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어린 시절, 행복한 기억을 반추할 때마다 부친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아버지는 어린 딸의 절대적인 지지자였고 안정된 세상 그 자체였었다. 더 할 수 없이 듬뿍 애정을 표현함으로써 사랑하는 법과 사랑받는 법, 모든 긍정적인 감정을 가르쳐준 존재였다.
새삼 가슴이 뭉클했다. 부친과의 소중한 기억은 가슴 속 어딘가에 자리한 영원한 촛불 같았다. 종종 외롭고 지칠 때마다 늘 그 자리에 굳건히 서서 따스한 위안과 온기를 전해 주는 불씨.
그 기억 때문에 더 힘들어질 때도 있었다. 아빠로부터 받았던 그 무한의 애정 때문에, 그녀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부재중인 현실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뭐든지 독립적으로 알아서 잘하는 편이었다. 어릴 적부터 모친이 쌍둥이 오빠만 챙기는 탓에, 자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의존형일지도 몰랐다.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속으로는 늘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기대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했다.
-저 선배 좋아해요.
그래서 그날도 속을 다 털어놓고 말았다.
-선배가 좋아요. 선배로서가 아니라… 선배 자체가 그냥 좋아요.
하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해 본 말인 척했지만 후유증이 너무 길어 며칠을 멍하니 흘려보냈다. 약국 일과 아르바이트, 엄마 대신 집안일까지 하느라 정신없이 바쁘지 않았다면 더 힘들었을 것이다.
계절학기가 끝나고 개강하기까지 한 달의 텀이 있어 다행이었다. 한 달 뒤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아니,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한주혁을 마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TV를 끄고 책상에 앉는데 문자음이 울렸다. 액정 화면을 확인하는 예서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인하 오빠?
[민예서. 잘 지내냐? 드디어 9월에 만나겠네.]
[지금 어디야? 아… 배경 보니까 알겠다. 런던?]
[어. 8월 꽉꽉 채워서 31일에 귀국할 거야. 그럼 9월에 보자!]
발랄한 이모티콘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제대하자마자 복학 전 세상 구경하겠다고 배낭여행을 떠나더니. 작년 봄, 그와 같은 S대에 입학할 당시 최인하는 이미 군에 입대했기에 단 하루도 학교에서 만난 적이 없었다.
약사인 엄마들끼리 잘 아는 사이라 둘은 초등학교 때부터 알아 왔다. 친구가 많지 않고 까다로운 쌍둥이 정우도 최인하만은 형이라 부르며 잘 따랐다. 그만큼 밝고 친화력이 좋아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예서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한글 문서를 열었다. 이제 막 퀘스트를 시작한 소드 원정대가 티격태격 다투는 장면을 쓰고 있노라니 다시 실소가 나왔다. 쓰면 쓸수록 원정대 우두머리의 넉살 좋은 대사 위로 최인하의 말투가 겹쳐지고 있었다.
***
한낮의 열기와 습기가 한풀 꺾이고 공기가 서늘해질 무렵, 교정은 다시 두 달 전의 활기로 북적였다. 설레는 얼굴로 바삐 걷는 학생들 사이에는 가을 학기 복학생 최인하도 있었다.
“야, 예서야! 진짜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응, 오빠. 오랜만이야. 키가… 어쩐지 더 커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네가 더 작아진 건 아니고?”
“뭐래. 아니거든?”
예서는 그와 경영관으로 나란히 걸으며 티격태격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공익 군 복무와 세상 구경을 연이어 마치고 돌아온 지금, 최인하는 한층 더 밝고 활발해 보였다.
반면 체격은 벌크업을 해서인지 한층 더 남성적으로 변해 있었다. 이전에는 동갑 같은 두 살 연상이었건만, 더는 오빠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이제는 부쩍 남자로 의식되는 것 같았다.
“넌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냐. 오빠가 군대 갔는데 면회 한 번을 안 와!”
“뭐…? 사회복무요원한테 면회 가는 사람이 어딨어.”
“암튼 앞으로는 학교에서 자주 볼 테니 오빠한테 잘해라. 응?”
“과가 다른데 자주 볼 일이 뭐가 있어.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학점 관리나 잘해. 졸업 전에 몰아서 듣는다고 2학기 빡빡하잖아. 대학원 준비도 해야 되고.”
“너 저번에 문자로 그랬잖아. 회계학이 제일 어렵다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잘할 거고, 곧 회계학과 졸업하는 사람 여기 있으니까 좀 써먹으려면 평소에 잘하란 소리야.”
“됐어. 주은 언니 졸업하기 전에 노트 받아둔 거 있어.”
그때 그와 CC였던 서주은이 떠올랐다.
“아, 맞다. 주은 언니도 잘 지내지? 졸업하고 한 번도 본 적 없긴 한데….”
그는 경영관 앞에서 작별을 고하려다 주춤거렸다. 다시 돌아선 낯빛은 썩 좋지 못했다.
“깨졌어, 우리.”
“…….”
“졸업하고 들어간 공기관 협력 업체에서 좋은 사람 만났대. 로스쿨생이라던가? 잘 됐지, 뭐. 그럼 나중에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예서는 혀를 차며 경영관으로 들어섰다. 연애 문제에 대해서만은 여전히 철없는 남동생처럼 느껴지는 최인하였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옆을 돌아봤을 때였다. 복학생들 틈에 둘러싸여 별관으로 향하는 한주혁과 정면으로 눈길이 마주쳤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백 이후, 그를 보는 건 한 달만이었다.
서늘한 눈길이 그녀의 속을 꿰뚫을 듯 흘러들었다. 이유 없이 찔리는 느낌에, 눈인사도 하지 않고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부아가 치밀었다.
뭐 하러 그랬지, 죄인도 아닌데.
다음번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분하게 굴자고 마음먹었다. 과사에서 채린과 새은 등 오랜만에 만나는 동기들과 회포를 푸는 동안, 한주혁은 어느덧 뇌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다행히 이번 학기에는 그와 겹치는 수업이 없었다. 대신, 최인하가 졸업 때까지 미루고 미뤘던 인사관리 과목을 같이 듣게 되어 그와는 마주칠 일이 많았다.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성격답게 그는 채린과 새은과도 금세 친해져서 곧잘 어울렸다. 학생 식당에서 마주치면 자연스럽게 겸상도 했고 학교 밖 분식집이나 백반집, 카페에도 같이 가게 되었다.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다. 한주혁에 대한 마음도 온전히 접고, 바쁜 일상에만 집중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6개월 전 그가 복학하기 전처럼. 그와 단둘이 한강 변 테라스에서 야경을 바라보고, 카페에서 마주 앉아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순간들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조용히 마음이 정리됐다고 믿었다.
***
추석 연휴를 며칠 앞둔 9월의 셋째 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교정은 한적했다. 우천에도 일찌감치 금요일을 즐기려는 모양인지 학생들이 밀물처럼 빠져나간 학교는 조용했고, 경영관 스터디 라운지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박성준이 창밖을 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다 불쑥 옆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주혁아. 한주혁.”
동갑내기 사촌은 복잡한 그래프가 가득한 랩탑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찌나 집중했는지 숨소리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 혹시 예서랑 뭔 일 있었냐?”
커서를 움직이던 손이 뚝 멈췄다. 주혁은 정확히 2초 뒤에 그를 돌아보았다.
“…뭐?”
서늘한 시선에 성준의 심장이 출렁거렸다. 어라, 진짜 뭔 일 있었나. 말 같지도 않은 말은 애당초 한 귀로 흘려듣고 무시했을 녀석이라, 아니라면 새삼 방해받았다며 날을 세울 리도 없건만.
“아니. 그게… 좀 이상해서. 너 지난 학기까지만 해도 예서랑 팀 과제도 같이 하고 잘 지내지 않았어? 아, 맞다! 계절학기 과목, 같이 들은 것도 있잖아.”
“…….”
“그때 무슨 일… 있었냐?”
“무슨 일.”
주혁은 성마른 대꾸와 함께 시선을 화면으로 되돌렸다. 무슨 일은 개뿔- 그 몸짓 하나만으로도 대답을 들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한 촉이 자꾸만 발동했다.
“아니 뭐 요즘은 통 마주치지도 않고 얘기도 안 하고, 좀 이상해서.”
“같은 수업 듣는 게 없으니까 그렇겠지.”
“그건 그렇지. 그렇긴 한데….”
별 게 다 이상하다는 핀잔에도 성준은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기어이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런데 왜 멀뚱멀뚱, 멀리서 서로 보기만 하고 있나 싶어서. 꼭 헤어진 CC처럼.”
키보드 위 손가락이 다시 멈췄다. 다시 마주친 한주혁의 눈빛에 심장이 다시 덜컥 내려앉았다. 어우, 미친놈. 꼭 단둘이 있을 때만 저렇게 본색을 드러낸다니까. 그렇다고 할 말을 못 할 내가 아니지.
“가만 보면, 너 예서 계속 보고 있는 거 알아? 혼자 어딜 뚫어져라 보고 있길래 뭘 그리 열심히 보나 시선 따라가 보면 예서가 꼭 거기 있더라고. 예서도 그렇고.”
주혁이 랩탑에서 손을 뗐다. 이제 그는 제 쪽으로 완전히 돌아앉아 있었다.
“뭐라고?”
“아니… 진짜 그래 보여서 하는 말이야. 혼자 궁금해하다 이상한 상상 하느니 당사자에게 직접 묻는 게 낫잖아.”
“…마지막 부분, 자세히 설명해 봐. 예서도 그렇다는 게 무슨 소린지.”
“…….”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말해. 네 주관은 빼고.”
“내가 언제는 안 그랬냐?”
새끼가, 존나 무섭게 정색하고 지랄이야. 성준은 주눅이 들어 있던 것도 잠시, 제가 보고 느낀 대로 털어놓았다. 주관은 빼라고 했지만 그거야 화자 마음이고, 듣는 쪽이 알아서 걸러 들으면 될 터였다.
“말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나랑 예서, 조직행위론 같이 듣잖아. 도서관에서 마주칠 때도 많고. 근데 가끔 창문 너머나 과사에서 널 멍하니 볼 때가 있더라고.”
그 시선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노려보는 것도 같고 아주 애달프고 애잔하게도 보이는 눈빛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굳이 비유하자면 헤어진 연인, 그것도 아직 미련이 잔뜩 남은 상대를 향한 것처럼 느껴졌다.
반면 주혁이 민예서를 보는 눈길은 조금 달랐다. 결별한 연인, 아직 미련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분위기는 비슷했지만, 뭔가 하나 더 있었다. 민예서에겐 없고 한주혁에게만 있는 감정. 아주 짙고 강렬하면서도 분노는 아닌데 분노 같은…. 아, 뭐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