣불리 장소를 옮길 수도 없었다. 다른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한주혁에게 문자를 보낼까 했지만 결국 그만두었다.

만에 하나 처음부터 만날 생각이 없었다면 어쩔 것인가. 성준 선배에게 전달을 받았는데도 무시하고 그대로 있는 거라면.

만약 그렇다면 그 여자랑 함께 있어서일까? 혹은 그 여자가 가지 말라고 막아서? 더 이상 그녀와 얼굴 보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싫어서?

하긴, 이미 그 여자와 사귀기로 했다면 만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부질없다 생각했겠지. 그럼 최소한, 만나지 않을 테니 기다리지 말라는 문자라도 보내줘야 하지 않나? 대체 이게 무슨….

예서는 저도 모르게 차양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다리가 아파서 잠깐만 앉아 있을 생각이었다.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나고서야 저녁을 건너뛴 허기가 절감되었다. 점심도 대충 컵라면으로 때웠고, 과외 중 과일 몇 조각을 먹은 게 마지막이었다.

시간은 9시 30분이 다 되어 있었다. 비는 여전히 잦아들 기미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려 하자 현기증으로 머리가 핑 돌았다.

다시 주저앉는데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놀랍게도 한주혁이었다. 두 시간이 지나고서 연락을 해오다니. 괘씸해서 받고 싶지 않았지만 손가락은 저절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너 지금 어디야.

“네…?”

조금 숨찬 목소리였다. 이상했다. 한주혁의 목소리가 휴대폰이 아닌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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