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불행히도 등신 같은 행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예서는 다음날인 일요일, 저녁 8시부터 로즈몬드 호텔에 와 있었다.
가끔 스스로도 이해 못 할 미친 짓을 할 때가 있다. 돌아보면 수치심과 자괴감에 얼굴을 들 수 없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당첨 복권이나 드림 주식을 사는 것보다 먼저 나서서 수습하고 반드시 백지화시키리라 다짐하게 되는 그런 짓거리 말이다.
그녀는 제 발로 직접 걸어와 그런 상황을 자초하고 있었다. 스물한 해를 살아오는 동안, 엄마를 제외한 모든 주변인으로부터 늘 칭찬만 받아왔다.
또래보다 더 이성적이고 야무지며 사리 분별 잘하고 어른스럽다는 평만 들어왔지만, 지금은 감정에 휩싸인 나머지 누구보다 더 멍청하고 어리석은 돌발행동을 벌이고 있었다. 문제는 그걸 잘 알면서도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예서는 정문 입구가 가장 잘 보이는 로비 구석에 앉아서 회전문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한쪽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시간을 생산적으로 써보겠다고, 중간고사 필기 녹취록을 틀어놓은 것이다.
딱 9시 반까지만 기다려보는 거야.
하지만 9시 반이 가깝도록, 한주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차가 없으면 정문으로밖에 들어 올 루트가 없을 텐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8시 전부터 와 있던 건 아닐까? 아니면 그 여자의 차로 주차장에서 바로 올라갔거나, 사실은 차가 있었거나.
결국 10시 반이 넘도록 한주혁을 볼 수는 없었다. 예서는 이어폰을 빼고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로비에 있는 것도 눈치가 보였고 시간이 늦어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멍청이. 도대체 세 시간 가까이 뭘 한 거야. 이 바보야!
회전문을 밀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괜찮아. 그래도 노트 필기는 열심히 들었잖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 많이 외웠잖아….
애써 자조해도 비참한 마음은 누를 수가 없었다. 다시는 이런 헛짓거리 하지 말자고 다짐, 또 다짐하면서도 가슴 한편은 먹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분명히 이 호텔 어느 방에 있을 텐데. 그 여자랑 있을까? 밤새 둘만? ‘우리끼리 오붓하게’란 말은 역시 ‘단둘이’란 의미였을까.
정류장에서 보이는 5성급 호텔 외관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연휴 마지막 날인데도 빈방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 밝게 들뜬 불빛과 달리, 예서의 가슴은 한없이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
짝사랑만큼, 스스로가 그지없이 작고 하찮게 느껴지는 감정이 또 있을까. 그 외사랑이 첫사랑이기까지 하다면 더더욱.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고 깊이 빠져 버렸기 때문에, 경험으로 인한 면역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톡톡히 열병을 치르는 중이라고 믿었다. 홀로 힘든 이 시간도 결국은 다 지나갈 거라 마음을 추스르고자 애썼다.
하지만 한주혁의 시선과 맞닥뜨리는 순간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추석 연휴 이후, 학교에서 일부러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 잔뜩 의식하던 일주일이 흐른 뒤였다.
중간고사 기간이라 공강일 때는 채린, 새은, 미주 등과 도서관에 가서 과제며 시험 준비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날도 금요일 저녁때였지만 다들 귀가도 잊고 도서관이며 빈 강의실까지 빽빽하게 채울 때였다.
마침 최인하가 잠깐 바람 쐬자고 커피를 건넸다. 별생각 없이 도서관 건물 계단에 앉아 수다를 떨다, 전화가 걸려 온 최인하를 남겨두고 먼저 일어나려 할 때였다. 뒤통수로 누군가의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두 눈이 한주혁의 것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는 1층 복도로 난 창문 너머,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벌레 보듯 날이 선 눈빛에 등골이 서늘했다.
대체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걸까. 아니, 그보다 왜….
최인하는 아무것도 모르고 통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예서가 다시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한주혁은 심판자 같은 시선을 돌리고 멀어지기 시작했다. 순간 뒤통수가 홧홧해졌다. 정신이 들었을 땐 안으로 뛰어 들어가 한주혁을 뒤쫓고 있었다.
예서는 계단으로 오르던 그의 옷자락을 뒤에서 덥석 잡았다. 한주혁이 뒤돌아섰다. 평소처럼 초연한 얼굴이었지만 두 눈에는 희미한 동요가 떠올라 있었다.
“선배.”
헉, 헉, 예서는 달려오느라 가빠진 숨결 새로 내뱉었다.
“저랑 얘기 좀 해요.”
“…….”
“얘기 좀 하자고요. 단둘이.”
“그래. 그렇게 원한다면.”
한일자로 다문 입술 끝이 비웃듯 설핏 기울어졌다. 조소를 띤 눈동자가 제 옷자락을 움켜쥔 예서의 손으로 향했다.
“내 발로 갈 테니까 이건 그만 놔줄래?”
예서가 그의 티셔츠 자락을 뿌리치듯 확 놓아 버렸다. 가뜩이나 상기된 뺨이 수치심마저 더해 더 발갛게 물들었다.
“걱정 마. 그렇게 간절히 잡지 않아도 대화에 응해 줄 테니까.”
한주혁의 눈에 오만함이 떠올랐다.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태도에 예서의 손끝이 저릿했다.
생전 처음이었다. 누군가의 입을 주먹으로 냅다 쳐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 것은. 정우가 제 물건을 멋대로 손대고 엄마 뒤에 숨어 얄밉게 굴 때도 입을 때리고 싶은 적은 없었는데.
“그것참 황송하네요.”
예서는 심호흡을 깊이 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어느새 한주혁의 얼굴에는 한 점의 웃음기도 없었다. 안하무인처럼 상대를 은근히 내려다보는 기색도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
뒤통수를 뒤덮은 열기는 서늘한 공기 속에서도 좀처럼 걷히지 않았다. 시험 기간이라 중앙도서관 옥상 공원에는 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고즈넉한 화단 구석에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여기 그냥 서서 얘기해요.”
예서가 불퉁하게 말했다. 어딘가 자리 잡고 앉을 생각도,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선배, 저한테 대체 왜 그러는 건데요.”
한주혁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침묵만 지켰다. 다짜고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뻔뻔스럽기는. 꼭 불륜 커플 보듯 불쾌한 시선으로 계속 보고 있었으면서.
“저랑 인하 오빠, 도대체 왜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는지 묻는 거예요. 우리가 무슨 못 할 짓이라도 하는 것처럼.”
“우리…?”
내내 담담하던 한주혁의 눈매에 날이 섰다. 그러고는 짓씹듯 중얼거렸다.
“그 오빠란 호칭부터 좀 집어치우면 안 되나. 도무지 같잖아서 못 들어주겠는데.”
“뭐라고요…?”
예서의 숨이 다시 가빠졌다. 그를 올려다보는 두 눈 가득 불꽃이 튀어 올랐다.
“선배, 도대체 어느 쪽이에요? 저랑 인하 오빠, 둘 중 도대체 누굴 질투하는 건데요.”
“뭐?”
“혹시 인하 오빠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제가 걸리적거려서 싫은 건가요?”
그가 하, 실소를 터트렸다. 머리를 쓸어올리는 손길이 거칠었다.
“아니란 건 네가 더 잘 알겠지, 민예서. 나 그쪽 취향은 아냐.”
“그러니까, 나랑 사귈 생각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질투하는 것처럼 그러는지 묻고 있잖아요. 도대체 뭘 원하….”
“너 좋아해.”
그가 이를 갈며 내뱉었다.
“그래, 정정할게. 너 후배로만 생각한다는 거, 내 착각이었어. 나도 너 좋아해.”
예서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말을 잃었다. 뭐라고?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거지? 분명히 지금 선배가 날 좋아한다고….
“물론 그렇다고 너와 사귈 순 없어.”
“…….”
“하지만 널 좋아하는 건 사실이야. 그러니까 네가 최인하든 누구든, 특별히 가까이 지내는 게 싫은 거고.”
예서는 소리 없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한 충격이 완전히 가시기까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녀는 최대한 이성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아직도 그 소리군요. 좋아하지만 사귈 수는 없다는 주장.”
“…….”
“도대체 이유가 뭔데요? 이유라도 알려주세요.”
“전에 말했듯 그럴 만한 감정적 여유가 없어서야.”
기가 막혔다. 더는 상대하지 않고 돌아서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예서는 다시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 무슨 말인지 나는 정말 모르겠어요. 다들 좋아하면 그냥 만나고, 사귀고, 연애하고, 결혼도 하고 그러는 건데 도대체 왜….”
“예서야.”
“그냥 나랑 사귀어요, 선배.”
안 돼. 멈춰. 더는 하지 마, 민예서. 결국 상처 입는 건 너야. 다시 다칠 거라고.
머릿속의 경종을 무시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 바로 이런 게 감정적 여유가 없는 건가? 이렇게 이성의 말을 듣지 않고 감정에 휘둘려 어리석은 말을 자꾸만 지껄이는 게? 이래서 선배가 연애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거였던가 싶었다.
하지만 한 번 터진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봇물 터진 듯 흘러넘치는 감정도 그랬다.
“그냥 감정이 시키는 대로 해요. 다들 그렇게 살잖아요. 정말로 좋아한다면 왜… 어째서 그 감정을 억누르고, 무시해야 되죠?”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난 그럴 생각이 없어.”
예서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결국은….”
현기증이 밀려왔다 걷히며 의식이 다시금 명료해졌다.
“다시 그 결론이네요. 선배도, 나도, 아무도 사귀지 않는 거. 그게 선배가 바라는 거죠?”
말하다 보니 다시 기가 막혔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하지만 정작 나오는 건 웃음이 아니라 분노에 찬 포효였다.
“내가 왜 선배가 원하는 대로 해 줘야 되죠? 선배는 다른 여자와 바에서도 만나고 호텔도 들락거리는데!”
한주혁의 한쪽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 말에는 확실히 놀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