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옆자리의 의자가 끌리는 소리에 눈이 반짝 뜨였다. 부스스한 머리를 들어 올려 황망히 휴대폰을 들여다봤을 땐 이미 7시가 지나 있었다. 한 시간도 채 자지 않았지만 몇 시간 숙면을 취한 것처럼 머리가 개운했다.
“어? 뭐지, 이거.”
조직행위론 교재 위에 1층 카페 로고가 찍힌 종이봉투가 놓여 있었다. 안을 열어 보자 에그 앤 베이컨과 까눌레, 큐브 샌드위치 등 손가락으로 집어 먹기 좋은 빵과 보틀 밀크티가 들어 있었다. 예서는 봉투 옆에는 붙은 포스트잇을 떼어 냈다.
[잘 잤어? 끼니 거르지 말고 공부해.]
단정한 손글씨였다. 어디선가 본 듯도 하고, 처음 보는 것 같기도 한 필체였다.
누굴까. 누구지?
채린이나 새은이의 필체도 아니었고 다른 동기일 리도 없었다. 갑자기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에, 퍼뜩 놀랐다.
설마. 주혁 선배…?
***
다음날, 토요일은 새벽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애스턴 마틴 컨버터블은 보슬비를 뚫고 세종시 도로를 막힘 없이 질주하다 감성교차로에 접어들었다.
차는 이내 도암리의 단아한 한옥 앞에 멈춰 섰다. 대문을 열기도 전에 개 짖는 소리가 그를 제일 먼저 반겼다.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하얀 털 뭉치가 왕! 짖으며 그의 품으로 냅다 뛰어들었다. 발군의 점프력을 지닌 잭 러셀 테리어다웠다.
“희동이, 잘 있었어?”
강아지는 꼬리뿐 아니라 혀에도 모터가 달린 것처럼 주혁의 얼굴을 정신없이 핥아댔다. 그는 희동이를 안은 채 너른 한옥 부지로 들어섰다. 외조모 선혜숙이 일찌감치 툇마루에 나와 기다리다 버선발로 손주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주혁아! 아이고, 내 새끼 왔구나!”
“할머니.”
선혜숙은 그를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중간에 낀 희동이가 낑낑거릴 만큼 포옹은 한참 이어졌다. 외손주는 언제 봐도 애틋하고 가슴이 아렸다.
죽은 딸의 소중한 유산. 딸을 잔인하게 죽인 철천지원수의 아들. 그래서 처음에는 징그럽게 여기고 혐오하기도 했었다. 어린 손주 얼굴 위로 사위가 언뜻언뜻 보일 때마다 견딜 수 없었다. 끔찍했다.
하지만 커갈수록 손주는 고인이 된 딸을 더 닮아갔다. 작은 몸짓, 사소한 버릇 하나하나가 생전의 혜정을 연상시키곤 했다. 그래서 더 괴롭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마음이 심적인 고통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이 애는 그 끔찍한 살인자의 아이가 아냐. 주혁이는 내 딸, 혜정이의 아들이야. 그것만 기억하면 돼. 가엾은 것. 내가 품고 구원해줘야 하는 내 새끼.
***
예서는 약국 카운터 뒤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직원 조수민이 개인 사정으로 휴가를 내서 모친을 하루 종일 도와야 했다. 눈앞에 빽빽하게 정리된 기말고사 노트가 있었지만 정작 시선을 뗄 수 없는 건 휴대폰 단말기였다.
그녀는 마침내 결심한 듯 휴대폰의 연락처 리스트를 뒤져보았다. 예전에 그와 주고받았던 문자의 연락처는 ‘한주혁 선배’라고 저장되어 있었다.
“그래. 뭐 어때서.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지 뭐.”
용기가 사그라들기 전에 재빨리 자판을 치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선배. 안녕하세요? 여쭤볼 게 있는데 잠깐 연락을 드려도 될까요?]
읽음 표시는 한참 뒤에 사라졌지만 답문은 확인 직후 바로 날아왔다.
[이미 연락했잖아.]
웃는 이모티콘이 뒤따라왔다. 그때 저쪽에서 먼저 전화가 걸려 왔다. 한주혁이었다.
-안녕.
“아… 안녕하세요, 선배.”
-뭔지는 몰라도 통화가 나을 것 같아서 전화했어. 뭔데?
“아, 네… 그게.”
긴장해서인지 목소리가 자꾸 갈라져 나왔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닌데요. 어제 도서관에서 깜빡 조는 사이에 누가 제 자리에 먹을 걸 놓고 갔는데… 혹시 선배가 아닌지 해서 여쭤보고 싶어서 연락을….”
-깜빡 조는 정도가 아니던데.
헉. 역시 선배였구나. 예서가 아랫입술을 꼭 물었다. 기쁨을 누를 수가 없었다. 동시에, 혹시 침이라도 흘리거나 추한 꼴을 보이진 않았을지 걱정도 되었다.
“서…선배. 저….”
-걱정 마. 아주 얌전히 자고 있었으니까. 침 흘리고 코 골고, 그런 일은 없었어.
다행이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어제 잘 먹었어요.”
-원래 자다 일어나면 더 배고프잖아. 저녁 먹을 때도 돼서 깨울까 하다가 그냥 왔어.
그 말에 뒤늦은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냥 깨우지. 깨웠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단둘이 한 번 더 식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때 휴대폰 너머로 왈왈,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뒤이어 어르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도 들렸다. 아이고, 시끄러워! 택배야, 택배! 귀청 따가워 죽겠네.
-할머니셔. 지금 외할머니댁에 와 있거든.
“아… 그렇군요.”
-통화한 김에 나도 물어볼 거 있는데, 혹시 여름 계절학기 들어?
“네. 마침 방학 동안 알바해달라고 카페에서 연락이 왔거든요. 어차피 학교 가는 김에 두 개 정도 들어두려고요.”
-뭐 뭐 들어? 나도 4학년 때 여유가 없을까 봐 2차 신청 때 6학점 신청해뒀거든.
“네? 선배도요?”
저절로 목소리가 벌떡 튀어나왔다. 예서는 재빨리 목을 가다듬었다.
-응. 하마터면 자리가 없을 뻔했지.
“전공은 재무관리, 부전공은 Foundation for Business English이요.”
-그래? 나도 비즈니스 영어 신청했는데. 같이 듣자. 재무관리는 이번 학기 이미 듣고 있으니까 내가 필기 노트랑 자료 물려주면 되겠다.
“네? 근데 선배, 영어 잘 하지 않으세요? 작년에 미국 교환학생 다녀오신 걸로 아는데….”
-아니, 사실은 잘 못해.
“예에? 그럴 리가 없….”
다시 개 짖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한주혁이 낮게 혀를 찼다.
-이만 끊어야겠다. 그럼 나중에 학교에서 보자.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가 뚝 끊겼다. 예서는 멍하니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얼떨떨했다. 사실은 잘 못한다니 말도 안 된다. 전에 팬케이크 하우스에서 외국인 친구들과 유창하게 대화하던 거 다 봤는데 무슨 소리람.
하지만 의구심도 잠시, 반가움에 가슴이 벅찼다. 채린과 새은, 동환 등 다들 여름에는 해외여행이나 자격증 준비, 풀타임 아르바이트 등 각자 계획이 있었다. 학점을 최대한 빨리 채우는 게 목표인 미주도 타 대학과의 학점교류 프로그램을 수강할 예정이라, 어쩌다 보니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한 과목을 주혁 선배와 같이 듣게 된다니. 여름 내내 그를 만날 생각을 하자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너무….
너무 좋았다. 기뻐서 펄쩍 뛰고 싶었다. 하지만 펄쩍 뛰는 대신 얼굴만 발갛게 물든 채 휴대폰만 꼭 쥐고 있었다. 그 소리 없는 환호는 손님이 문을 열고 약국에 들어설 때까지 계속되었다.
***
어느덧 계절학기 마지막 주가 되어 있었다. 과외와 카페 알바, 정규학기 때보다 더 빡빡한 학사 일정으로 5주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분주한 나날이었다.
그 와중에도 약국 직원의 이른 여름휴가 동안에는 모친을 도우느라 더 정신이 없었다. 약국과 집안일에 대해서만은 몸이 고된 것보다 마음이 허탈해 더 힘이 들었다.
-정우도 여름 학기 듣는다더라. 가뜩이나 더위도 잘 타는데 쉬지도 못하고 얼마나 고생일 거야. 우리 정우, 내가 옆에서 밥도 챙겨주고 그래야 되는데….
어느 날은 대형마트에 이것저것 온라인 배송을 주문해 미국의 정우에게 보내라고 종용하기도 했다. 그날은 하도 우리 정우, 우리 정우 타령에 울컥해 결국 말대꾸를 하게 되었다.
-엄마, 저 내일 시험이에요. 거기도 한인 마트 다 있고 교내 카페테리아도 잘 돼 있으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쌍둥이 오빠는 송금해 주는 돈으로 공부만 하는 게 다였다. 그에 비해, 그녀는 장학금도 받아야 하고 용돈과 생활비는 다 아르바이트로 자급자족, 거기다 수시로 약국 일도 도와야 했다. 그런데도 모친의 눈에는 이곳에 없는 정우만 보이는 것 같았다.
-넌 어쩜 그렇게 인정머리가 없고 이기적이니? 말도 안 통하는 데서 공부하겠다고 타향살이하는 오빠가 불쌍하지도 않아? 넌 그저 너만 잘되면 그만이지? 응?
-그게 아니라…. 알았어요. 제가 주문해서 우체국에 보낼게요.
하루에도 몇 번씩 폭발할 것 같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약국 직원 수민이 휴가에서 돌아와 복귀하고 나서야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재무관리 시험을 마치고 강의실에서 나올 때에야 해방감을 맛보았다. 6시가 넘었는데도 날은 여전히 밝았고, 푸르른 하늘을 날아갈 듯 몸이 가벼웠다.
한주혁에게도 새삼 고마웠다. 빠듯한 계절학기 특성상, 시험도 어쩐지 더 빡빡한 감이 있어서 그의 필기 노트와 자료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마지막 날 저녁을 사고 싶다고 어제 한주혁에게 문자를 보냈다. 다분히 충동적인 제안이었지만 그 역시 선뜻 응해왔기에 민망함은 없었다.
예서는 설레는 마음으로 한남오거리에 내려서서 냉면집으로 향했다. 노란 지붕이 비스듬히 얹힌 파란색, 붉은색의 원색 담이 이색적인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좀 더 비싼 곳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그는 굳이 여기가 맛집이라고 주장했다.
한주혁은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멀리서도 기척을 느꼈는지,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휴대폰에서 고개를 드는 시선이 따스했다.
그가 한쪽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예서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계절학기 동안 자주 보고,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듣긴 했지만 그녀가 워낙 바빠 이렇게 단둘이 식사한 적은 없었다. 팀 과제 초반에 같이 떡볶이를 먹고 커피를 마신 이후로는 처음이었다.