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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22)화 (23/124)

<22화>

코끝이 시큰거리며 눈가가 뜨거웠다. 눈빛으로 누군가를 죽이는 게 가능하다면 한주혁이 쓰러질 때까지 계속 노려보고 싶었지만,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선배 감정은 선배 혼자 알아서 잘 갈무리하세요. 저뿐 아니라 누구도 납득할 수 없을 그런 마음 따윈….”

예서는 돌아섰다. 더는 한주혁을 마주 보고 싶지 않았다.

“예서야.”

그의 부름이 등 뒤에서 넘어왔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골목이 끝나고 번잡한 도로가 보였다. 금요일 밤이라 좁은 길에도 인파가 가득했다.

예서는 사람들 틈을 헤치고 황망히 걸었다. 손바닥 안처럼 익숙한 길이라 시야가 멍한데도 다리가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집에 와 있었다.

불 꺼진 거실은 고적했다. 꼭 닫힌 안방 문 너머로 이경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괜찮다니까. 이제 11시 좀 넘었는데, 뭘. 엄마는 한 시간 더 자느니 우리 아들이랑 통화 더 하는 게 훨씬 좋아. 우리 정우, 곧 추석인데 오지도 못하고 어쩌니. 마음 같아선 약국 문 닫고 가보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고…. 엄마가 맘이 너무 안 좋다.

아무리 늦어도 10시에는 잠자리에 드는 모친이었다. 9시만 넘으면 몸에 기력이 다 빠져나간다며 시름시름 졸기 일쑤였지만, 지금 들려오는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활기에 차 있었다.

우리 딸. 우리 예서.

예서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을 뇌리에서 짓누르고 욕실로 들어섰다. 씻는 중에도 자꾸만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입술을 꾹 감쳐물고 재빨리 샤워를 끝냈다.

방에 들어오는 순간 문자음이 울렸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방을 열고 휴대폰을 꺼내는 손끝이 저렸다. 선배일지도 몰랐다.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어쩌면….

[예서야. 잘 들어갔지? 금요일인데 좀 더 놀다 올 걸 아쉽네. 하하. 그래서 말인데 주말에 뭐 해? 영화 보러 갈까? 너 좋아하는 미술관이나 다른 데도 좋고.]

최인하가 평소 즐겨 쓰는 이모티콘이 문장 끝마다 박혀 있었다. 예서는 스르르 침대에 주저앉았다. 채 말리지 않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톡 떨어졌다. 눈물방울도 그 옆에 떨어져 액정 화면 한가운데가 부옇게 흐려졌다.

[잘 들어왔어, 오빠.]

참으려고 했지만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근데 주말에는 좀 바빠서 외출이 어려울 것 같아. 엄마가 내일 오후 약사회 모임이 있어서 내가 수민 언니랑 둘이서 약국을 봐야 하거든. 일요일에는 외할머니가 오시고…. 미안해. 추석 지나고 만나.]

[아, 그렇구나. 그럼 월요일에 학교에서 보자. 수요일부터 연휴니까 그 전에 이틀은 더 볼 수 있겠네.]

[응. 그럼 잘 자!]

방긋 웃는 이모티콘까지 보내고 폰을 내려놓았다. 울음이 왈칵 터져 나왔다. 예서는 불을 끄지도 않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나는 누구와도 사귈 생각이 없어.

한주혁의 건조한 음색이 머릿속을 맴돌고 떠날 줄을 몰랐다.

-감정 소모 자체가 피로해서. 타인과 감정적으로 얽히고 휘둘리는 것 자체가 싫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자든, 남자든, 그런 마음으로 연애 자체를 기피하는 사람은 실제로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조차 결국 누군가와 사귀고 가까워지게 된다. 지금까지 연애를 피해 왔던 명분이 무색해질 만큼, 놓치기 싫을 만큼 좋아하게 되는 사람을 만나면.

결국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거겠지.

신경은 쓰이지만 그 감정 소모를 견디면서까지 제 여자친구로 만들고 싶고, 가지고 싶을 만큼은 아니라는 거였다.

예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울었다. 혹시 방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갈까, 연인처럼 아들과 애틋하게 안부를 나누는 엄마의 통화에 방해가 될까 봐 잔뜩 숨을 죽였다.

어쩌면 우는 걸 들켜도 아무 상관 없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상관없을 것이다. 그녀는 늘 혼자 알아서 앞가림 잘하고 야무져서 손이 가지 않는 아이니까. 민예서는 늘 그랬다.

손이 가지 않는 만큼, 정도 가지 않는 자식. 애틋하지 않은 딸.

그리고 놓치기 싫을 만큼, 깊이 끌리는 감정은 없는 후배.

***

9월 말, 일교차가 큰 환절기도 지나고 가을이 완연한 날이었다. 닷새간의 명절 연휴도 눈 깜짝할 새 지나가 어느덧 토요일이 되어 있었다. 추석 내내 모친을 도와 약국에 머무르는 동안 예서의 정신은 반쯤 나가 있었다.

“아휴, 진짜 안 되겠다. 너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좀 걸어! 차라리 집에 가서 누워 있든가.”

연휴 막바지에 출근한 조수민이 보다 못해 그녀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괜찮아요. 어디 아픈 것도 아니고….”

“예서 너 솔직히 말해 봐. 약사님에겐 입도 뻥긋 안 할 테니까. 너 몰래 연애하다 깨졌니? 응?”

“아니에요, 그런 거.”

피식, 힘없는 실소만 나왔다. 예서는 수민의 호기심을 피하기 위해 결국 약국에서 나왔다. 집에 가서 글을 쓰려다 채린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단 사실이 떠올랐다. 잠깐 머리도 식힐 겸 대형쇼핑센터에 가서 선물이나 미리 사둘까 싶었다.

인근 지하철역과 연결된 쇼핑몰에는 채린이 애용하는 중저가 샵이 있었다. 제일 저렴한 시즌오프 세일 때만 주로 들렀지만 생일선물은 새은이, 미주와 나눠서 부담하기로 했으니 적당한 가격대의 신상품도 괜찮을 것 같았다.

혼자 매장을 둘러보고 있자니 친구들과 같이 올 걸, 후회가 되었다. 예쁜 아이템이 너무 많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예서는 일단 사진만 찍어두곤 매장과 연결된 야외 테라스로 나갔다. 바로 위층에는 연예인이 운영하는 루프탑 바가 있어서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야, 한주혁. 너는 진짜….”

그때 누군가의 간드러진 콧소리가 들렸다. 예서는 구석 벤치에 앉아 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난간 너머 루프탑 테이블에 외국인과 한국인이 절반씩 섞인 무리가 앉아 있었다. 그중 몇 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음악에 맞춰 가볍게 몸을 흔들거나 맥주를 병째 들이키는 등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그리고 한주혁이 처음 보는 여성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예서 쪽으로는 등을 돌리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한눈에 봐도 여자와 꽤 친밀한 분위기였다.

“좀 더 있다가 가- 뭐가 그렇게 바쁜데? 응?”

여자는 아무리 많아도 20대 중반이나 후반으로 보였다. 위로 시원하게 틀어 올린 머리, 니트 원피스 아래 드러난 몸매는 늘씬하고 육감적이었다. 간드러진 콧소리와 어눌한 발음, 이국적인 분위기가 어쩐지 교포 같았다.

“미안. 늦었어.”

“알았어. 어쩔 수 없지. 대신 내일 밤 9시까지 로즈몬드로 꼭 와야 돼? 객실 예약 다 해놨으니깐 오붓하게 우리끼리 놀자. 알았지? 연휴 마지막 날이잖아.”

여자는 그를 포옹하며 뺨에 입술을 쪽 맞췄다. 한주혁은 그녀를 밀어내며 몸을 떼어 냈다. 하지만 정색하며 싫어하는 기색은 없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그랬다.

한주혁은 테이블에 기대선 무리에게 무심하게 고개를 까딱여 보이곤 출구로 향했다. 그를 끌어안고 아쉬운 작별을 고했던 여자도 인파에 섞여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예서는 벤치에 돌처럼 앉아 있었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루프탑과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정문의 서빙 직원이 지금 만석인데 혹시 일행이 있는지 묻는 순간, 저도 모르게 다시 돌아서고 말았다.

“아, 아니에요. 잘못 왔어요! 죄송합니다.”

한주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입구 옆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것 같았다. 그와 스스럼없이 포옹했던 여자라도 다시 보고 싶었지만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예서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놀려 쇼핑몰을 나왔다. 만남의 광장, 역으로 이어지는 아케이드와 대로변을 황망히 둘러보다 번쩍 정신이 들었다.

민예서,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저도 모르게 한주혁을 찾고 있는 제 모습에 깜짝 놀랐다. 만에 하나 그를 발견한다 해도 뭘 어쩌겠다고.

붙잡아서 그 여자는 대체 누군지, 무슨 사이길래 스스럼없이 포옹하고 뺨에 키스까지 하는지, 단순한 인사일 뿐이었는지, 하지만 그렇다기엔 너무 가깝고 허물없는 분위기였다고 따지기라도 할 건지.

-내일 밤 9시까지 로즈몬드로 꼭 와야 돼? 객실 예약 다 해놨으니깐 오붓하게 우리끼리 놀자. 알았지? 연휴 마지막 날이잖아.

로즈몬드는 최근 오픈한 영국계 호텔이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한강 변에 자리 잡고 있다. 객실에서 오붓하게 우리끼리 놀자는 마지막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야. 쟤 존나 이쁘다. 몸매도 휘유- 근데 왜 저렇게 멍하니 있냐?”

“그러게. 가서 말 걸어볼까?”

“야, 하지 마. 딱 봐도 남친 기다리는 눈치네, 뭐.”

한 무리의 남자들이 스쳐 가며 지껄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예서는 광장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다가 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모친이었다.

-너 어딨어? 몸이 안 좋아 보여서 수민 씨가 집에 보냈다는데 집이야?

“아… 아녜요. 채린이 선물 사려고 Y역 쇼핑몰에 나왔어요.”

-그래? 마침 잘됐다. 안 그래도 정우 겨울옷 좀 사서 보내려고 했는데, 거기 정우가 좋아하는 브랜드 있잖아? 거기 가서 패딩이나 코트 같은 거 사진 좀 쫙 찍어서 보낼래?

예서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 그럴 정신 아니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다시 쇼핑몰로 돌아가 남성복 매장으로 향하는 중에도 한주혁의 뒷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대체 한주혁은 어떤 남자인지, 실체가 뭔지, 알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혹시 학교 안에서의 그는 진짜가 아닌 걸까? 알고 보면, 지극히 자유분방하고 오픈된 연애를 즐기는 주의였던 건가? 그래서 후배인 자신은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아예 없는 게 아니면서도, 절대 사귈 수 없는 사이라고 했나? 평소처럼 가볍게 놀고 헤어지긴 어려워서?

온갖 상념들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모친에게 옷 사진을 찍어 보내는 중에도 자꾸만 그와의 대화창을 띄우고 싶어 간신히 참았다.

한심해, 민예서. 두 번이나 차였는데도 이렇게 미련을 떨다니.

자괴감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런 장면, 그런 대화를 직접 보고 들었는데도 그를 기어이 떨쳐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등신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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