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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16)화 (17/124)

<16화>

예서의 안온했던 기분이 사늘하게 가라앉은 건, 오랜만의 식사가 끝나고 근처 루프탑 카페에서 마주 앉았을 때였다.

색다른 음료를 마셔보고 싶어 서머스비 애플 사이다를 시켰을 때만 해도 그게 과실주란 걸 몰랐다. 덕분에 한 병을 다 비웠을 땐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결국 그게 원흉이었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속내를 다 드러내고 만 것은 사과 맛 나는 스파클링 맥주의 도수 때문이었다. 아니, 그 전에 한주혁의 도발 때문이었다.

“예서야, 괜찮아? 얼굴이 저번처럼 너무 빨개졌는데.”

“아, 이거… 알고 보니 맥주였네요. 그래서 그래요.”

“그거 마시기 전부터 빨갛던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여상하게 덧붙였다.

“꼭 데이트라도 하는 것처럼 수줍게.”

반으로 접힌 눈이 어쩐지 놀리는 것 같았다.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불쑥 말해 버렸다. 은은한 재즈 선율 속에서 제 목소리가 타인의 것처럼 낯설게 와닿았다.

“데이트라고 생각하면… 안 되나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예서는 귓불까지 번지는 열기를 무시한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차 말했다.

“저 혼자서는 데이트로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데이트란 게 뭐… 특별한 건가요? 남자, 여자 만나서 밥 먹고 차 마시고 술도 마시고…. 둘만의 시간을 보내면 그게 데이트지.”

딸꾹,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한주혁이 조금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예서는 한순간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꿋꿋하게 버텼다. 미친 건가, 생각하면서도 눈길을 피할 수가 없었다. 볼이 홧홧하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글쎄. 그건 좀 아니지 않아? 데이트는 서로 이성으로 볼 때 성립되는 단어니까.”

한주혁이 잔을 내려놓고 차분하게 말했다. 똑같이 맥주를 마시고 있으면서도 그에게선 일말의 취기도 보이지 않았다.

“우린 선후배 사이지 서로를 이성으로 보진 않잖아.”

“그런 법이 있나요? 어쨌든 선후배 이전에 남자와 여자잖아요.”

다시 끅, 딸꾹질이 나왔다. 입만 열면 바로 튀어나올 것처럼 목젖이 덜덜 떨리는데도 용케 말은 꼬이는 것 없이 나오고 있었다.

미쳤네, 민예서. 지금 대체 무슨 헛소리를….

“예서야. 너.”

농담이었다고 얼버무리려는 찰나 한주혁이 입을 열었다.

“혹시 나 좋아해?”

고저 없이 차분한 음색이었다.

“선배로서 말고, 네 말대로 남자와 여자로서.”

그 순간 루프탑 실내의 조도가 낮아지며 한주혁의 눈도 잠시 가려졌다. 수초 후 다시 드러난 눈빛은 어두운 동굴 같았다.

“네.”

예서가 주저 않고 답했다.

“네, 저 선배 좋아해요.”

정말로 취해 버리기로 한 걸까. 갑자기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감당할 수 없이 차오르는 무언가에 심장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선배가 좋아요. 선배로서가 아니라… 선배 자체가 그냥 좋아요.”

열기는 이제 눈가에까지 전이되어 있었다. 예서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다시 입을 열었다간 눈물을 왈칵 쏟을 것 같았다.

한주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린 듯 담담한 입술은 느슨하게 다물린 채였다. 그의 너른 어깨 너머 보랏빛 달이 보였다.

달에 반사된 빛이 건물 측면 여기저기 걸려 사방에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저만치 떨어진 테이블 곳곳에선 뭐가 그리 재밌는지 경쾌한 웃음이 연신 터져 나왔다.

주변은 활기찬 여름밤 특유의 낭만으로 넘쳐 있었다. 무더위는 에어컨 바람에 묻혀 있었고 삭막한 도심 한가운데서도 어디선가 풀벌레의 울음이 들렸다. 어쩌면 매미 소리였는지도 몰랐다.

예서는 알딸딸한 와중에도 방금 전의 상황을 반추해 보았다. 단지 분위기 때문일까. 이 공기에 휩쓸려서 나도 모르게 그만….

“아니에요.”

속엣말이 육성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한심하게도, 상대방은 묻지도 않은 자문자답까지 시전하고 있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충동적으로 한 말 아니에요. 진심이에요.”

“왜?”

그는 담담하게 물었다. 음색만큼이나 감정이 읽히지 않는 눈동자가 예서의 심장을 똑바로 관통해 왔다. 무심함을 가장한 태도로 사건의 본질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취조자의 눈빛이 저럴까.

“그냥요.”

“…….”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데에 설명할 수 있는 이유란 게 애당초 있을까요? 그냥 마음이 가는걸….”

“그렇게 갑자기?”

“계기가 없었던 건 아니에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때… 펜을 돌려주러 팬케이크 하우스에서 선배랑 처음 밥 먹었던 그날이요.”

“…….”

“그날 처음… 느꼈던 것 같아요.”

예서는 잠시 말을 멈췄다. 얼떨결에 고백은 튀어나왔지만 구구절절 다 털어놓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모친이 늘 정우에게만 다 밀어줬던 치킨 닭 다리를 그녀에게 다 양보하고, 많이 먹으라고 따뜻하게 말해줘서? 정작 친엄마조차 챙겨주지 않았던 온기와 배려를 그에게서 느껴서? 오래전 돌아가시기 전까지 딸바보였던 아빠가 떠올랐기 때문에?

입에 담기엔 너무 바보 같은 이유 같았다. 스스로가 먹는 것에 환장한 먹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음식이 아닌, 그 저변에 깔린 마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 가닥의 희망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 어떤 논리적인 이유도 없었다. 허울뿐인 친절, 빈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억측보다는 진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더 컸다. 어쩌면 선배도 저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게 아닐까. 그녀를 후배 이상의 남다른 눈으로 보고 있었던 건 아닌지.

하지만 한주혁이 입을 여는 순간 그 희망은 보기 좋게 엇나가 버렸다.

“미안해.”

예서가 눈을 깜빡였다. 뺨을 온통 발갛게 물들였던 홍조가 반쯤 가라앉아 있었다.

“난 너를 좋은 후배 이상으로 생각한 적이 없어.”

예서가 눈을 깜빡였다. 수면 아래 있는 것처럼 귀가 먹먹했다. 취기는 한참 전에 가셔 있었다. 이제 더는 알코올 핑계를 댈 수 없을 만큼 머리는 맑았고, 전신에 고여 있는 듯했던 열기도 에어컨 바람에 날아가고 없었다.

“미안.”

사과가 재차 이어지고 나서야 예서가 입술을 열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현실로 돌아온 귓전에 낯설고도 어딘가 익숙한 재즈 선율이 흘러들었다.

“죄송해요. 갑자기… 일방적으로 불쑥 말해 버려서. 곤란하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주섬주섬 가방 속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던 얼굴이 이제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한주혁도 뒤따라 일어났다.

“예서야.”

“괜찮아요. 시간이 늦어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너무 늦으면 엄마가 뭐라고 하시거든요.”

거짓말이다. 모친은 자신이 말도 없이 늦어도 한 번도 걱정해서 연락해 온 적이 없었다. 시험 기간이라 도서관에서 자정 넘겨 귀가할 때마다 엄마는 늘 자고 있었다. 만약 정우였다면 몇 번이나 연락하고 밤새도록 뜬눈으로 기다리지 않았을까.

“데려다줄게.”

“괜찮아요. 걸어가도 되고, 버스 많아요.”

“같이 택시 타자. 어차피 같은 방향이니까 너 먼저 내려주고 가는 길에….”

“그냥 갈게요.”

예서는 그를 똑바로 올려다본 채 단호하게 말했다.

“혼자 가고 싶어요.”

“…….”

“커피 사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다행히 한주혁은 더 붙잡지 않았다. 예서는 고개를 까닥 숙여 보이곤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왔다. 다행히 정류장 앞에 서자마자 버스가 바로 와서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버스 뒷좌석에 앉아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익숙한 골목과 가게, 집들, 창에 비친 제 얼굴만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동안 하차할 정거장에 도착해 있었다.

아파트까지 걸어가 엘리베이터를 탔지만 결국 집 안에 들어서진 않았다. 대신 복도 끝 비상구 계단참에 서서 창밖을 응시했다. 눈물이 터진 건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엄습한 직후였다.

처음 고백이란 걸 해 본 밤이었다. 그리고 보기 좋게 거절도 당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더 현실 같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이, 오롯이 혼자 감당하게 될 줄도 몰랐다.

정우밖에 모르는 엄마에겐 처음부터 기댈 생각이 없었다. 채린이나 새은처럼 가까운 친구들에게 연락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예서는 한여름 밤 땀과 눈물을 잠시 식히고 나서야 집으로 들어섰다. 불 꺼진 집은 고적했고 그녀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주혁은 문자음이 울리자마자 바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잘 들어갔냐는 톡에, 민예서는 자정이 가까워서야 답문을 보내왔다.

[답이 늦어서 죄송해요, 선배. 잘 들어왔어요.]

그의 손가락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

답은 한참 후에나 날아왔다.

[선배, 저 정말 괜찮아요. 진지한 마음 아니었어요, 아시잖아요.]

머쓱하게 웃는 이모티콘과 함께 문자가 연달아 올라왔다.

[선배 좋아하고 동경하는 사람들 많잖아요. 저도 그런 마음이었어요.]

거짓말.

주혁의 입가에 쓴웃음이 고였다. 거짓말이길 바라는 건지, 정말로 그렇게 느낀 건지 스스로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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