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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21)화 (22/124)

<21화>

두 사람은 가족 근황과 앞으로의 진로, 최근 인기 있는 영화와 콘텐츠 등 좀 더 수다를 떨다가 10시가 넘어서야 헤어졌다. 최인하가 오랜만에 어머니도 뵐 겸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고집했지만, 예서는 그를 기어이 지하철역까지 이끌었다.

“다음에 와. 집도 먼데 너무 늦었잖아.”

“멀긴. 한강만 건너면 바로인데.”

최인하는 결국 아쉬운 얼굴로 역사 계단으로 내려갔다. 예서는 시원섭섭,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최인하와 함께 있으면 즐겁고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너무 활달한 성격 탓에 기가 빨려 금방 녹초가 되곤 했다. 인파로 북적이는 놀이동산 한가운데 머무는 느낌이랄까.

예서는 삼거리에서 보광로 골목으로 꺾어 들었다. 버스를 타면 두 정거장 거리였지만 배가 불러 잠깐 걷고 싶었다. 그녀가 골목 초입의 지름길로 막 접어들 때였다.

“민예서.”

등 뒤에서 저음이 들려왔다. 묵직하면서 냉기 어린 목소리는 귀에 낯설지 않았다.

“선배…?”

돌아보자 한주혁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테이크아웃 컵이 들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최인하와 그녀가 함께 앉아 있었던 카페 컵이었다. 선배도 거기 있었던 건가?

“선배도 M 카페에 있으셨어요?”

“최인하랑 많이 친한가 봐.”

그는 대답 대신 불쑥 물었다.

“오늘처럼 단둘이 자주 만나?”

“네…?”

질문의 진의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한주혁이 취조자처럼 보였다. 가로등 아래 커다란 그림자를 이룬 건장한 체구, 한층 더 어둡게 빛나는 눈에서 까닭 모를 압박감이 느껴졌다.

“둘이 사귀는 건 아니지?”

“그게… 왜 궁금한데요?”

“왜. 궁금하면 안 돼?”

예서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시비조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날이 선 음색이었다.

“네.”

예서가 침을 꼴깍 삼켰다. 문득 시야가 흐려졌다. 어두운 골목에 둘이 이렇게 대치하는 상황 자체가 현실 같지 않았다.

“선배가 그걸 왜 궁금해하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배가. 내 고백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후배 이상으로 생각한 적 없다는 한주혁이.

예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 쪽으로 느릿느릿 다가오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왜 궁금하겠어. 당연히….”

그가 컵을 휴지통에 버리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참다못한 예서가 입을 열었다.

“제가 선배에 대한 미련, 완전히 내려놨는지- 그게 궁금하신 건가요?”

“…….”

“그런 거라면 염려 마세요. 그때도 말했지만 어쩌다 불쑥 튀어나온 고백이었고… 이제 선배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지극히 건조하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한주혁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단순히 불빛에 반사되어 그렇게 보인 것일 수도 있었다.

“그건 내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니잖아.”

“…….”

“날 좋아한다고 했던 게 불과 두 달 전이었는데 그렇게 빨리 감정이 식었다고? 정말 좋아한 게 맞기는 해?”

“네…?”

“진심이었다면 그렇게 빨리 사그라질 수가 없잖아.”

“선배.”

예서는 눈을 크게 떴다. 귀를 의심할 만큼 한주혁의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그렇잖아. 날 정말 진심으로 좋아했다면 마음이 이렇게 빨리 다른 사람에게 갈 리가 있어?”

한주혁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차분한 음성과 괴리된 날 선 눈동자가 무서웠다.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았지만,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을 만큼 날카로운 뭔가가 있었다. 하지만 두려움보다는 억울한 마음이 더 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좋은 후배로만 생각한다고 거절한 건 선배잖아요.”

“다른 새끼에게 바로 갈아타라고는 안 했어.”

예서가 한순간 숨을 멈췄다. 한주혁이 거친 표현을 내뱉는 걸 처음 본 놀라움보다, 그 말이 내포한 의미가 더 충격적이었다. 최인하가 이성이 아닌 친오빠 같은 존재라는 사실도 지금은 논외였다.

“그럼… 그럼 선배는 제가 거절을 당하고도,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갖지 않기를… 가까이 지내지도 말고 사귀지도 않길 바랐던 건가요?”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말이 안 됐다. 설마 진심은 아닐 것이다. 만약 한주혁이 정말로 그러길 바랐다면, 그는 미친놈이다. 차마 입 밖으로 내보내진 못하겠지만 그게 사실 아닌가.

“그래.”

예서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섰다. 한주혁은 멀어진 거리만큼 다시 간격을 좁혀왔다.

“그게 내가 바라는 거였나 봐.”

“…….”

“방금 확실히 깨달았어. 네가 일깨워 준 덕분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건물 뒤 대로변은 차량과 인파로 북적거렸지만, 그들이 마주 선 뒤쪽 골목은 조용했다. 건물 너머로 흘러드는 소음이 이명처럼 희미했다.

“그건….”

예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를 집어삼킬 듯 내려다보는 한주혁의 시선,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침묵의 무게에 숨이 막혔다.

“결국 선배도 제가 신경 쓰이신다는 거잖아요. 그럼… 제 고백 다시 받아주실래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알 수 없었다. 미친놈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불쑥 나온 진심에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선배 이젠 안 좋아한다는 말, 거짓말이에요. 지금도 좋아해요.”

최인하와 마신 건 분명 커피였는데, 술이라도 거나하게 들이부은 것처럼 정신이 혼미했다. 동시에 씻은 듯 맑고 명료했다.

“알아.”

한주혁은 담담히 대꾸했다. 조금 전까지의 취조 느낌은 사라지고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안다고요?”

그는 묵묵히 그녀만 주시했다. 예서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 차분하게 오만한 분위기마저 좋았다.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뭐야?”

“선배랑 사귀고 싶어요.”

기다렸다는 듯 불쑥 튀어나왔다. 다른 대답이 있을까? 누군가에게 너를 좋아한다, 이성으로 잔뜩 의식하고 있다, 그런 고백을 했을 때의 바람은 오롯이 한 가지로 귀결된다.

“선배와 더 가까워지고 싶고, 더 알아가고 싶어요. 물론 제가 선배에게 많이 부족할 수는 있겠지만, 선배도….”

선배도 저에게 호감이 있잖아요. 제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걸 신경 쓸 만큼은. 이렇게 언짢은 얼굴로 여기까지 쫓아와 인하 오빠와 사귀냐고 캐묻고, 그 새 마음이 변했냐고 힐난하는 것 자체가 그 증거잖아요.

“예서야.”

숨이 차올라 뒷말을 미처 토해내지 못한 사이, 한주혁이 그녀를 불렀다. 그 순간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엄습해왔다. 그 부름만으로도 이 대화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본능이 먼저 감지한 것 같았다.

“나는 누구와도 사귈 생각이 없어.”

“…….”

“너뿐 아니라 다른 누구와도.”

“왜요?”

교제 자체를 할 생각이 없다니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CC는 원하지 않는다거나, 졸업 전까지는 공부와 취업 준비에만 집중하고 싶다거나.

“감정 소모 자체가 피로해서. 타인과 감정적으로 얽히고 휘둘리는 것 자체가 싫어.”

“…….”

“그래서 너도….”

한주혁이 머리를 쓸어올리며 깊은 한숨을 들이쉬었다. 대리석처럼 매끄럽게 다듬어진 이마에 균열이 일어났다.

“너도 누구와도 사귀지 않고 아무도 곁에 가까이 두지 않고… 그 전처럼 지내길 바랐어. 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지내는 것까진 욕심일 수 있겠지만.”

“뭐라고요…?”

믿을 수 없는 속내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물론, 설렘과 희망에 찬 느낌과는 완전히 달랐다.

“미친 새끼라 욕하겠지만 사실이 그래. 내 마음이 그런 걸 어쩌겠어.”

“잠깐… 잠깐만요.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다면….”

머릿속이 짙은 안개로 자욱했다. 예서는 그 혼란스러운 막을 하나씩 걷어내고 결론을 힘겹게 도출해냈다.

“그러니까 선배 말은… 내가 갖기는 싫지만 다른 사람 주기도 싫다- 이런 마음인 건가요?”

“…….”

“그렇다는 거죠?”

“싫다는 표현은 맞지 않아. 말했듯이 나는 처음부터 누구와도 교제할 마음이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다른 남자와 교제하는 것도 못 봐주겠다… 이거네요?”

예서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속엣말을 고스란히 밖으로 뱉어낸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미쳤어.”

“…….”

“선배, 정말 쓰레기네요.”

아랫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 와중에도 한 점의 동요도 없는 한주혁의 낯짝을 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몇 번을 때린다 해도 그는 지금처럼 초연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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