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17)화 (18/124)

<17화>

[곤란하게 만들어서 죄송했어요.]

[아니잖아, 그런 거.]

손가락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진심이었잖아. 내게.]

하. 바람 빠지는 소리가 잇새로 흘렀다. 미친 새끼. 보기 좋게 밀어내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혀끝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어느새 입술을 깨물고 있던 것도 모른 채 그는 휴대폰을 부서져라 잡고 예서의 문자를 기다렸다.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욕설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욕설 대신 차분한 답변이 돌아왔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알아서 추스를 테니까요.]

이제 선배, 안 좋아할 거니까요.

주혁의 눈에는 그렇게도 읽혔다.

[9월에 개강하면 다시 좋은 선후배 사이로 뵐게요. 남은 여름 잘 보내시길 바라요.]

문자는 더 날아오지 않았다. 주혁은 마지막 문자에 덧붙은 스마일 이모티콘을 바라보다 곧장 전화를 걸었다.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민예서의 전화는 꺼져 있었다.

열어 둔 창문 방충망에 매미가 들러붙어 울기 시작했다. 후덥지근한 여름의 끝이 한참 요원하게 느껴졌다.

***

주말에도 일하는 직장인들이 이른 시간부터 출근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오전부터 내리는 비로 습도가 높아 꿉꿉한 오전이었다. 제각기 우산을 받쳐 들고 버스 정류장에 선 사람들은 벌써부터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우 약국 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 들어서는 가운 차림 남자의 안색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카운터에 선 여자를 보는 순간, 가운을 입은 부원장의 안색은 환해졌다. 토요일 이 시간엔 손님들이 거의 없어 여유 있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예서 씨, 안녕? 저거, 비타민 음료 하나 부탁해.”

“부원장님, 안녕하세요? 오늘 토요일인데 진료 보시나 봐요.”

약사 딸은 방긋 웃으며 맞은편 건물의 치과 의사를 반갑게 맞이했다. 언제 봐도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 맑고 투명해 눈이 부셨다.

“응. 페이 닥터 신세가 그렇지, 뭐. 나도 빨리 개원해서 주말이란 걸 가져봤으면 좋겠어.”

“고생이 많으시네요. 여기요.”

“약사님은 오후에 나오시나 봐? 방학인데 이렇게 나와서 거들고, 예서 씨야말로 고생이 많지. 다른 알바도 한다면서 정신이 없겠어.”

“방학이니까 괜찮아요. 수민 언니가 집에 일이 있어서 당분간 더 나와 있어야 할 것도 같고….”

“저런. 그럼 며칠 더 고생해야겠네.”

그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머릿속으론 어떻게 밥 한 끼를 같이 먹을 기회를 가져볼 수 있을까, 어떤 명분을 내걸어야 할까, 역시 모친인 이 약사부터 포섭하는 게 나을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무수히 오갔다.

아냐, 그냥 저질러 보자. 차일피일 미룬 게 벌써 몇 달이야.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 돼.

“있잖아, 예서 씨. 그럼 혹시 오늘 점심….”

“아이고, 머리야! 예서 양, 나 숙취 해소제 하나만 줘. 새벽까지 달렸더니 내가 사람인지 떡인지 분간을 못 하겠어!”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맞은편 떡집 주인이 비틀거리며 들어섰다. 그 뒤를 따라 몇 명의 동네 어른들이 들어서서 나도, 나도, 제각기 외쳐댔다. 좁은 약국 안은 순식간에 묵은 술 냄새로 가득 찼다.

예서는 숙취해소제를 아예 박스째 들고 어르신들에게 하나씩 건넸다. 부원장은 그들 뒤에 머쓱하니 서 있다가 결국 약국 밖으로 걸어 나왔다. 신호등을 건너 병원 건물로 돌아가는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진료 시간까진 한참 남아 있었다. 후문 쪽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서 파라솔 자리에 앉아 담배를 물어 들었을 때였다. 부원장의 눈이 갑자기 번쩍 뜨였다.

편의점과 마주한 공영주차장에서 근사한 슈퍼카가 서 있었다. 운전석에서 내려선 남자는 키가 훤칠했고, 우산에 가려져 있는데도 외모가 수려해 연예인처럼 보였다.

우와. 누구지? 아이돌인가? 그냥 카푸어?

차와 차주 모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려왔다. 결혼정보회사에서 만남을 종용하는 연락이 왔다며, 일단 만나보라고 독촉해대는 모친이었다.

“엄마, 그건 좀 보류해둬요. 내가 말했잖아. 같은 동네 사는 여자, 괜찮은 사람 하나 있다고.”

-뭣이냐, 병원 앞에 그 쪼맨한 약국 딸? 아이고, 됐어. 얘기만 딱 들어도 홀어머니에 볼 거 없는 집이더만. 그래갖고 너 개원하는 데 보태줄 수나 있겠니? 보태기는커녕 네 등골 빨아먹을 형편이던데 아예 생각도 하덜 마.

스피커폰이 아닌데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빗줄기를 뚫고 새어 나왔다.

“에이, 남의 집 곳간은 일단 까봐야 알지. 아들은 유학 보내놓은 거 보면 은근 두둑할 수도 있다고요.”

-이제 겨우 대학교 2학년인가 3학년이라 하지 않았어? 너보다 열 살이나 밑인데 너무 어리잖아. 물론 우리 아들이 워낙 동안이고 잘생겨서 또래로 보일 건 뻔하지만, 그런 철딱서니랑 만나다간 네 등골만 휘어지고 피곤할 거라구. 네다섯 살 차이가 딱 좋지 않겠니?

“철딱서니 아녜요, 엄마. 알아보니 S대 모범생에다 속도 깊고 품행 방정하다고 동네에서도 평판이 아주 좋더라고. 물론 얼굴이 안 따라줬으면 거들떠도 안 봤겠지만.”

특히 몸매. 그가 덧붙이며 경박하게 큭큭, 웃었다. 절대적인 제 편인 모친 앞에서만 드러낼 수 있는 가면 밑 본색이었다.

“아무튼 좀 기다려봐요, 엄마. 제대로 콕 찜해놨으니까 간을 한 번 보고…. 집이 정말 속 빈 강정인지 좀 차 있는지도 알아볼게. 만에 하나 진짜 개털인 집안이라도 약국 터 하나는 있잖아요. 이 동네가 지금은 낙후되어 있어도 재개발하면 진짜 천지가 개벽할 지역이니까.”

-얘, 그럼 사주나 한 번 보게 생년월일이랑 이름 좀 대 봐. 사진은 없어? 관상도 좀 보게.

“사진은 몰래 찍은 게 몇 장 있긴 한데 잘 보이려나 모르겠네. 이름은 민예서. 생년월일은 전에 들어둔 게….”

남의 신상을 줄줄 읊는 두 눈이 안경 너머 음험하게 빛났다. 통화에 하도 열중하느라 누가 아까부터 등 뒤에 와 서 있는 것도 몰랐다. 통화가 끝나고 휴대폰을 내려놓는 입에서 천박한 탄식과 담배 연기가 나란히 흘러나왔다.

“혹시 저 폐가 같은 건물 전체가 자기네 거 아냐? 그럼 진짜 대박인데. 재개발만 하면… 씹.”

탐욕과 욕망에 흐려진 눈이 빗줄기를 뚫고 길 건너 낡아빠진 약국 간판으로 향했다.

“존나 따먹고 싶어 돌아 버리겠네. 몸매가 아주 그냥. 하아….”

“이 건물 B 치과 선생님이신가요?”

정수리에 와닿는 목소리에 부원장이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아까 애스턴 마틴에서 내렸던 남자가 우산을 쓰고 등 뒤에 서 있었다.

“어, 그, 그런데요. 부원장입니다.”

설마 내 혼잣말을 듣진 않았겠지. 환자인가 싶어 평소의 점잖은 가면을 다시 쓰려 할 때였다.

“아직 오픈 전인데 너무 일찍 오셨네요. 올라가셔서 기다리시….”

“헛물켜지 마시죠.”

“…네?”

부원장이 귀를 의심하며 눈을 크게 치떴다. 운동선수처럼 다부진 체격을 한 남자의 시선은 오금이 저릴 만큼 서늘했다. 자세히 보니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외양이었다.

외모 자체는 풋풋하니 20대 초나 중반 같았다. 하지만 몸 전체에서 풍기는 기운이나 눈빛은 어린 나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범상치가 않았다.

“민예서에게 헛물켜지 말라고요. 이 시간 이후로, 정우 약국 딸에게 접근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뭐요…?”

부원장이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역시 작은 키는 아니었는데도 상대를 올려다봐야 하는 눈높이에서 굴욕감이 느껴졌다.

“부탁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아니, 댁이 뭔데? 댁이 민예서 뭐라도 되나?”

“학교 선배입니다.”

“난 또 뭐라고. 이봐, 가만 보니 그쪽도 그 여자에게 작업 거는 모양인데 각자 알아서 페어 플레이하자고. 응?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허세는…. 남의 일 참견 말고 가던 길이나 가.”

부원장의 눈이 상대방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었다. 근사한 외모가 아니더라도 어딘가 부티가 나는 분위기였지만 눈 씻고 봐도 명품 같은 건 없었다. 티셔츠에 청바지, 운동화에 낡은 가죽 손목시계가 다였다.

지랄. 좆도 없는 양아치 새끼가. 세차장이나 호텔에서 숙박객 차 쌉쳐온 거 아냐?

“내 거 건드리지 말라고.”

남자가 다시 낮게 내뱉는 순간 부원장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배경으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공기가 남자로부터 분출되고 있었다.

“정중히 말해 주니까 못 알아 처 듣는 모양인데 민예서는 내 거니까 신경 끄란 소리야.”

남자가 그에게 한 발짝 더 다가왔다. 놀랄 만큼 잘생긴 얼굴에는 한 치의 균열도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내리꽂힌 시선, 차분한 저음은 오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남의 여자를 존나 따먹고 싶다느니 개돼지나 다름없는 실언에다 범죄나 다름없는 신상 공유까지…. 경우가 아니죠, 의사 선생.”

무감한 어조의 욕설이 혼잣말처럼 뒤를 이었다. 부원장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다. 귀를 의심할 만큼 저열한 욕지거리에 정신이 혼미했다.

“이, 이 어린 새끼가 어디서 감히….”

하지만 그게 다였다. 한 발짝 나서긴 했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난데없이 욕을 먹은 분노보다는, 미지의 공포심 쪽이 훨씬 더 컸다.

간담이 서늘해지며 혀가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벌건 대낮처럼 환한 오전, 인파가 수시로 오가는 대로변 건물 앞인데도 아주 위험한 인물과 단둘이 대치하고 있는 착각마저 들었다.

“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민예서에게 신경 끄세요.”

좋은 말로 할 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