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들었어요. 지난주 I 쇼핑몰 루프탑 아래에서.”
“…….”
“그 여자 누구예요? 선배랑 무슨 관계예요?”
예서는 혀를 깨물고 싶은 얼굴로 제 질문을 정정했다.
“아뇨. 말하지 마세요. 선배가 누구랑 뭘 하든지 상관없어요. 선배 사생활이니까 제가 알 바도 아니고요.”
새빨간 거짓말이 줄줄 튀어나왔다. 사실은 그가 정말로 그날 호텔에 갔는지, 그 예쁘고 날씬한 여자랑 밤새 시간을 같이 보냈는지, 두 사람이 정확히 무슨 사이인지 묻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다음날 시간 맞춰 로즈몬드 호텔에 가서 죽치고 앉아 있었다는 사실은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한주혁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
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네, 그래요! 그렇다고요. 그러니까 이 시간 이후로는 저한테 신경 꺼 주세요. 내가 인하 오빠랑 친하게 지내든 사귀든 상관 말고.”
“상관한 적 없어.”
한주혁은 낮게 읊조렸다. 잔뜩 열 오른 그녀와는 달리 너무도 차분했다. 누군가 멀리서 봤더라면 예서가 공연한 시비를 걸고 따지는 광경이었을 것이다.
“애당초 내가 뭐라 한 적이 있었나? 그저 네가 창 너머로 보이길래 봤을 뿐이야. 어떤 눈빛이었는지 그것까지 제어할 의무는 없었고.”
“다음에는 쳐다보지도 마세요.”
예서는 으름장을 놓듯 일갈했다.
“보지 말라고요.”
정적이 흘렀다. 팽팽한 긴장감에 심장 박동이 북소리처럼 웅웅거렸다.
“그래. 그럴게.”
“좋아하지만 사귈 순 없다는… 그 쓰레기 같은 소리도 취소하고 사과하고요.”
날 좋아한다고? 거짓말! 사기꾼!
악에 받치고 가슴이 꽉 막히며 다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억하심정에 그의 멱살을 잡고 성이 찰 때까지 흔들고 싶었다. 예서는 뜨뜻해진 눈가를 간신히 눌러 참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건 취소 못 해. 사과도 못 하고.”
한주혁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게 내가 느끼는 감정 그대로니까.”
미친… 정말 제정신일까?
예서의 입술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가 서늘한 얼굴로 한 발짝 다가설 때였다. 문이 쿵, 열리는 소리에 이어 인기척이 들렸다. 정기 순찰을 도는 경비 직원이었다.
“어, 누가 있었네? 학생들, 이제 내려가야 돼. 여기 문 잠글 거야.”
“아… 네. 지금 나갈게요.”
예서는 경비 직원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황급히 계단으로 향했다. 경황이 없어서 한주혁은 신경도 쓰지 못했다.
도서관 화장실에 들어와 찬물 세수를 하고 나서야 조금 진정이 되었다. 예서는 격앙된 감정으로 홧홧하던 뺨이 식고 나서야 열람실 자리로 돌아갔다. 채린과 최인하가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속삭였다.
“야, 너 어딨었어? 계속 문자 했는데 안 받고.”
“뭐야. 나랑 바람 쐬고 또 혼자 어디 간 거야.”
“아, 미안…. 폰을 두고 갔어. 머리 식힐 겸 잡지 좀 본다는 게 너무 오래 봤네.”
예서는 억지로 웃으며 둘러댔다. 다시 교재와 강의 노트로 신경을 돌렸지만 제대로 집중할 수 없어 힘이 들었다. 결국, 두통이 심하다는 핑계로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예서야! 같이 가- 잠깐만!”
최인하가 전철역으로 곧 뒤따라왔을 땐 차라리 안도감마저 들었다. 누군가와 얘기라도 나누지 않으면 눈물이 왈칵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미치기 직전이었다.
***
돌기 직전이었다.
주혁은 학교 근처 공영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앉아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지끈거리는 두통의 파도에 전신이 통째로 잠겨 드는 것 같았다.
경비 직원이 오지 않았다면 민예서를 제 쪽으로 끌어당겨, 제 입술로 그 입을 막아 버렸을 것이다. 촉촉하게 젖은 눈과 붉게 달아오른 뺨, 움찔대는 목울대까지 민예서는 미치도록 예뻤다. 늘 차분하던 단정한 모습만큼, 악에 받쳐 감정이 잔뜩 격앙된 얼굴 역시도.
-그 여자 누구예요? 선배랑 무슨 관계예요?
박연지를 일컫는 목소리와 책망하듯 번뜩이는 눈빛에 떠오른 감정은 낯설지 않았다.
-아뇨. 말하지 마세요. 선배가 누구랑 뭘 하든지 상관없어요. 선배 사생활이니까 제가 알 바도 아니고요.
민예서가 최인하와 함께 있을 때마다, 그 둘의 모습이 안구를 파고들 때마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던 그 자신의 감정이었다. 민예서의 질투 위로 제 너절했던 눈빛이 오롯이 겹쳐졌다.
이 악물고 두통을 견디는 입매가 조소로 비틀리고 있었다.
***
며칠이 지났다. 10월 중순, 시험이 하나씩 갈무리되며 교정 내 긴장도 한껏 누그러지는 나날이었다. 무르익은 가을 하늘과 귓가를 살랑대는 바람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기분이 좋지 않아도 그런 척, 일부러 더 크게 웃고 밝게 미소 지었다. 한주혁이 주위에 있을 때는 더 그랬다. 최인하와도 보란 듯이 즐겁게 얘기하며, 재밌어서 미치겠다는 듯 과장된 몸짓과 박장대소를 아끼지 않았다.
옥상정원에서의 독대 이후로는 한주혁을 정면으로 보지 않았다. 멀리서 걸어오는 것만 봐도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그래서 그가 그녀를 주시하고 있는지, 혹은 제 입으로 다짐한 것처럼 그쪽에서도 자신을 외면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외면하는 척하면서 여전히 의식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그런 것처럼.
어찌 됐든, 최인하와 가깝게 지내는 것 자체가 그에게 여전히 거슬리길 바랐다. 보기도 싫고 듣기도 싫고, 심기가 언짢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최인하를 이용하는 것 같아서 미안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최인하와의 관계는 애당초 한주혁과 아무 상관도 없었다. 한주혁이 있거나 말거나, 최인하는 늘 친오빠처럼 허물없었고 그 사실은 그의 소개팅에 대해 논의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인하 선배, 결국 소개팅 안 하기로 한 거예요? 에이, 사람 인연 모르는 건데 일단 만나는 보지 그랬어요.”
다 같이 교정을 나란히 걷던 중, 채린의 핀잔에 이어 동환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니까요. 누가 소개시켜 준다 할 때 냉큼 해야지. 와, 현대무용 전공이면 딱 내 이상형일 것 같은데 내가 대신 나갔으면 좋겠다!”
최인하는 피식 웃으며 뻐근한지 목을 뒤로 젖혔다.
“그냥 좀 쉬고 싶어서. 연애도 일하고 똑같아. 잠깐 멈추고 혼자만의 재충전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어. 뭣보다 요즘은 주위에서 자연스럽게 만나는….”
“어? 저거 뭐야? 연예인인가? 누구 왔나 봐!”
그 순간 동환이 후문 주차장 쪽을 가리켜 보였다. 학생들이 무리 지어 어딘가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우와, 저번에 우리 학교 배경으로 찍는다던 드라마 촬영, 그건가? 근데 내년 아니었어?”
“아무튼 가 보자! 예서야, 빨리 와!”
새은과 채린이 걸음을 서두르며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예서도 호기심에 순순히 따라갔지만 인파 뒤에 서는 순간, 얼굴이 빠르게 경직되었다.
한주혁이 은색 차체 앞에 어떤 여자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어디서도 눈에 띌 만큼 화려한 외모의 여자는 낯이 익었다. 쇼핑몰 루프탑에서 한주혁과 스스럼없이 포옹하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며 호텔에서의 만남을 기약했던 그 사람이었다.
“와, 엄청나네. 혹시 외국인인가? 주혁 선배 여친인 거야?”
“저 차 F 카이엔 아니야? 엄청 멋있다!”
여자의 정체, 한주혁과의 관계에다 슈퍼카에 대한 호기심이 맞물려 학생들은 제각기 웅성거렸다. 여자는 루프탑에서처럼 한주혁에게 바짝 다가서서 웃고 있었다. 드라마 촬영은 아니었지만 드라마의 한 장면이나 화보처럼 멋들어진 한 컷이었다.
그 순간 한주혁이 고개를 돌렸다. 두 눈이 인파 사이를 꿰뚫고 예서의 것과 정면으로 맞닿았다.
시선을 거두고 제 갈 길 갔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충격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굳어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아주 질 나쁜 저주에 걸려든 것만 같았다.
한주혁이 고개를 돌리기까지 아주 긴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다. 눈 깜짝할 사이인데도 예서는 그의 눈에 떠오른 조소를 목격했다. 착각일 뿐이라 치부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분명히, 똑똑히 보고 말았다.
두 사람은 그들을 둘러싼 시선을 의식했는지 곧바로 차에 올랐다. 여자는 시동을 거는 동안에도 옆자리의 한주혁에게 뭐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뭔가 웃긴 말을 했는지, 담담하던 그가 엷게 웃었다.
“이야, 그림이네. 진짜 잘 어울리긴 하다. 진짜 사귀나?”
“저 정도면 사귀는 거 아닌가? 누군지 몰라도 학생은 아니고 금수저 같은데…. 한주혁 완전 부럽네!”
“난 저 여자가 부러운데? 내가 저런 차 한 대 있고 상대가 한주혁이면, 나라도 매일 등하교 기사해 주겠다!”
예서는 포르쉐가 사라진 후문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귓불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채 숨이 가빴다. 그녀를 일별하던 한주혁의 마지막 눈빛이 뇌리를 먹구름처럼 잠식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