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박성준은 강의실 복도를 지나다 후문 주차장 쪽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걸 보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 누나가 이 시간엔 왜 여기…. 저건 누구야?”
어어? 그의 눈이 좀 더 커졌다.
“엥, 주혁이 아냐? 왜 누나랑 같이…. 홈페이지에 또 문제 생겼나?”
박성준의 커다래진 눈이 이번에는 남녀 뒤의 차체로 향했다.
“매형 차잖아? 또 출장 갔나 보네. 박연지가 맘대로 끌고 다니는 거 보니.”
두 사람을 태운 차는 금세 학교 부지 밖으로 사라졌다. 성준은 무슨 일인가 싶어 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만 갈 뿐 응답은 없었다.
누나에게 전화할 마음은 없었다. 가뜩이나 정신없고 산만한 성격이라 운전대를 잡고 있을 땐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에휴, 박연지 진짜…. 그놈의 온라인 쇼핑몰은 잘 돌아가는 건지. 제발 좀 진득하게 했으면 좋겠는데.”
박성준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휴대폰을 재킷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사촌이란 죄로 주혁이가 고생이 참 많다 싶었다.
***
차가 대로변으로 들어서기 전, 주혁은 안전벨트를 풀었다.
“박 대표. 미안한데 여기서 내릴게.”
“뭐? 파티 같이 가겠다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러기야?”
“어차피 가는 방향이었잖아. 에스코트 필요하면 지금이라도 성준이를 부르던가. 아직 학교에 있을걸?”
그는 가차 없이 차 문을 열었다. 박연지가 기겁해서 재빨리 차를 갓길에 대고 세웠다.
“아, 진짜! 너 뭐야, 재미없게. 홈페이지도 만들어주고 보안 뚫릴 뻔한 것도 커버해줘서 보답하려고 밥 사준대도 싫다, 돈이나 선물도 안 받겠다, 그래서 호텔 파티에서 누구 소개나 시켜주려 했더니.”
“박 대표가 답례할 방법이 없진 않아.”
“그래? 뭔데? 근데 호칭은 갑자기 왜 그래? 박 대표라니. 그냥 누나라고 불러.”
“싫은데. 요즘 누나니 오빠니, 타인끼리 그런 호칭이 이상하게 불쾌하더라고.”
“뭐? 난 진짜 네 누나잖아. 사촌 누나. 너랑 내가 사촌인 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
“아는 사람이 누가 있어.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지.”
주혁은 사뿐히 차에서 내려섰다.
“답례 말인데, 앞으로 한 일주일 정도 매일 데리러 와주면 고맙겠어. 아까처럼 요란하게 아는 척도 해 주고.”
“그건 상관없지만 이 차 내일까지만 쓸 수 있는데? 우리 자기, 두바이 출장 갔다 모레 오거든.”
“…뭘 타고 오든 상관없어.”
그는 차 문을 닫기 직전 한마디 덧붙였다.
“박 대표만 와주면 돼. 누가 물어보면 사촌이라 하진 말고.”
주혁은 차 문을 닫고 공영주차장을 향해 돌아섰다. 왜인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요 며칠 그를 집요하게 괴롭히던 편두통도 한층 가라앉아 있었다.
***
정체 모를 미인은 그 후로도 매일 한주혁을 배웅나왔다. 처음과는 다른 SUV였지만 여전히 화려하고 눈에 띄는 차와 외양이었다.
육감적인 몸매를 강조한 크롭 상의와 품이 넉넉한 재킷, 허벅지를 다 드러낸 레더 스커트, 그 아래 길고 늘씬한 다리 선을 부각시키는 부츠까지. 몸에 두른 것마다 값비싼 명품이었고 무척 잘 어울려 허세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조금 과할 정도로 노출이 있기는 했지만 그 또한 이국적인 분위기에 어우러져 자연스러워 보였다. 여자는 부유함과 당당함, 햇살처럼 환한 자신감이 명품보다 더 도드라지는 사람이었다.
“야. 주혁 선배 진짜 연애하나 봐. 강의 끝날 때마다 따박따박 시간 맞춰 오는데 저 정도면 사귀는 거 맞지?”
“연상은 확실해 보이는데 뭐 하는 사람일까? 동환이가 너무 궁금해서 물어봤는데도 확실하게 말을 안 하더래. 글쎄, 나중에 알게 될 거야. 뭐 이런 식?”
“성준 선배는 뭔가 아는 눈치더라. 제일 친하니까 알 것 같아서 아까 찔러봤더니 하아아- 한숨만 푹 쉬면서 말을 아끼더라고. 계속 캐물었더니 아예 입을 꾹 다물고 자리를 피해 버리더라.”
채린과 새은, 미주는 틈만 나면 한주혁과 갑자기 나타난 묘령의 여자를 화제에 올랐다. 비단 그들 뿐 아니라 경영학과 학생들, 상경대, 더 나아가 학교 전체가 그런 것 같았다.
예서는 일찍 귀가해 약국 일을 도와야 한다는 핑계로 마지막 강의가 파하자마자 바로 교정을 벗어났다. 그날따라 더 머리가 아팠다. 보지 않으려 해도 볼 수밖에 없어서 일찌감치 피하고 싶었다. 여자는 이제 차를 주차장에 세워두고 아예 경영관 건물까지 한주혁을 찾아오고 있었다.
미친 거 아냐? 연애를 하고 싶으면 학교 밖에서 할 것이지. 꼭 그렇게 티를 내야 되나?
이내 어이없는 비난이란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따지면 CC는 어떻게 학교 안에서 만나라고. 그저 강의 끝날 시간에 데리러 와서 부리나케 학교 밖으로 나가는 게 다인데.
한편으론 그럴 리 없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사귀는 거 아닐 거야.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는 몰라도, 절대 남녀 사이는 아닐 거라고.
한주혁이 분명히 그랬잖아. 자기는 누구와도 연애할 생각이 없다고. 감정 소모하고 싶지 않고 휘둘리기도 싫다고.
속이 울렁거리다 못해 뒤집힐 것 같았다. 그녀와 맞닿았던 한주혁의 오만한 눈빛이 떠오를 때마다 더 그랬다. 그래서 더 웃고 떠들고 명랑한 척, 즐거운 척 객기를 부렸다. 최인하와도 일부러 더 붙어 다녔다.
금요일 오후, 모처럼 동기들과 강남역 번화가 맛집에서 밥을 먹고 차까지 마시는 동안에도 마음 한편은 무겁고 쓰라렸다.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스스로가 겉으로만 멀쩡해 보이고 속으로는 썩다 못해 곪아 버린 과일 같았다.
어서 시간이 흘러 학기가 끝나기만을 바랐다. 해가 바뀌고 겨울을 나면 그때는 이 너절하고 초라한 마음도 사라져 있지 않을까. 다시 한주혁을 마주해도 아무렇지 않게….
“예서야. 저기, 저 건물 있잖아? 가우디 건축물처럼 생긴 거.”
최인하의 말에 예서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채린과 새은, 미주와 전철역 앞에서 헤어지고 최인하와 단둘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할 때였다.
번화가와 조금 떨어진 아파트 단지를 지나는데 건너편에 흰색 고층 건물이 보였다. 독특하고 고급스러운 외관이, 평범한 사무실 빌딩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과외 학생의 집이 근처라 가끔 보긴 했지만 별 관심을 두진 않았었다.
“요즘 여기저기 생기는 주거용 하이엔드 오피스텔인데 말이야, 지난주 일요일에 볼일이 있어서 여기 지나갔다가 주혁이를 봤어. 그 여자랑 같이 나오더라.”
최인하는 좀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었다. 그는 평소 남의 이야기나 가십에 관심이 없었다. 이 얘기도 예서와 단둘이 있어서 하는 말일 터였다.
“아는 척하려다가 신호등 바뀔 때 그냥 돌아서 버렸어. 왠지 남의 사생활 엿본 것 같아서.”
“아… 그랬구나.”
예서는 평정을 가장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던 것도 잠시, 이어지는 최인하의 말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둘이 정말 사귀는 거 맞나 봐. 그 여자는 저기 사는 모양이던데, 꽤 늦은 시간에 집까지 오가는 거 보면….”
“…….”
“아, 이 얘긴 듣고 흘려! 너 입 무거우니까 당연히 그럴 거라 믿지만.”
“응.”
예서는 동요를 감추려고 아랫입술에 힘을 주었다.
“근데 그 여자가 저기 사는 건 어떻게 알았어?”
“입주자용 출입 카드를 손에 쥐고 있더라고. 성준이 자취방도 여긴데 재작년이던가…. 술자리에서 데려다줄 때 본 적 있어. 지금도 여기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서는 아아, 수긍하는 척 고개를 떨궜다. 지하철로 향하는 내내 심장이 무겁게 뛰었다. 결국 새빨간 거짓말이었나? 아니면 이랬다 저랬다가 어떤 여자를 택할지 최종 결정을 한 건가.
-좋아하지만 사귈 순 없다는… 그 쓰레기 같은 소리도 취소하고 사과하고요.
-그건 취소 못 해. 사과도 못 하고. 그게 내가 느끼는 감정 그대로니까.
다행히 최인하와 승차하는 방향이 달랐다. 예서는 홀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망연자실하다가 집에 도착해 다시 울어 버렸다. 그날 밤의 상심은 훨씬 더 근거 있는 절망이었다.
***
최인하의 원대한 계획을 알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이동환과 최인하는 마침 경영관과 공학관 사이, 호젓한 정자에 앉아 있었고 주혁은 정자와 연결된 다리를 건너던 중이었다.
“그럼 12월 10일이 디데이인 거예요? 앞으로 한 달하고 며칠이나 더 남았는데 왜 지금 고백하지 않고…. 아, 혹시 그날이 생일이에요?”
엿들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반드시 들어야 할 얘기임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정자 뒤에 멈춰 섰다. 가을 이파리가 빽빽해 몸을 숨기고 말고 할 필요도 없었다.
“그건 아닌데 그때 파이널 과제나 기말고사가 다 끝나잖아. 나도 그렇지만 그 친구도 그래서….”
“아, 진짜 궁금해 미치겠네! 선배, 그럼 우리 학교인지 다른 학교 학생인지만 말해 주면 안 돼요? 절대 말 안 할게요.”
“나중에. 그래야 고백했다 차이면 조용히 묻지.”
최인하가 하하, 특유의 넉살을 떨었다. 하지만 고백하겠다는 마음 자체는 가볍지 않았는지,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 진짜 궁금하네. 예서는 집안끼리 잘 알아서 오빠 동생처럼 지냈다니까 예서는 아니겠고, 채린이도 남친 있고 그럼 새은이나 미주….”
“야, 억측은 그만. 나중에 때 되면 알려줄게. 그만 일어나자.”
두 사람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경영관으로 향했다. 주혁의 두 눈이 두 남자의 뒷모습을 쫓았다. 정확히는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