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차분한 어조였지만 행간의 의미는 명확했다. 부원장은 더 따질 생각도 못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거슬렸다간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경종이 자존심보다 훨씬 더 강하게 울리고 있었다. 오금이 저렸다. 한참 어린놈에게 주눅이 들어 버린 눈앞의 상황이 거짓말 같았다.
“아, 알겠어… 요.”
비굴하게 존대까지 해 버렸지만 상대는 이미 돌아서 있었다. 원하던 대답을 듣자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넓은 등짝이며 어깨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기가 막혔다.
“뭐야, 저 새끼는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와서! 하….”
남자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허공에 대고 대거리를 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기껏 눈독 들인 이상형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 절망스러웠다.
“씨팔. 남친이 있는 줄 알았으면… 티라도 좀 내지. 어우 씨!”
부원장은 의자를 걷어차려다 편의점에서 나오는 행인을 보고 다리를 슬쩍 내렸다. 비까지 와서 더 착잡하고 짜증이 솟구쳤다.
일부러 길 건너 단골로 굳힌 약국이었건만, 이제 다시는 그쪽으로 발길도 하지 않을 결심이었다.
***
-내 거 건드리지 말라고.
-정중히 말해 주니까 못 알아 처 듣는 모양인데 민예서는 내 거니까 신경 끄란 소리야.
주혁은 차를 갓길에 세우고 헤드 레스트에 머리를 기댔다. 쓴웃음이 나왔다. 고백을 일언지하에 거절해놓고는 이제 와서 내 여자, 내 거라니.
매일 약국 문 여는 시간에 맞춰 건너편에서 스토커처럼 지켜본 지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유리문 너머 보이는 민예서의 동그란 정수리는, 8시 반쯤 모친으로 짐작되는 약사 가운 차림의 중년 여자나 직원의 등장과 함께 잠시 사라졌다.
오전에 보이지 않을 때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낮, 때로는 저녁에 가 보았다. 그럴 때마다 민예서는 늘 카운터 뒤에 있었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뭐 하자는 거지, 도대체.
주혁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리며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졌다. 가슴이 서걱거리고 답답했다. 이 짓거리를 며칠 더 했다가는 화병이 날 것 같았다.
분명히 거절했는데. 좋은 후배 이상으론 생각해 본 적 없다고.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연애 같은 감정 소모는 온전히 그의 관심 밖 이슈였다.
누군가에게 감정적으로 종속되고 제 의지와 상관없이 휘둘리는 것, 그래서 자기 주도적인 일상이 흐트러지는 건 원치 않았다. 아무리 예측할 수 있도록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만일을 대비해도, 인간관계란 것만큼 크고 작은 변수에 좌우되는 것이 있을까.
밀어내야 돼.
주혁은 이마 위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다시 쓸어 넘기고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깨질 것이다. 가까워질수록 관계의 끝은 더 좋지 않을 것이기에, 이쯤에서 접어야 한다. 그게 그 자신과 민예서, 둘 다를 위해 최선이었다.
얼마나 더 그렇게 차 안에 있었을까. 벨 소리에 주혁이 눈을 떴다. 저장되지 않은 낯선 번호에 휴대폰을 다시 내려놓았지만 전화는 끈질기게 울려댔다.
마지못해 통화에 응했다. 짐작 가는 사람이 있었다. 통화를 끝까지 거부하면 세종의 외조모가 전화하게 만들 것 같아 진저리가 쳐졌다.
“네.”
-주혁아. 이모야.
“무슨 일이시죠.”
기계처럼 건조한 목소리가 자동으로 흘러나왔다.
-방학인데 세종엔 안 올 거니? 지난번에도 나 없을 때 왔다며.
“바빠서 추석 때나 뵐 것 같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시 입을 여는 류혜수의 음성은 조금 갈라져 있었다.
-주혁아. 혹시… 아직도 나와 마주 보는 것 자체가… 싫은 거니?
죽은 모친, 류혜정의 사진 속 얼굴이 떠올라 주혁은 눈을 감았다. 자매는 예나 지금이나 쌍둥이처럼 닮은 외모였다. 흐린 기억 속, 이모의 뒷모습만 보고 엄마- 달려가 덥석 매달렸던 적도 많았다.
-항상 나랑 네 이모부 없을 때만 세종에 오잖니. 같은 동네니까 어머니가 날 부를까 봐… 마주칠까 봐 일부러 그러는 거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여린 목소리였다. 불혹을 한참 넘겨 오십에 가까운 나이인데도 목소리는 맑고 앳되었다. 류혜수에겐 예나 지금이나 소녀 같은 면이 있었다. 그래서 15년 전 그런 짓을 벌인 건가? 마냥 소녀처럼 철이 없었던 3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주혁아.
“그럼 좋을 거라 생각하세요?”
저도 모르게 성마른 대꾸가 튀어나왔다. 다른 때 같았다면, 민예서로 인해 심란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적당히 넘기고 통화를 마무리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천연덕스럽게 이모님을 대할 수 있을 거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시죠?”
휴대폰 너머에선 침묵이 흘렀다. 차 안은 숨 막힐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도 이제 성인입니다. 1년에 두 번, 명절 때 뵙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게 감당하고 있으니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진 마세요.”
-주혁….
“이만 끊겠습니다.”
통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그는 단말기를 옆좌석에 던져넣고 콘솔박스를 열어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학교에서는 일절 금연이었고 평소 잘 피우지도 않았다. 하지만 민예서가 고백한 날 이후로는 그녀가 생각날 때마다 손이 자동으로 담배를 찾게 되었다.
필터 아래 짙은 연기를 빨아들이자 각기 다른 과거의 장면들이 교차되어 머리를 어지럽혔다. 하나는 16년 전, 어머니 류혜정이 친정 가족과 악을 쓰며 통화하던 얼굴이었다.
기억 속 모친은 언제 어디서나 늘 이목을 끄는 미인이었다. 큰 키와 단아한 분위기, 발레 전공생답게 작은 손짓과 몸짓 하나하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리고 화를 내는 일이 드물었다. 참을성이 강하거나 긍정적이었다기보다는 몸이 약해 늘 지쳐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가 그다지 가깝지 않았다. 그렇다고 냉랭하거나 데면데면하지도 않았다. 선을 보고 바로 날짜를 정한 정략혼에선 드물지 않은 관계였다.
조부 한영수는 재력보다는 평판 좋고 건실한 공무원 사돈을 원했다. 그 뜻에 따라, 아버지 한석우는 C도 도지사였던 외조부 류태섭의 장녀 류혜정과 화촉을 올렸다. 모두가 흡족한 결혼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심 아버지에게 애틋했다. 처음부터 그를 좋아했던 것인지, 살면서 정이 든 것인지는 몰랐다. 안타까운 것은 어머니의 감정이 일방통행이었단 사실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는 집안의 사용인들을 향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신과 약을 먹고 있더라니까요. 감쪽같이 속아서 결혼한 거였어! 그럼 그 유전자가 아이에게도….
어느 날 거실 창가에 장난감 기차 부품을 쭉 늘어놓고 조립하고 있을 때였다. 섬찟한 느낌에 고개를 들자, 탁자의 전화기를 한 손에 들고 그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모친의 시선과 마주쳤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할머니의 외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이고, 그건 아니겠지! 설마! 우리 혁이가 얼마나 똑똑해. 몸이 약해 성장은 늦어도 네 살부터 영재학교에 갈 만큼 얼마나 영리하니! 한 서방도 지금은 괜찮고 그, 공황발작 같은 것은 외국에서는 아주 흔하다더라!
-그렇다고 해도 속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그럼 어쩔 거야. 헤어지기라도 하겠단 거냐? 우리 혁이까지 있는데 그건 안 될 말이다!
-누가 헤어진대요? 누구 좋으라고…. 그럴 생각은 절대 없어요. 하지만 날 속인 건 절대 용서 못 해. 사과 없이 이대로 넘어갈 순 없어요.
단조롭지만 큰 굴곡 없던 부모님의 일상이 깨진 건 그때부터였다. 하지만 그날은 시작에 불과했을 뿐, 갈등은 점차 더 큰 양상으로 변해갔다. 자주 놀러 왔던 이모 류혜수도 언젠가부터 발길을 뚝 끊었다.
그는 한동안 영문도 모르고 모친의 손에 이끌려 병원 여기저기 끌려다녔다. 하얀 가운의 의사 선생님들 앞에는 늘 정신과 닥터 누구라는 명패가 있었고 온갖 그림과 퀴즈, 질의응답에 응하느라 진이 빠지던 나날이었다.
어머니는 검사 결과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가 결과지를 꼼꼼히 살폈다. 그러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곤 했다. 모친의 고운 얼굴은 항상 굳은 결의에 차 있었다.
동시에, 늘 수심에 잠겨 있기도 했다. 그 무수한 검사를 통해 뭔가를 확실히 입증해내고자 하는 의지, 사명감에 불타는 동시에 미지의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 모든 게 이해되었다.
아들이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 제 아비의 나쁜 유전자를 물려받지 않았다는 확신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머니로서 당연한 염려였으리라.
어느 날 밤, 아버지가 귀가했고 두 사람은 굳은 얼굴로 2층 침실에 올라갔었다. 방문을 꼭 닫았는데도 고함이 복도에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뭘 집어던져 깨지는 소음도 났다.
-미쳤어? 미쳤냐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당신이! 더러운 것들, 더럽고 추잡해!
그리고 며칠 후, 두 사람은….
거기서 잔상은 다른 쪽으로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열한 살의 제 모습이 보였다. 성장 부진으로 기껏해야 일고여덟 살처럼 보이던 그는 바위에 매달려 있었다. 민예서가 두 손으로 제 한쪽 손목을 꼭 부여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야, 자면 안 돼! 깨어 있어! 조금만 버텨보란 말이야…!
어떻게든 그를 구하겠다고 애쓰는 얼굴이 말갛게 빛났다. 몇 살이었지? 그보다 세 살 어리니까 여덟 살이었겠구나.
그날 민예서의 오른쪽 손목 안쪽에 생겼던 흉터가 재차 떠올랐다. 가늘고 하얀 손목 아래, 실금처럼 희미하게 남아 있는 선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
-회피형 애착 유형은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 형성되어 성인이 되어서도 유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본인의 성향인 것인데요, 어릴 때 부모님으로부터 애정 표현을 많이 받고 정서적인 유대감이 안정적이었던 사람은 이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안정형에 속하는 것이지요.
예서는 오랜만에 글을 쓸 짬이 생겨 TV를 끄려다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화면에서는 유명한 정신과 전문의가 애착 유형에 대해 패널들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불안형과 회피형, 그 둘이 합쳐진 혼란형이 있는데 이 케이스는 회피형이라 볼 수 있습니다. 독립심과 자아가 아주 강하고 감정적으로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아요. 타인과의 인간관계에 나름대로의 선을 긋고 거리를 두기 때문에, 자신이 정해둔 기준 이상으로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본능적으로 그 상대방을 선 밖으로 밀어내 버리는 거죠.
-그 상대방을 싫어하지 않아도 말인가요?
-맞아요. 심지어 좋아해도 밀어내는데, 관계가 깊어지고 친밀해지는 것 자체를 회피하기 때문이에요. 그게 반복되니 주위에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혼자 있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감정적으로 늘 외롭고 공허한 상태에 있는 거죠.
-외롭지만 가까이하긴 싫고…. 참 어려운 유형이네요. 자존감이 낮은 불안형보다 더 어렵게 느껴져요.
예서는 전원을 끄는 것도 잊고 어느새 TV 앞에 바짝 다가서 있었다. 자신은 불안형에 가까운 것 같았다. 회피형이 타인과의 깊은 교류를 거부하고 밀어내는 반면, 누군가와 교감하고 유대하길 원했다. 마음 맞는 사람의 애정을 늘 갈구했고 가까워지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