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20)화 (21/124)

<20화>

“아! 알았다.”

성준은 혼자만의 망상 끝에 손가락을 딱 튕겼다.

“네가 차인 건가? 아, 아냐. 그거랑은 좀 다른데. 분노의 방향이 예서가 아닌 다른 쪽으로 향하는 이 느낌적인 느낌은… 아! 알았어.”

그가 다시 손가락을 딱 튕겼다.

“질투. 네가 예서 보는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질 때는, 그러니까 갑자기 화가 난 것처럼 보일 때는 늘 그, 누구더라? 어, 최인하! 회계학과 최인하가 예서 옆으로 갈 때였어.”

우와, 이 미친 관찰력!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이런 거지. 너랑 예서가 CC였는데 헤어진 거야. 둘 다 미련을 못 버리고 서로 의식하고 있는데 갑자기 예서에게 접근하는 제3의 인물이 생긴 거지. 바로 최인하! 너는 이미 결별했는데도 최인하를 연적으로 간주한 거고. 하, 이 미쳐 버린 통찰력.”

그는 불끈 주먹 쥐고 스스로의 분석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실제로 두 사람이 CC도 아니었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다. 한주혁의 낯빛이 싸늘하게 변하는 걸 의식도 못하는 눈치였다.

“정신이 통째로 미친 것 같은데.”

한주혁은 랩탑을 소리 나게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갈 테니까 망상은 혼자 속으로만 해. 남 끌어들이지 말고.”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매정하게 돌아서는 모습에, 박성준은 억울한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야, 다 헛소리는 아니야. 그래, 뭐 너랑 예서 관계는 내 망상이라 해도 예서가 최인하랑 사귈 것 같은 분위기는 사실인데 뭘.”

“…….”

“알고 보니 집안끼리 가까워서 옛날부터 친했다더라. 어쩐지 그 낯가리는 민예서가 최인하한테만 오빠, 오빠, 한다 싶었지. …흐아암.”

그는 라운지를 나서는 주혁의 등에 대고 마지막 일침을 가했다.

“혹시 모르지, 공표만 안 했지 벌써 사귀고 있는지도. 아, 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피곤하냐. 난 좀 자야겠다….”

성준은 구석 소파로 기어가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별생각 없이 가볍게 던진 제 말이 상대에게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전혀 모른 채였다.

주혁은 등 돌리고 누운 사촌을 지그시 노려보다 라운지를 나섰다. 건물을 빠져나와 후문으로 향하기까지, 격앙된 감정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 점 동요도 없이 초연한 모습이었지만, 주먹을 틀어쥔 손등 위로 핏줄이 불거져 터질 것 같았다. 폭발 직전의 두 눈은 긴 속눈썹 아래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

어쩌다 보니 최인하와 단둘이 저녁을 먹게 되었다. 금요일 하굣길, 모처럼 다 같이 이태원에서 밥이나 먹자고 의기투합한 인원은 원래 다섯 명이었다. 하지만 둘은 갑자기 일이 생겨 다음을 기약했고, 그나마 남아 있던 새은도 막판에 불참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지? 우리 감자랑 호두 둘 다 탈 나서 병원 갔대! 집에 내일 내려가려고 했는데….”

“니네 집 고양이랑 강아지? 헉, 둘이 같이 이상한 거 먹었나 보다. 어쩌냐.”

“미안해요, 인하 선배! 미안, 예서야. 나 빨리 가봐야겠다. 연락할게!”

마침 다음 역이 용산역이라 새은은 부리나케 가방을 챙기며 작별을 고했다.

“걱정되겠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그러게. 괜찮아야 할 텐데….”

인하의 말에 예서도 맞장구를 쳤다.

“그럼 우린 어떡하지? 둘이 가기도 그렇고, 그냥 집에 갈….”

“다음 역 바로 이태원인데 그냥 가자. 둘이면 뭐 어때. 나 배고파 쓰러지겠어. 윽!”

최인하는 허리까지 꺾으며 주접을 떨었다. 어린애 같은 엄살에, 예서도 픽 웃고 말았다. 이럴 땐 덩치에 안 맞게 유치하고 가벼워 보였지만 밉지는 않았다.

그와 역사를 나와 나란히 걷는 동안, 스쳐 지나가던 여자들이 최인하에게 길게 시선을 주었다. 지금까지 제대로 의식한 적 없었지만, 그 역시 주변의 이목을 잡아끄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180cm 정도의 키는 한주혁보다 조금 작지만 덩치는 비슷….

예서는 저도 모르게 멈춰 섰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왜 갑자기 한주혁이 떠오르는지, 최인하와 비교 아닌 비교질을 하려는지 어이가 없었다.

“예서야, 왜 그래?”

“아, 아니에… 아니야, 아무것도.”

“배가 너무 고파 못 걷겠어? 그럼 오빠가 업어줄까?”

“그런 농담 좀 하지 마. 이젠 어린애도 아닌데….”

예서는 시답잖은 농담을 해대는 최인하를 곁눈질로 흘기곤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파란색 벽돌집. 태국어로 쓰인 간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야, 숨겨진 맛집이라더니 진짜 맛있겠다! 다 쓰러져 갈 것처럼 낡은 게 맛집 분위기가 아주 그냥.”

최인하는 들어가기도 전부터 입맛을 다시며 예서를 안으로 이끌었다. 푸팟퐁커리와 뽀삐아, 팟타이로 구성된 2인 메뉴는 듣던 대로 정말 맛있었다. 두 사람은 적지 않은 양을 깨끗하게 비우고 가게를 나와 카페로 향했다.

최인하는 디저트는 자신이 사겠다고 고집하며 근처의 디저트 카페로 안내했다. 아담하다 못해 협소한 가게도 인근 핫플레이스로 잘 알려진 개인 찻집이었다. 두 사람은 가게 시그니처 메뉴인 애플 크럼블 파이와 커피를 가져와 구석의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난 역시 아직 철이 덜 들었나 봐. 왜 아직도 이런 게 좋은지.”

“나이는 상관없잖아. 맛있는 건 누구나 다 좋아하지.”

“그렇긴 한데 난 이가 썩을 만큼 단 걸 너무 좋아하니까. 자, 많이 먹어.”

그가 파이를 정확히 반으로 나눠 그녀 몫의 조각을 접시에 덜어주었다. 접시를 받아 드는 예서의 얼굴이 순간 멍했다. 많이 먹어- 최인하의 하이톤과는 다른, 누군가의 저음이 경쾌한 실내 음악 위로 떠 올랐다. 치킨 닭 다리만 한 번에 다 몰아주던 손길 역시.

정신 차리자. 민예서. 왜 자꾸 이래…?

“그나저나 정우는 잘 지내지? 이번에 배낭여행, 미국도 갔으면 한 번 들렀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웠거든. 시차가 달라서 톡이나 문자도 자주 못 하고.”

“나랑도 연락을 잘 안 해서 모르겠지만… 잘 지내겠지. 무슨 일 있으면 엄마에게 바로 연락이 왔을 테니까.”

“힘들겠지만 열심히 해서 제때 졸업해야 할 텐데. 약사님이나 너 둘 다 고생하니까.”

“난 괜찮은데 오빠 말대로 제발 제때 졸업만 했으면 좋겠어. 그래야 엄마도 한시름 놓고 나도….”

나도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가족 모두가 민정우 한 사람을 전력으로 뒷바라지해 주고 희생하는 게 너무나 당연한 그 환경, 그 숨 막히는 분위기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솔직히 유학은 정우가 아니라 네가 갔어야 했는…. 아, 아니다. 내가 쓸데없는 말을 씨부렸다. 미안.”

“…….”

“미안해. 기분 나빴어?”

“아니야. 괜찮아.”

예서는 엷게 웃었다. 그를 억지로 안심시켜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웃음이었다.

“어쩌겠어. 엄마가 정우를 보내고 싶어 했는데. 나는 알아서 앞가림 잘하지만 정우는 계속 입시에도 떨어지고 갈 데가 없다고…. 재수도 못 하겠다고, 보내달라고 본인이 계속 버텼으니까.”

“어휴. 내 친동생이었으면 진짜 가만 안 둬. 철없는 새… 흠.”

“…….”

“그럼 넌. 나중에라도 갈 생각 있지?”

“글쎄. 잘 모르겠어.”

소설을 쓰게 되고부터는 제대로 데뷔해서 노트북 달랑 들고 해외에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사실 더 강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아직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가고 싶다 해도 돈이 없으니까. 당장 교환학생 갈 돈도 없고…. 알바로 모아서 간대도 엄마 눈치 보여 못 갈 것 같아. 정우 정착비에 한 푼이라도 더 보태야 한다고 1학년 때 MT도 못 갔으니까. 일단은 나도 무사히 졸업하는 데 희망을 걸어야지.”

집안 사정을 훤히 아는 사람과 대화하니 무슨 말이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어서 편했다. 제일 친한 채린과 새은도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최인하만큼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다.

“그럼 오빠는? 대학원 진학해서 박사까지 하고, 아저씨 회사에 들어갈 생각이야?”

“박사? 오 노우. MBA도 벌써부터 벅찬데. 그리고 난 외국계 기업에 취직할 거야. 가업은 둘째 형이 물려받기로 된 거나 다름없으니까 나까지 쥐어짤 생각은 하지도 마시라고 못을 박아뒀어.”

최인하가 팔짱을 끼며 히히, 웃었다. 그의 큰 형은 모친의 약국에서 약사로 근무 중이었고, 경영학과 전공인 둘째 형은 부친의 건축회사에서 경영관리 및 회계를 맡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막내인 그는 비교적 선택지가 넓고 자유로운 듯했다.

“오빠, 진짜 부럽다.”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사랑받고 자라서.”

성별보다 그 사실이 무척 부러웠다. 본인은 어릴 적부터 형들 밥이었다, 막내라고 뭐든 다 물려받고 구박만 더 받았다고 토로했지만 그가 얼마나 따뜻한 환경에서 사랑받고 자랐는지,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았다.

아저씨도 인자하셨지만 아주머니도 무척 정 많고 털털한 성품이셨다. 동네 터줏대감으로 인망이 두터운 건 그녀가 인근에서 제일 큰 약국의 약사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한주혁의 집도 약국을 한다고 했던가.

핫, 예서는 다시 비집고 들어온 그의 얼굴에 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는 일부러 더 환하게 웃으며 최인하를 돌아보았다.

“오빠가 그렇게 밝고 구김살 없는 것도… 다 그런 성장 환경의 영향이겠지?”

“야, 그렇지도 않아. 너 며칠 날 잡아 우리 집에서 살아봐라, 밖에서 볼 때처럼 그렇게 좋기만 한지.”

“난 진짜 살아보고 싶은데.”

“그럼 와. 우리 큰형, 작년에 독립해서 손님방으로 비워놨으니까 언제든 와. 진짜로. 농담 아니라 엄마가 너 온다면 엄청 좋아하실걸? 옛날부터 너 막내딸 삼고 싶다 하셨잖아.”

“그냥 하시는 말씀이지, 뭐.”

예서가 농담 반, 진담 반처럼 웃었다. 가식 없는 대화에 속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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